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선 Dec 31. 2018

인간관계의 온도

가끔씩 오래봐요, 우리

연말연시, 올해가 가기 전에 얼굴 한번 보자며 연락이 오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만나게 될 사람은 몇명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누가 봐도 사교적이고 외향적이게 보이는 나와 만난 사람들은 만남 이후에 연락이 없는 것을 의외로 생각하거나 퍽 서운하게 생각하지만, 나를 오래 알았던 사람들은 그게 내 스타일이라고 이해해 준다. 가장 고마웠던 말은, 1년만에 만난 친한(?) 언니가 '너는 진짜 오랜만에 봐도 어색하지가 않아. 어제 봤었던 것 같애' 라고 했던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는 누군가를 처음 만나거나 어떤 사람을 아주 오랜만에 만날 때 더 친밀감을 느끼는 것 같다. 내가 느꼈었던 그 사람만의 독특한 매력이 더 진하게 다가오거나,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람에 대해서 더 호기심이 생긴다. 또, 여러모로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자극을 받기도 하고 감동을 받기도 한다. 보통 이런 만남의 경우 우리는 얼굴을 상기시킨 채 맹렬한 기세로 다양한 주제에 대해 시간가는 줄 모르는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리고 밤12시가 넘어서야 마법에서 깬 것 같은 아쉬운 표정으로 헤어진다. "자주 보자!" 그렇게 말하며 멀어지는 상대에게 나는 마음속으로 말한다. '가끔씩 오래봐요, 우리'


반대로 어떤 사람과 자주 만나게 되면 이상하게도 그 사람의 단점이 속속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화는 지루하고 길게 늘어진다. 우리집 개가 어제 똥을 쌌어..남자친구가 보낸 카톡 귀여워.. 응 그 말 했잖아. 언제? 몰라.. 내가 어제 산 화장품인데 색 예쁘지..어쩌고..나 셀카 잘나온거 골라줘..말은 더이상 의미를 담지 못하고 그냥 쏟아져 흘러나온다. 이럴 때 나는 참지 못하고 금새 질린 얼굴로 나가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친구들은 거 보란듯이 웃으면서 말한다. "ㅇㅇ야 너 또 영혼 없어졌어" 하지만 나는 영혼을 붙잡아두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왜냐면 내 얼굴은 너무나도 정직하기 때문에 흥미없는 내용에 집중하는 척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만남 후 나는 기가 잔뜩 빨린 채 오늘의 외출을 후회하면서 중얼거리곤 한다. 오늘 그냥 집에서 책이나 읽을걸.. 괜히 나갔어..그리고 다시 만남의 빈도를 조절한다. 



만남의 빈도를 조절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왜냐면 우리는 집단에 소속되어 사람들과 항상 함께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3년, 고등학교3년, 대학교4년. 16년이라는 길고 긴 시간동안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가족에 소속되어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학교에 소속되어 있었다. 물론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 우리는 개인주의에 대해서 배워가지만, 그 전까지 일상을 교류하고 함께 붙어다닐 친구가 없다면 불안해졌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시시콜콜함을 터놓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에 안정을 느끼도록 배웠다.


하지만 나는 사실 만남의 빈도에 대해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내가 만나는 사람 중에 만남의 빈도가 가장 적은 사람은 북세미나에서 만났던 어떤 언니이다. 놀랍도록 취향과 생각이 비슷하면서도 서로 굉장히 다른 분야를 파고 있으므로 만나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6시간 정도는 금새 흘러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거의 일년에 한번 꼴로 만나는 이 언니와 다른 누구보다도 더욱 가까이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매일매일 안부를 묻거나, 시시콜콜한 것들에 대해서 메세지를 보내면서 느끼는 불안정한 친밀감보다 훨씬 깊고 무겁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존 카치오포는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에서 "인간은 저마다 부모로부터 특정한 사회적 소속 욕구 수준을 물려받는다" 라고 했다. 인지,사회신경과학센터장인 카치오포는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관계에 대한 유전적 온도 조절장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 말은 사람마다 사회적 소속 욕구 수준이 다르고, 인간관계에서 가지는 온도가 다르다는 뜻이겠다.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나의 인간관계 온도는 평균보다 조금 낮은 것이 틀림 없다. 그리고 나는 이런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타인과 진정으로 교류할 수 있을 때는 나 혼자서도 나의 기본적인 욕구들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독립적이면서도 행복할 때였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그럴 때 상대에게 진짜 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