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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 Aug 31. 2019

나 자신에 대한 의무

혼자였을 때는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들이 어느샌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문득 눈치 챌 때가 있다. 내 곁에 머무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록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좋은 사람' 이라는 것이 정의된 한 종류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설령 '좋은 사람' 이 되지 못한다 해도 불편하거나 싫은 사람이 되고싶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단순하고도 순진한 바람이 얼마나 힘들고 까다로운 것인지 나는 알게되었다.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이 얼마나 시시각각 바뀌는지 안다면 아마 놀랄 것이다. 얕은 서운함에서 시작된 감정은 나름 좋아했었던 사람을 미워하게끔 만드는 데 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믿고 의지했던 사람에게 느끼는 단 한번의 불신은 그 사람을 완전히 져버리게 만들 수 있다. 솔직하고 시원하다고 느꼈던 사람을 찰나에 무례하고 눈치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속이 깊고 신중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답답하고 소심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쉬운 일이다. 아주 작은 사건이나 자극에도 몇 천 갈래로 변하는 만화경 같은 사람의 마음을 안 뒤로 내가 점점 나의 모든 행동에 제약을 걸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먼저 시작된 것은 '인내'였다. 누군가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거나 의도치 않게 나를 상처입힐 때에도 나는 좋은 마음으로 인내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것이 더 현명하고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워낙 감정표현에 솔직했었던 내가 항상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태도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나는 자극에 무뎌지게끔 나를 훈련시키곤 했다. 에고(ego)가 너무 강한 것은 어찌됐든 좋은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번째로 시작된 것은 '공감'이었다. 나에게 힘든 일들을 토로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은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이야기 안에서 실제로 누가 잘못을 했고 누가 경솔했는지 판단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토닥거리는 손길을 보내주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한번 공감을 시작하자 내가 상대에게 공감해야 할 일들은 일파만파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금 이상한 일이 생기기도 했다. 서로 척을 지게 되어버린 A와 B 둘 다에게 각각 공감을 해주어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러다 그 둘이 화해를 하게 되었을때(대부분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조금 떨떠름한 감정으로 내가 들었던 모든 것들에 자물쇠를 채웠다.


세번째로 시작된 것은 '숨김'이었다. 내가 느낀 생각이나 감정을 되도록이면 밖으로 표현하지 않으려고 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신의 입장을 철저하게 고수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옳다고 해도 상대의 의견은 별로 듣고싶지 않아한다. 나는 내가 어떤 입장을 취했을 때 나의 의견에 반하는 상대의 의견이 전적으로 옳다면 그것을 빠르게 인정하고 새로운 입장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다름에 꽤나 곤욕을 치뤄야 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어떤 것이 옳은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어떤 잘못된 입장이나 생각에 되도록이면 반대 의견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평범한 문제일때는 그닥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내가 믿는 신념이나 철학에 반대되는 것이라면 아주 어려웠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에 관련된 문제일 때에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아주 아주 힘들었다.


'좋은 사람 되기' 가 어느정도 지속되자, 나는 감정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인내를 하다보니 나는 내 감정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어떤 상황에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감정인데, 이제 어떤 상황을 두고 이리 저리 고민하고 내가 이런 감정을 느껴도 맞는 것인지 검열을 한 후에 어떤 뭉뚱그려진 감정이라는 것이 흐리게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기분이 나빠도 맞는 것인가?' '지금 화가 나는 것 같은데 이 상황에서 화를 내도 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다.


계속된 공감을 하면서부터 나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생기가 사라지게 되었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나도 피로했고 거의 고문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더이상 공감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마치 그 사람의 대화를 들어주는 딱딱한 나무토막 인형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끝없이 쏟아지는 불평과 감정적인 호소를 들으며 나는 머리를 쪼는 듯한 두통을 느꼈다.


나의 감정을 숨기기 시작하자 나는 조금 얼이 빠진듯한 상태가 되었다. 누군가 어떤 말을 할 때 '그랬구나' 하는 말 의외에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고, 새로운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거의 입을 다물고 있게 되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급속도로 피로를 느끼게 되었고, 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건 주의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를 '좋은사람' 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는 어른스럽고, 배려심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그렇게 원하던 좋은 사람이 되자, 나는 인격적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좋은 사람' 이라고 분류된 질긴 실리콘 덩어리에 갇힌 것 처럼 숨이 막혀왔다.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대체 어떤 순간에서 이것을 찢고 나가야 하는지 모르게 되었다.


그 순간은 생각보다 느리게 찾아왔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나에게 무례하고 건방지게 행동했는데, 이런 인내는 어이없이 끝이 나버렸다. 나는 몸살에 걸려 컨디션이 아주 좋지 않았고, 계속되는 두통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해 잠이 아주 부족한 상태였다. 어떤 친구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가치없고 너는 이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 라고 판단하며 지금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이 시작한 동아리 프로젝트에 참여하라고 강권했다. 내가 여러번 거절했는데도 계속해서 나에게 연락을 하며 자꾸만 현재의 나를 찍어 눌렀다. 처음에는 좋은 감정으로 찾아줘서 고맙지만 힘들것 같다고 했던 것이 점점 버티기 힘겨워졌고, 나는 끝내 폭발해서 참아왔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조금 너무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말을 쏟아내고 나서 나의 기분은 다시없을만큼 상쾌해졌다. 두통도 더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그 친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쓰이지 않았다.


한번 이 덩어리를 찢고 나오니 그 후로는 더욱 자연스럽게 좋고 싫음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상대의 모습에 나는 짜증을 내기도 했고,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 쓸데없는 농담을 계속 던지는 사람에게 나는 지금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딱 자르기도 했다. 나에게 두서없이 어떤 것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며 공감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그랬구나' 라는 말을 하고 미소를 지으며 다른 곳으로 회피하기도 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다시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고 배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눈치를 보기도 하고, 나의 감정에 신경을 썼다. 불만을 늘어놓다가도 내가 지루한 기색을 보이면 아차 싶어 대화를 전환시키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지금 '좋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시도 끝에 나는 이 '좋은 사람'이 단순한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닌 나 자신일 뿐이다. 어쩔 때에는 불편하고 싫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어쩔 때에는 재미있고 함께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의 감정은 특정된 상황에서 나의 어떤 면만을 바라볼 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완전히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 나는 좀 더 온순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이 될 수는 있겠지만, 더이상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싶다는 욕심은 버리게 되었다. 사람들의 생각에, 책에서 나온 말들에 휘둘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말들을 믿지 않는다. 나 스스로 깊이 생각해서 나 자신에게서 우러러 나온 행동을 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어느 순간에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온다. 나는 그것을 '나 자신에 대한 의무' 라고 부르기로 했다. 친구에 대한 의무, 연인에 대한 의무, 동료에 대한 의무보다 가장 먼저 와야할 것, 나 자신에 대한 의무를 지키는 것이 가장 먼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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