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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 Apr 11. 2020

일상의 지루함을 반복해내는 용기

반복되는 평범함을 사랑하는 방법



사람들은 존경할만한 인물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 인물이 가진 어떤 특별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루에 2시간을 자면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했다(하루에 두시간 자는것이 어떻게 효율적을 시간을 관리하는 것인지 나는 전혀 모르겠지만..), 하루종일 몇백개의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더라 (나라면 미쳐버렸을것이다), 어렸을때 겪은 불우함으로 인한 우울증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작품과는 별개로 그 예술가는 계속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다) 등, 존경할만한 인물들은 '평범한' 존재들과는 뭔가 다른 특별함을 가지고 있었다고들 한다. 그리고 이런 신화들은 불우함과 예술가라는 키워드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거나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린 수많은 예술가들, 잠깐 살아있을 때 모든 것을 불태우고 가버린 수많은 천재들. 그들의 신화는 예술을 떠받들고 찬양하지만 그 예술을 창작해 낸 사람이 일상의 평범함을 반복하면서 느꼈어야 마땅했을 행복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평범함이란 부끄럽고 멍청한 것이며 사랑받지 못하는 속성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예술을 한다던 많은 지인들이 소위 말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남들과 달라야한다고 생각했었고, 바로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그 사실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다. 나는 그럭저럭 괜찮은 삶에서도 비극적인 점을 찾아내고야 말았고, 다른 사람들은 이 비극적인 세상에서 생각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는 것에 우월감과 동시에 고통을 느꼈다. 남들이 모르는 것을 혼자 향유하는 것에 만족감을 느꼈지만,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바보같았던 점은 내 정신이 불건강해졌을 때 나는 이 불건강함들을 치료하고 극복해야 할 것이기보다는 나의 특별한 점들을 이루어주는 정신적 퍼즐이라고 생각했던 점이다. 나의 정체성은 사랑과 지지보다는 고통과 불행을 자양분삼아 이루어졌고, 이런 점들로 인해 얼마간은 나의 기대대로 돋보일만한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고통과 불행을 자양분으로 삼은 에너지는 언제나 아주 짧고 번뜩이는 빛을 발하고 금새 사그러지고 만다. 그 이후에는 한참을 무력감과 자괴감에 헤매이고, 우울증에 찌들어 허송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이런 지속불가능한 에너지 때문에 나는 내가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상과 현실의 사이의 끔찍한 간극을 느껴야 했다.


오랫동안 이런 착각에 젖어 세월을 보내다보면 어느새 불행에 중독되어 있기 마련이다. 가장 불행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작품이 제일가는 명작인 것 같고, 영화 한편을 보더라도 내 정신을 끝없이 괴롭히고 말로 이루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충격을 주는 영화를 고르게 됐다. 영화를 보고 바닥난 정신력때문에 침대에 쪼그리고 누워 심호흡을 하면서 끔찍함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나에게 그런 자극을 주며 그것들을 '내 정체성을 이루는 자양분' 이러고 생각했다. 일상에 있어서도 나는 대부분 드라마틱하게 행동했다. 작은 비난에도 예민하게 반응했고, 작은 좌절감은 몇개월을 지속시키는 무기력함을 만들었다. 작은 문제 때문에 인간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으며, 작은 실수에도 몇번이고 자책하며 나 자신을 못살게 괴롭혔다.


내가 어떻게해서 이 상황(이라고 쓰고 중2병이라고 읽는)에서 빠져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더이상 내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특별한 존재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남들보다 세상의 불행과 고통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있다고 그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예술하는 사람들이 멸시하는 투로 말했던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일상의 지루함을 반복하고 있으며, 그 반복에서 빛나는 어떤 것들을 찾고 행복을 느낀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치열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은 별로 박수를 받아야 할 일도 아니며, 그냥 자신을 괴롭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돌아보면 내 삶은 이전보다 많이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다. 날카로운 고통도 없고, 강렬한 불행도 없다.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고, 대부분의 일들은 나를 별로 반응하게 하지 못하는 정도에 그친다. 처음에는 내 삶이 녹슬었다고 느꼈지만 이제는 평화롭고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왔다고 느낀다. 조금 피곤함을 느끼면서 눈을 뜨고,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쐬며 잠을 깨려 노력한다. 양치를 하고 찬 물로 세수하며 상쾌함을 느끼고, 옷을 꿰어입고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해 출근한다. 내 가치를 증명하고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 일하고, 퇴근 후에 먹고싶었던 음식을 먹으며 맥주를 한잔 한다. 가볍고 재미있는 쇼를 보면서 하루종일 쌓여있던 스트레스를 덜어내기도 하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삶, 이 삶은 평화롭다. 


재미있는것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삶에서 써내는 글이 불행과 고통으로 점철된 삶에서 썼던 글보다 어느모로 보나 더 나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 나는 어떤 예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서, 한편의 글을 완성한 바로 다음 날, 다음에 쓸 글의 주제를 생각해 낼 수도 있다. 평범해지면 예술적으로는 실패할 것이라는 걱정은 그냥 나의 환상에 불과했다.


나는 때로 이 반복되는 지루함이 사랑에 있어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더이상 두근거리지 않아서, 감정적으로 무뎌져서, 고통이나 불행이나 불타는 열정이 없어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내 손으로 망쳐버린 수많은 관계들. 나는 이 관계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사랑의 속성은 반복이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반복적으로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는 것이다. 


사랑의 속성을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식물을 키우는 것과 같다. 키우기 까다로운 식물도 있고, 상대적으로 키우기 쉬운 식물도 있다. 모든 식물은 제각각 필요로하는 요소가 있다. 통풍을 좋아하는 식물, 햇빛을 직접적으로 쐬기 좋아하는 식물, 햇빛을 좋아하지만 직접적으로 쐬기는 싫어하는 식물, 일주일에 한번 물을 주면 좋아하는 식물, 이주일에 한번 물을 줘야 좋아하는 식물, 작은 곳에서도 만족하고 잘 자라는 식물, 작은 곳에 있으면 답답해서 성장이 더뎌지고 시들해지는 식물.. 식물의 속성을 알면 그 속성에 맞춰 필요한 것들을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반복적으로 제공해주면 된다. 물을 좋아하는 식물을 잘 키우고싶다고 매일매일 흙이 잠길정도로 물을 주면 뿌리가 썩어버린다. 대상을 사랑하는 자기의 욕심이 오히려 대상을 망쳐버리는 것이다. 


식물을 키우는 것은 지루하고 반복적이지만 그러다보면 분명한 결실을 맺는다. 그래서 마침내 나는 이 지루한 과정에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쏟지도, 너무 무관심하지도 않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누군가 관심을 필요로 할 때는 관심을 가지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을 때에는 내버려둔다. 도움이 필요할 때는 기꺼이 돕지만, 먼저 나서서 호들갑 떨지는 않는다. 이런 관계에서는 엄청난 감동과 엄청난 우정이 있는것도 아닌데, 보통 가장 오래 지속되고 결국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된다.  


나는 이런식으로 지속되는 내 삶이 굉장히 만족스럽다. 이제 나는 특별하거나 예술적인 사람이기보다는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 그들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볼때 나도 행복해지니까. 앞으로도 부디 평범하게 반복되는 이런 삶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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