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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민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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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Park Dec 23. 2020

한국 사람은 없어요?

애리조나에 동양인이 없는 건가요, 우리 회사에 없는 건가요?

드디어 첫 출근 날이 왔다. 스카이프 인터뷰를 했을 때 언뜻 보기에 우리 팀에는 한국사람은 물론이고 일본이나 중국사람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인터뷰 때 정신이 없어서 기억을 제대로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회사엔 500여 명이, 적어도 내가 속한 빌딩엔 250명 정도가 있으니까 하여간 아시안 (이때에 내 머릿속에 ‘아시안’ 이란,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 98%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있겠지-하는 생각을 아주 잠시 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정말 회사에 출근해보니 한국사람이나 중국사람, 일본 사람은 없어 보였다. 흑인도 드물었다. 여기 사실 백인만 고용하는 회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왠지 모르게 -그럴 이유는 전혀 없지만- 주눅이 들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그 당시 내가 얼마나 무지했던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부끄러움에 낯에 열이 오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팀에만 해도 벌써 9개 이상의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있고 단순히 눈으로 보아서 백인, 흑인, 아시안이 있는 게 아니라 다문화 가정 아래 자란 혼혈인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그냥 무시해 버린 셈이었다. 어쩐지 같이 일하면서도 백인도 흑인도 아시안도 아닌 것 같은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팀원들이 있다 싶었는데, 얼마 후 그들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서는 화들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단군 할아버지 아래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진 것에 자부심을 갖는 -아직도 이렇게 교육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이 작은 인간이 바라본 세상의 시야는 과연 좁디좁은 것이었다.


미국에 온 지 3년 4개월여 만에 ‘진짜 미국’에 온 기분이었다. 뉴저지에 살 때에는 물론 주말마다 뉴욕에 놀러 가긴 했어도, 물론 남편이 백인이긴 해도, 버스 기사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이탈리안 이민자들이긴 했어도, 그래도 내가 살던 곳은 영어를 하기 싫으면 한마디도 안 해도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한인타운이었고, 한국인 내외분이 계시던 집에서 방을 빌려 살았고, 한국인 집주인 언니가 있는 집에 한국인 룸메이트들과 지냈고, 한국 그 어느 치킨집보다 한국 치킨을 잘하는 치킨집이 있었던 그런 곳이었다. 남편과 같이 순댓국 집이라도 갈 때면 ‘저 백인이 순댓국을 어떻게 먹나-‘ 하며 쳐다본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직장에서도 한국어로 많은 비중의 커뮤니케이션이 오갔고 사실 굳이 누구와 얘기를 할 거리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미국에 온 건지, 아니면 한국의 어느 시골쯤에 온 건지 잘 분간을 하기 어려웠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온 이 곳은 한국사람은커녕 아시안도 보기 힘든 곳이라니. 이것은 사실 그 어떤 인종문제라기보다 언어문제로 사람을 기죽이는 것이었다.


이제  영어로 모든 의사소통을 정말 해야 하는구나.’


내가 미국에 와서 느끼건대, 영어는 말하는 사람마다의 악센트가 다 다르다. 그래서 아무리 토익이 몇 점이라 해도, 아무리 본인의 영어 실력에 자부심이 있어도 한국에서만 지냈던 토박이라면 미국에 왔을 때 당황을 금치 못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다. 나름 말의 속도가 빠르다던 ‘가십걸’도 계속 돌려보며 대부분의 내용을 캐치했던 내가 아니냔 말이다. 아무리 토익이 쓰잘 데 없는 영어 시험이라고 해도 그래도 900점대 이상을 받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래도 남편이 미국인이고 한국말을 쥐톨만큼도 모르는데 영어로만 대화해도 그래도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고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결혼까지 하지 않았냔 말이다. 그런데 왜 미국에 와서 듣는 다른 사람들의 영어는 왜 안 들리냐고. 왜? 내가 한국에서 배워온 ‘악센트’라봤자 영국과 미국의 차이, 그 마저도 통달하지 못했었다. 물론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가능하긴 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가진 각각의 악센트에 일일이 적응하기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남편의 삼촌 할아버지 내외분의 악센트는 사실 아직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분들은 뉴요커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새로 들어간 팀은 팀원이 열다섯 명 정도. 그 말은 열다섯 개의 다른 악센트가 있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듣는 데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 회사는 Slack이라는, 회사 내 흔히 카카오톡 같은 것이 있는데, 팀 내 친한 여자들끼리 모인 ‘단톡 방’이 아주 관건이었다. 그들은 새로 온 나를 환영한다며 입사 후 며칠 만에 나를 그 채팅창에 초대해 주었다. 그 채팅창 안에는 나 포함 여덟 명이 있는데 그들의 말하는 속도를 따라가는 것은 아주 매우 확연히 불가능했다. 다들 타자를 어찌나 빨리 치는지. 영어 읽는 속도가 아직 느렸던 나에겐 일을 하면서 채팅을 동시에 확인하는 것이 영 무리였고 - 그렇다, 나는 멀티태스킹에도 취약하다- 그러다 보면 잠시 못 본 사이에 200개가 넘는 메시지들이 와 있었다. 그리고 그걸 다 좇아가겠다고 읽는 와중에도 새 메시지는 계속 줄줄이 와 앉았다.


이전까지는 영어로 뭔가를 말하거나 쓰려고 하면 머릿속에서 두세 번의 시뮬레이션을 하고, 메시지의 경우 다듬고 다시 읽고 또 읽고 남편의 자문도 가끔 구하고 나서야 Send 버튼을 눌렀었는데, 이젠 그러고 어쩌고의 시간은 허용되지 않았다. 내가 말하는 게 말이 되든 안되든 그냥 일단 내뱉어야 했고, 회의를 할 때도 무슨 내용인지 따라가기 바빴다. 정말이지 야생의 어디쯤, 정글의 한 복판에 떨구어진 기분이었다. 그래도 신이 났었다. 이런 게 내가 정말 원하던 ‘미국 생활’이 아니던가! 이렇게 부딪히며 살아남은/살아남을 극복기라니, 나중에 먼 훗날에 얼마나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대견할까!


하지만 행복한 나날도 잠시, 저기 어디서 어떤 가면이 스멀스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 내게 소리 없이 요란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가면 증후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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