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당분간 보지 말기로 해, 안녕, 뉴저지
미국에 오고 나서 지금까지 두 번의 이사와 세 곳의 보금자리가 있었지만 이번에 해야 할 이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이사였다. 어쩌면 한국에서 넘어올 때보다 훨씬 더 이사다운 이사, 이민다운 이민 같은 느낌이었달까.
한국에서 넘어올 때엔 캐리어 두 개에 백팩 하나로 달랑이었다. 뉴저지 내에서의 이사 역시, 그래 봤자 웬만한 건 룸메이트 들과 공동으로 사용했던 것들이 많았고(그릇, 청소도구 등) 방 한 칸 수준의 살림 살이었는 데다가, 이사 가는 곳이 차로 15분 정도의 거리였기 때문에 그저 작은 벤 하나 빌려서 두세 번 왔다 갔다 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타운하우스로 이사를 가고 결혼을 함에 따라 가구며 생활용품들이 하나둘씩 쌓였다. 그래 봐야 원베드룸에 15평 정도 되는 집이었는데 짐이 늘어 봐야 얼마나 늘었겠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경기도 오산보다도 더 오산이었다. 다행히 값비싼 가구랄지 소중히 다뤄서 운반해야 하는 것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남편과 나는 여러 가지의 선택지를 두고 고민을 할 수 있었다. 선택지라 함은 다 버리거나 팔고 애리조나에 가서 다시 다 새로 사는 것-어차피 대부분 이케아에서 구매한 것들이기 때문에 굳이 애지중지 모셔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이사 트럭에 다 싣고 로드 트립 하듯이 대륙횡단으로 며칠에 걸쳐 이사를 가는 것-하지만 이 경우 나는 운전면허가 없어 남편이 혼자 다 운전을 해서 가야 했고 중간에 쉴 곳과 숙박도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겨울이라 폭설의 우려도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안전한 선택지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사용 컨테이너로 짐들을 부치고 가장 중요한 것들을 챙겨서 비행기를 타는 것 정도가 있었다. 생각을 해보자니 우리는 우선 무언가를 팔고 갈 시간이 없었고, 아무리 비싸지 않은 가구들이라 해도 애리조나에 몸만 겨우 가서 다시 다 사자니 그것도 또 시간과 돈이 든다는 걸 깨닫고는 첫 번째 선택지는 버리기로 하였다. 남편은 은근히 로드트립에 로망이 있는 듯 보였다. 그다지 좋은 선택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어도 ‘로드트립’이라는 네 글자의 단어가 은근히 사람을 간질이는 것이었다. 나도 여행을 좋아하는지라 뭔가 로드트립으로 인해 펼쳐질 모험이 기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거리 대비 트럭 대여비가 오르고, 주유비며 숙박비며 다 따져 봤을 때 그게 과연 그렇게 소중한 추억만을 남겨주겠느냐 하는 것이 의문이었다. 우리의 이사는 미국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이 될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가는 중간에 폭설이라도 내리면-어우, 그런 상황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길거리에 길 잃은 두 마리의 강아지가 되는 것이었다. 가장 편하고 안전하게 가는 법은 역시 비행기였다. 이 방법을 선택할 경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는 짐을 따로 이사 업체에 컨테이너로 부쳐야 했는데, 컨테이너는 한 달 정도 이후에 애리조나에 도착할 거라고 했다. 가서 물건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빈 집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생활을 해야 할 테지만 몇 주만 고생하면 비용상이나 편의성이나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결국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애리조나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요즘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온라인 아파트/홈 투어가 꽤 일반화되고 있지만, 우리가 애리조나로 이사를 올 때만 해도 가상 투어는 좀 낯선 것이었다. 직접 가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단순히 위치와 사진만 보고 살 곳을 고른다는 게 우리를 조금은 겁먹게 했다.
구글로 검색해 보니 다행히 회사 바로 앞에 길 하나 건너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사진도 그럴싸해 보이고 회사랑도 걸어서 10-1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라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생각했을 즈음, 후기들을 보니 그곳이 별점 5점 만점에 3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3점이면 그래도 평균 아니냐 했지만 남편은 뭔가 그래도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남편이 열심히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변의 다른 아파트 단지들을 검색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직접 보지 않고 사진만 믿고 결정한다는 게 둘 다 썩 내키지가 않았다. 이미 구매한 비행기 표와 이사 날을 맞추는 것 또한 관건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시부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리가 클로이 회사가 궁금해서 여기 겸사겸사 와 있거든. 그런데 여기 바로 앞에 아파트 단지가 몇 군데 있어서 한번 가 볼까 하는데 어때, 너희 살 곳 정했니?”
시부모님이 주말 나들이 겸 해서 우리 회사 근처까지 운전을 해서 구경을 가신 모양이었다. 시댁에서 그곳까지는 편도 두 시간 반 정도 거리였는데 그저 며느리 일 하는 곳이 궁금해서 드라이브 겸 둘러 보신 모양이었다. 오예! 우리는 한 두 군데 정도라도 좋으니 너무 피곤하지 않으실 선에서 둘러 봐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씀을 전했다. 다행히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연락이 왔다. 세 군데 정도 둘러보셨는데 가장 좋은 곳은 여기였단다-하면서 말씀하신 곳이, 우리가 반신반의했던 구글 검색 결과 창의 그 아파트 단지였다. 시부모님은 직접 모델하우스에 들어가셔서 영상이며 사진을 촬영해서 보내주셨다. 그리고 리스를 담당하는 오피스 직원과도 직접 얘기할 수 있게 연결을 해 주셨다. 매니지먼트야 어차피 살아 보지 않는 한 알기 힘든 부분이었고, 어쨌든 시설은 꽤 좋아서 마음에 들었다. 지내고 있던 뉴저지의 타운하우스보다 두배 정도는 더 넓은 곳이었는데 렌트비는 200 여불 정도 더 쌌다. 회사를 걸어서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것도 아주 큰 장점이었다. 자가용이야 애리조나에 도착하자마자 살 것이었지만, 어쨌든 난 면허가 없었거니와 우리는 차를 두 대나 굴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날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다니던 회사에서는 3년 넘게 조용히 다니던 애가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니 조금은 놀라는 눈치였다. 처음엔 불만이 있었으면 말을 했어야지 이렇게 나가겠다고 하면 어떡하니, 하며 사장님도 서운한 말씀을 하셨다-사실 미국은 퇴사 하기 2주 전에 사표를 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고, 나는 무려 3주 전에 말을 했는데도 말이다-. 말을 해서 고쳐질 불만이었다면 말을 했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근본적으로 바뀌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었기에 그냥 ‘아, 애리조나에 직장을 구하게 되어서요-‘ 했다. 그랬더니 아무래도 시댁이 애리조나에 있다는 걸 아는 터라 그런지, 그래서 사장님 입장에서는 그 회사에는 전혀 문제가 없고 나는 그냥 가족들 가까운 곳으로 간다고 결론을 내리게 됐는지, 얼굴과 어조에서 어느새 서운한 투가 씻겨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는 처음엔 왜 이렇게 서둘러 나가냐더니 이제는 2주만 더 나오고 그만두라고 말을 바꿨다. 아마도 월급 정산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월말에 딱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나야 일주일 치 주급을 더 못 받는 격이 되었지만 그래도 정신없는 와중에 1주일의 쉬는 시간이 더 생긴 셈이니까 나쁠 것이 없었다. 오히려 더 좋았다. 이젠 보기 싫은 사람들 안 봐도 되고 부당한 대우 안 받아도 되고 더 이상 배울 것이 남지 않은 이 곳을 떠난다니 그저 행복할 뿐이었다. 그래도 물론 마지막까지 일을 열심히 했다. 인수인계할 것들, 후임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지만 앞으로 일을 할 그 누군가를 위해 그동안의 자료들을 잘 정리하고 3년 3개월 여만에 그곳에서의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렇게 헐레벌떡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정리해야 할 일들을 최대한 빨리 정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컨테이너를 보내는 날, 그러니까 우리가 뉴저지를 떠나던 그 날, 마지막 1분 1초까지 짐을 싸느라고 밤을 꼴딱 새웠다. 이제 이렇게 추운 공기와도 한동안 안녕이었다. 애리조나에도 겨울이 있는 지역이 있긴 하지만 굳이 그 지역들을 찾아가지 않고서야 우리가 살 곳은 추워봤자 가을 날씨 정도였다. 추워서였는지 홀가분해서였는지, 나는 마지막으로 우리의 타운하우스와 작별인사를 하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왕복 비행기 티켓이 아닌 애리조나행 편도 티켓을 쥐고서, 이제 언제가 되었든 다음에 뉴저지/뉴욕에 올 때에는 방문객이라는 사실에 어쩐지 소름이 돋으면서 그렇게 나와 남편은 뒤도 안 돌아보고 비행기에 올랐다.
겨우 비행기 좌석에 앉고 나니 부푼 꿈을 안고 뉴욕 공항에 도착하던 날, 회사에 입사해 이런저런 경험을 쌓은 시간들, 마음에 들었던 것 안 들었던 것,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된 것, 영주권을 받은 것, 타운하우스에서의 생활 등 많은 기억들이 뒤죽박죽 머릿속에 엉키어 갔다. 그리고 곧 그 기억들을 잠을 자지 못해 괴로워하던 눈꺼풀이 지그시 눌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