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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민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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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Park Aug 03. 2020

내 삶은 스카이프를 타고 애리조나로

인생은 방울방울? 아니, 인생은 일희 일비

드디어 약속했던 전화 인터뷰의 날이 왔다. 나는 아직까지도 영어로 전화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데, 전화기 너머의 음질이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상대방의 억양이 아무리 좋아도 알아듣기가 어렵고, 표정이나 제스처 같은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분위기 파악을 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엔 사람들의 머릿수만큼이나 수많은 억양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럴 경우 아무리 내가 다시 설명해달라고 요청을 해도 끝까지 못 알아듣게 마련이었다.


“헬로- 나는 크리에이티브 팀 전체 디렉터 00이야.”

“헬로- 나는 00이고, 여기 그래픽 디자인 매니저야.”

“헬로- 나는 그래픽 디자인 리드야.”


세상에. 그러니까 지금 이 전화 인터뷰는 3:1 인터뷰인 거다. 전화로 세 명을 상대해야 했다. 이미 세 명의 사람들이 각자 소개를 끝내기도 전에 난 그 이름들과 직책을 새까맣게 잊었다. 마치 수능 날 내 앞에 놓인 언어 영역 시험지가 검은색은 글자요 하얀색은 종이인가 했던 것처럼. 내 귀로 들려오는 언어는 영어라기보단 어떤 소음에 가까웠다. 도망가고 싶었다. 망신당하기 전에 이대로 미안하다고 하고 끝을 내야 할까? 아무것도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하지만 그동안 또 내가 얼마나 기다려 온 순간이란 말인가. 어떻게 해서든 이 회사에서 입사 제의만 준다면 그렇게도 꿈꾸던 애리조나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 기회를 도망치듯 날려 보낼 수만은 없었다.


처음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데 몇 초간 말이 없이 멍하니 있었다. 그 후에는 겨우 입을 떼었지만 로봇 같은 어조로 겨우 몇 마디 내뱉을 뿐이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다 끝날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면접관들에게, 정말 죄송한데 제가 지금 너무 긴장하고 떨려서요,라고 했고, 그들은 허허 웃으며 긴장하지 말라고, 우린 그냥 편하게 대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다행히 조금은 마음을 놓게 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긴장되지만 더듬을 지라도 최대한 내가 할 이야기들을 해 나갔다. 그들의 억양은 우리 귀에 익숙한 그 미국 영어 억양이어서 그래도 그나마 수월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세 명이 번갈아 가면서 질문을 계속하거나 한 사람이 여러 질문을 한꺼번에 할 때면 이따금씩 다시 물어봤어야 했다. 그렇게 전화 인터뷰를 한 시간 넘게 가량 했다. 가장 난감했던 질문은 앱 쪽, 그러니까 UX나 UI 디자인에 관심이 있느냐, 있다면 그건 네가 정말 관심이 있어서 있다고 한 건지 아니면 그냥 지금 디자이너의 생태계가 그렇게 변하고 있어서 그런 건지 말해보라는 질문이었다. 지원했던 포지션이 그쪽 분야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질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런 낚시성 질문은 나를 대략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사람이 아무리 입사를 하고 싶더라도 사기를 치고 들어가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뭐 그런 생각과, 어차피 여기서 거짓을 말하고 들어가 봤자 다 금세 들통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솔직하게 답변을 했다. 거기서도 그저 내 답변에 웃어넘길 뿐이었다. 또 하나의 어려웠던 질문은 역시, 왜 굳이 뉴욕 뉴저지에서 애리조나로 넘어 오려하는지 묻는 것이었다. 이 질문은 대답하기엔 다른 어떤 질문들보다도 쉬웠지만, 과연 그들이 내 이유가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내가 그곳을 금세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난점이 있었다. 하지만 답변을 듣고 나서 다행히도 알아서 이해해 주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인터뷰 막바지에 “그럼 다음 스카이프 인터뷰 때 보자!” 는 말을 들었다. 아? 스카이프 인터뷰가 또 있었네...? 어쨌든 전화 인터뷰를 다 마치고 HR 부서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듣자 하니 인터뷰가 아주 잘 진행이 된 거 같다고, 2차 면접인 스카이프 인터뷰 일정을 어서 잡고 싶다고 전해 들었다고. 그렇게 첫 단추가 잘 꿰어진 느낌은 언제 느껴도 좋을 느낌이었다. 아직 마냥 좋아하기엔 이르지만 원래 내 인생은 지극히도 일희일비하며 흘러가지 아니했던가. 나에게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불가능이란 영역의 것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여가 지나 스카이프 인터뷰 진행되었다. 이번엔 영상 통화로 하는 것이어서 오히려 마음이 좀 놓였다. 그런데 할 수 있는 말이라면 저번 인터뷰 때 다 말했는데, 뭘 더 얘기해야 하지? 뭘 준비해야 했는지도 모른 채로 인터뷰에 임했던 기억이 난다. 드디어 벨이 울리고 손가락을 덜덜 떨며 영상 통화 수락 버튼을 클릭했다.


‘어, 그런데, 이게 도대체 몇 명이지...?’


도대체 몇 명이냐면 그러니까 6명에서 8명은 되는 것 같았다. 매니저와 디렉터는 전화 인터뷰 전에 링크드 인을 스토킹 하다시피 해서 사진을 봤었기에 좀 친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저번 전화 인터뷰에서 들리는 목소리로는 금발의 백인 여성이라고 속으로 확신했던 미셸이, 이제 보니까 라오스 계 미국인이었다. 백인이네 아시안인이네 보다도, 생각했던 이미지와 많이 달라서 왠지 모를 충격을 받았고, 그 외에 화면 속 방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 난 아주 매우 깜짝 놀랐다. 이래저래 물어 오는 질문들에 대답을 하고 저번 인터뷰 때 했던 얘기들을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여기서 또 하기도 하고. 그래도 많이 웃고 많이 편하게 인터뷰가 진행되어 나갔고, 이제 끝나는 분위기가 될 무렵 “다음 팀이 곧 들어올 거야.”라는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사람들은 새로운 그룹의 사람들로 바뀌었고 그 뒤로 한참을 얘기한 후에 한번 더 그만한 규모의 다른 그룹과 인터뷰하면서 장황했던 스카이프 인터뷰가 끝이 났다. 총 두 시간 반은 족히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그래도 확실히 희망적이었던 건, 디렉터라는 사람이 “네가 우리 회사에 와서 직접 어떤지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우리가 널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도 분위기 같은 걸 직접 보고 너한테 맞을지 안 맞을지 결정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하더니, 이내 노트북을 회의실 밖으로 들고나가 사무실 가상 투어까지 시켜 주었다는 것이었다. 레고 보드로 프로젝트 들을 정리하고 크리에이티브 팀 자리는 누가 봐도 크리에이티브 팀 소속인 게 티가 나도록 책상들이 각자의 취향대로 아주 현란하게 꾸며져 있었다. 회사 투어를 시켜 주는 그들도, 구경하는 나도 너무 신이 났었다. 그리고 쐐기를 박은 마지막 한 마디가 완전히 그린라이트를 밝혀 주었다.


“그럼 내가 당장 HR한테 전달할게. 출근 일자는, 일단 네가 멀리서부터 이사 오고 지금 어차피 곧 연말이고 하니까 급하게 올 거 없이 내년 초나 올 연말에 와도 좋고.”


정말 쿨한 척 알겠다며 인터뷰를 마쳤지만, 나는 사실 그 길로 로켓을 타고 달나라로 날아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우주여행은 평생 하고 싶은 생각도 없으면서 말이다. 가장 먼저 남편에게 이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오빠! 우리 애리조나 가!!!”


 하지만 얼마 못 가 걱정도 밀려왔다. ‘만약 이 회사도 저번처럼 스캠이면 어떡하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애리조나에도 디자이너가 한 둘이 아닐 텐데 어째서 굳이 나를 채용하려 하겠어? 이거 다 사기 아냐?’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남편은 내 이런 걱정을 듣더니 이번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너 팀원 전체하고 영상통화로 인터뷰도 했고, 그 사람들이 회사 투어도 시켜 줬다면서. 그리고 입사 절차 같은 것들, 인터뷰하는 것들도 보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나를 진정시켜 주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오퍼 레터를 작성해야 한다며 HR 부서와 함께 출근 일자를 조정하게 되었는데, 팀 디렉터와 달리 거의 열흘 안에 와 줄 수 없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가고 싶었지만, 가서 지낼 집도 무엇도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데다, 동부에서 서부로 대륙 횡단 수준의 이사를 하는 수준이었고, 다니고 있던 직장에도 2주 정도 미리 언질을 주어야 했기 때문에 한 3-4주 정도 여유를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12월 17일에 첫 출근 하는 거 어떨까요? 물으니 그쪽에서 한 5초 정도 주저하다가 좋을 대로 하라고 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회사는 크리스마스가 끼어 있는 주는 그 주를 통째로 회사가 문을 닫는다. 개인 휴가와는 별개로 말이다. 그래서 17일에 출근할 경우 나는 일주일만 일하고 일주일은 쉬면서 2 주급에 해당하는 급여를 받게 되는 셈이었다. HR 쪽 직원은, 원래는 그런 식으로 처음부터 혜택을 주지는 않는데, 어쨌든 이사 비용을 보태 주지 못하니까 이런 편의라도 보라고 배려해 준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오퍼 레터에 서명을 하고 각종 필요한 정보들을 주고받고 나니 이제야 실감이 나려는 것 같았다.


“이제 3주 안에 여기 생활을 모두 다 정리해야 해!”


말이 3주지, 다니던 직장에 최대한 빨리 퇴사한다고 전하고, 직접 가 볼 수도 없는 채로 사진만으로 머물 곳을 정해야 하고, 무엇보다 어떤 수단으로 이사를 가야 할지 결정을 빨리 내려야 했다.

모든 것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즐거운 압박이었고 즐거운 스트레스였다. 죽이 됐든 밥이 됐든 어쨌든 3주 뒤에는 따뜻한 애리조나에 있을 테니 말이다. 여행자나 방문자가 아닌, 애리조나 주민으로.

가서 분명 새 회사-무엇보다 한국인이 한 명도 없는 회사-에 적응해야 하고 새 업무에 스트레스받고 예상치 못한 일들에 힘들어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또 슬퍼하면 될 일이었다. 일단 지금은 행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토록 가고 싶던 연중 내내 따뜻하고 더운, 건조한 지역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 남편의 가족, 친구들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너무 가고 싶어 했던 꿈의 회사 중 하나인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어떠한 연줄 없이, 네트워킹 없이 혼자서 맨땅에 헤딩해가며 이직을 해냈다는 것. 지금은 ‘희’가 너무 커서 희희낙락만 하기에도 모자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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