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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민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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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Park Jul 26. 2020

뉴저지에서 애리조나로 이직할 수 있을까?

머리 좀 까지면 어때, 맨 땅에 계속 헤딩하면 언젠가 되겠지.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적어도 내가 생각했을 땐 결전의 날이었다. 평소에 정장은커녕 세미 정장도 입지 않는 내가 이 인터뷰를 위해 전날 밤 내내 옷장 앞을 서성였다. 가지고 있던 옷 중 가장 갖춰 입은 듯하면서도 동시에 디자이너로서의 개성을 보여주는 옷을 입어야 했다. 말이 쉽지, 그것은 마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와도 같은 것이었다. 인터뷰를 보기로 했던 그 의류 회사는 한국기업이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하지만 나름 뿌리가 깊고 뉴욕시티 한복판에 커다란 간판까지 있을 정도였다. 패션계에 한 획을 긋는 정도의 회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그럴싸한 회사였다. 티셔츠 디자이너 경력자를 우대한다는데 티셔츠 디자인이란 게 생각보다 흔하지 않은 경력이기에 그것을 많이 해 온 나로서는 마치 나를 위한 자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HR팀에서 한 분이 나와 나를 인터뷰할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인터뷰할 회의실로 들어가면서 쓱 보니 회사가 정말 ‘회사 같은’ 곳이더라. 넓은 사무실이 어울릴 만큼 많은 직원들이 열심히 근무 중이었다. 한 공간에는 패션 회사의 정체성을 주장하기라도 하듯 옷에 관련된 물품들이 즐비해 있었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한국사람이었다. 그래서 잠시 한국에 온 기분이었다. 당시 뉴저지의 한인 밀집 지역에 살았어서 한국인이 어딜 가나 있고 많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완벽하게 한국 같은 느낌을 받은 건 오랜만이었다.


“안녕하세요 클로이 씨.”

드디어 면접을 보러 디자인 디렉터 분이 들어오셨다. 아주 캐주얼한 복장에 아직 잠이 덜 깨신 듯 손에는 커피가 들려있었다. 포트폴리오에 대한 얘기를 잠시 하고, 회사에 오면 앞으로 어떤 일들을 하게 될지 설명을 들었다. 이미 입사한 신입 직원에게 안내하듯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던 차에 이런 질문이 훅 들어왔다.


“그런데 여기(미국)까지 왔는데 한국 회사에 다녀도 괜찮은 거예요?”


아. 그런 질문이 들어올 거라고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그분은 “여기 한국 회사보다 더 한국 회사 같은 곳이에요. 휴가도 일 년에 병가까지 합해서 5일밖에 안 되고, 빨간 날에도 대부분 출근해요. 그리고 경영진의 경영 방식은 웬만한 한국 회사보다 더 한국 같아서 서열이나 위계질서나 그런 것도 엄청 심하고. 그럼에도 진짜 일하고 싶으면 상관은 없는데 적응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 말에 차마 거짓 표정을 지을 만큼 난 대단한 연기자는 아니었나 보다.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머물렀다. 당시 다니고 있던 회사도 한국 문화가 반 미국 문화가 반인 회사여서 마음에 안 드는 점이 많았다. 주말 출근이나 야근에 특별 수당이 없었다는 점, 휴가를 갈 때도 노트북을 챙겨 가서 일을 도와야 했다는 점 (심지어 결혼 때문에 낸 휴가에서도 일을 도와야 했다. 아 물론 결혼한다고 휴가를 더 준 것도 아니고 열흘 휴가를 아끼고 아꼈다 쪼개서 써야 했다.), 휴가가 1년에 열흘이었는데 그 마저도 연말까지 다 쓰지 않으면 다음 해에 ‘적립’되지 않고 사라진다는 점, 그리고 꼰대 문화 같은 것들이 나를 숨 막히게 했었다. 한국하고 미국이 반 섞여도 그 정도였는데 여기 회사는 한국보다 더 한국 회사 같은 회사라니. 꽤 오랜 시간 그곳에서 일했다는 디렉터 님은 당신 본인도 아직도 이 회사 문화에 적응이 안된다면서 그냥 올 거면 돈만 보고 오는 거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래도 업무 자체는 재밌을 것 같은데요, 하며 멋쩍게 웃고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돌아오는 우버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갔다. ‘그래도 몇 년만 고생해서 경력을 쌓고, 그걸 토대로, 혹시 알아? 진짜 이름 있는 패션계 회사로 이직을 할 수 있게 될지.’ ‘아냐 이건 아닌 것 같아. 이런 것들이 싫어서 이직하고 싶은 거였잖아. 그런데 지금 회사보다 더 심한 곳을 간다고? 아무리 돈을 많이 준대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어쩐지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느낌이야. 일하고 싶다고 와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지원자에게 디렉터까지 그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정도면 이건 분명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상인 거야.’ 당시 다니고 있던 회사는 이제 같이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어디로든 이직을 하는 게 역시 맞는 건지 어떤 건지 엄청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며칠 뒤 그 회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채용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아마도 한국 회사보다 더 오랜 한국 문화가 자리한 회사라는 언급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모습을 디렉터 님이 역시 캐치한 모양이었다. 이런 곳보다는 좀 더 미국 같은, 미국다운 회사에서 일해 보는 게 나을 거라고 등 떠밀어 준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인터뷰 때에 포트폴리오에 대해 조언도 해 주셨었다. 채용하겠다고 하면 고민이 되면서도 거절하지 못하고 입사했을 내 모습이 아마 눈에 훤하게 보이셨나 보다. 그래서 이렇게 먼저 손 놓고 등을 떠밀어 주신 것처럼 느껴졌다. 소식을 들은 후 감사한 마음에 디렉터 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이런 솔직한 면접으로 이끌어 주셔서 감사했다고. 같이 일할 수 없게 되어 아쉽지만 정말 값진 경험이었다고 말이다. 그렇게 이메일까지 보내고 나니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어쩐지 좀 더 힘을 내서 이직 준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서부에 대한 갈망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부엔 주로 UX, UI 디자인 공고 말고는 거의 없었지만 정말 그것뿐이라면 지금까지의 경력을 다 무시하고 완전 신입사원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뽑아만 준다면 갈 기세였다. 그래서 서부 지역에서 채용 공고가 나오는 족족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냈다. 이윽고 하도 많은 곳에 지원을 해서 어느 곳에 지원을 했는지 일일이 다 기억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쯤 되니까 정말 가고 싶은 (하지만 당시 포트폴리오로는) 갈 수 없을 것 같은 꿈의 회사들 이름만 몇 겨우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아, 이런 곳은 얼마나 대단한 실력이어야 갈 수 있는 걸까, 이번에 떨어지더라도 다음에 다시 지원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렇게 마음 소란스러웠던 날들 중 어떤 저녁이었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여느 때처럼 고속도로에 목숨을 내어 놓고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가던 길이었다. 이어폰을 타고 오던 노랫소리를 밀쳐내고 전화벨이 울렸다. 지역 번호를 보니 애리조나 주 피닉스였다. 아, 혹시 그 수많은 회사 중에 한 군데서 온 전화일까? 하는 직감에 바로 전화를 받았다.


“헬로...?”

“어, 클로이 씨 맞나요? 여기 000 회사 HR 부서인데 지원서 보고 연락했어요.”


오. 마이. 갓. 직감이 이렇게 맞을 일인가. 게다가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000이라는 회사 이름은,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 몇 안 되는 꿈의 회사들 중 하나였다. 영어로 하는 전화에 대한 공포증이 있는 나는 게다가 주변 차 소음까지 시끄러워서 더듬거리며 양해를 구해야 했다. “잠시만요, 제가 지금 집에 가고 있는 길이라... 한 일분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하고 수화기 너머의 사람도 나도 말이 없이 일분 동안 전화기를 들게 되었다. 나는 그 1분 동안 최대한 집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달려가면서 말이다. 집에 거의 가까워졌을 때쯤, 다시 정신을 차리고 통화를 이어갔다. 그쪽에서 내 이력서랑 포트폴리오를 보고 전화 인터뷰를 하고 싶어 한다고 하면서 언제 시간이 괜찮으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를 궁금해하는 해당 팀에서 왜 뉴저지에 있는데 굳이 애리조나로 오고 싶어 하는지 사전에 알았으면 좋겠다고 했다며 나에게 이유를 물어 왔다. 나는 사실대로 내가 이제 동부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시댁이 애리조나에 있어서 남편의 가족들, 친구들하고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애리조나의 날씨를 너무 좋아하고 애리조나 자체를 너무 좋아한다고 한껏 들떠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랬더니 웃으면서 그래, 말 되네, 하하. 그쪽 팀에 잘 전해 줄게. 하는 답변이 들려왔다. 그리고 전화 통화가 끝나면서 우리는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이것보다 더 신나는 일은 살아오면서 두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난 당장 인터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어필할 수 있는 것들이 뭐가 있더라- 하면서 마음만은 이미 애리조나에 짐을 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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