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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민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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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Park Jul 13. 2020

미국에서 네트워킹 없이 이직하기

학연 지연 없는 외국인으로서 미국에서 직장을 구한다는 것

할 수만 있다면 뉴저지를, 그게 안되면 다니고 있는 회사라도 떠나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남편과 나는 결혼을 했고, 내 신분은 전문직 비자에서 영주권자로 거듭나고 있던 중이었다. 마치 번데기 속의 애벌레가 나비가 되길 기다리듯이 하염없는 기다림 속에서 뉴저지로부터의 탈출을 점점 더 절박하게 꿈꾸기 시작했다. 당시에 남편과 나 둘 다 일이 바쁘고 영주권이라고 하니 어쩐지 거창할 것 같아서 이사님께 소개받은 중국인 변호사를 통해 진행을 했었다. 사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굳이 변호사를 통해서 했어야 했나 싶기도 하다. 어쨌든 서류 작성이나 필요한 것들은 다 우리가 준비했어야 했고 그쪽에서 검토하라고 보내온 서류에 우리 이름이나 기타 등등의 철자가 틀려있었어서 다시 다 고치느라 좀 애를 먹기도 했었다. 뉴욕의 변호사라 그런지 변호사 비용도 아주 만만찮았었다. 우리 결혼에 대해서는 그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없었기 때문에 (간혹 무비자로 미국에 들어와서 그 사이에 미국인 남편과 결혼을 하고 그때부터 영주권으로 준비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 경우 아무리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해도 미국 입국의 이유 자체에서부터 이민 목적으로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변호사를 고용하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다) 지금 보면 그냥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둘 다 바빴고, 어쨌든 필요할 때 언제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을 옆에 둔다는 게 나쁜 건 아니었으니까 이민자로서의 어떤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는 네트워킹이 중요해요.”


영주권이 나오면 이직을 해야지 싶던 마음을 절망 속에 빠져들게 만든, 수없이 많이 들어온 말 중 하나가 바로 저 말이었다. 미국은 네트워킹으로 직장도 구하고 이것도 저것도 한다는 말. 마치 나에게는 사형선고 같았다. 미국에 가족이 있거나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거나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고 정말 나는 나와 남편이 전부였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남편이 미국인이잖아요-라기엔, 그도 성인이 되고서부터 한 10여 년 동안은 계속 다른 나라들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여기에 믿을만한 연결고리가 딱히 없었다. 그래도 마냥 실망하고 포기할 수만은 없었기에 구인구직 사이트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네트워킹 말고 내 포트폴리오로 나를 뽑고 싶게 만들면 돼-라고 당당히 맨땅에 헤딩이라도 할 모양새로 말이다.


우선 내 포트폴리오 웹사이트를 무료로 제작할 수 있는 곳들을 찾아보고 제일 쉬워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도메인을 사는 게 정상이지만, 뭔가 부담스러워서 그냥 무료 버전으로 만들었다. 포트폴리오에 넣을 만한 디자인들을 고르고 나름대로 정리도 했다. 회사에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내 개성과 특징이 많이 묻어나던 디자인들 위주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들 위주로 작업 물들을 정리 했다. 포트폴리오에는 자기가 가장 자신 있는 몇 점의 작품들만 올려놓는 게 맞는 방법이라고 들었는데, 나는 한국에서도 그렇고 이 시기에도 그렇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 보여주자는 심보(?)로 이것저것 다 집어넣었다. 100%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고, 새로 디자인한 이력서와 함께 두고 보니 이제 진짜 이직을 준비하는구나 싶은 느낌이 들었다(아, 참고로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포트폴리오에 작업물이 많고 다양한 게 인상적이었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그래서 앞으로도 나는 이 방법을 고수할 것 같다).

구직 사이트는 한 두 군데가 아니라 닥치는 대로 다 들어가 보았다. 우선은 다른 주 보다도 비교적 가능성이 높은 뉴저지와 뉴욕 쪽으로 회사들을 알아보았다. 타주로 이사를 가는 게 꿈이긴 했으나 그건 정말 막연한 꿈이었고 우선 당장은 이 회사부터 나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터뷰 요청이 오면 쉽게 갈 수 있는 곳들부터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찌나 절박했는지 밥을 먹으러 갈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구직 사이트들을 체크했다. 무슨 n수생 수험생처럼 조금의 자투리 시간이라도 생기면 공부 대신 무조건 일자리들을 찾아보곤 했다.


역시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세계 디자인의 중심인 뉴욕에서는 파트타임이나 계약직을 구하는 회사들이 많았는데, 그렇다고 급여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다니고 있는 회사보다 덜 주는 곳도 있었다. 연봉을 잘 주겠다 싶은 곳은 경력이 5년 이상이거나 10년 정도는 되어야 했는데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가끔 다른 회사들로부터 전화 인터뷰를 할 기회가 생겼는데, 인터뷰를 하고 나면 어쩐지 그 회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떤 이메일을 받았다. ‘재택근무자 그래픽 디자이너 포지션. 홈 오피스 할 수 있게 장비 지원. 광고 회사’.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하는 내용의 이메일이었다. 회사를 찾아보니 나름 큰 규모의 기업이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보수도 꽤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업무 내용도 재밌어 보였다. 나는 너무 신이 나서 답장을 보냈다. 그랬더니 바로 구글 챗으로 메시지가 왔다. 지금 당장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구글챗으로 연락이 왔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오긴 했지만, 그것보다 나는 빨리 이직을 너무나도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러자며 답장을 보냈다. 아 그런데 영상통화로 해야 한다면 내일은 어떤가요-하고 물었더니 영상통화도 필요 없단다. 채팅으로 하잔다. 뭔가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프로필 사진에 본인 사진도 있었고 링크드 인으로 검색해 봤을 때 정말 그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높은 직급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 요즘 세상이 좋아져서 인터뷰를 이렇게도 하는구나, 하고 넘어갔었다. 남편은 어딘가 미심쩍다고 했지만 나는 회사도 유령회사가 아니고 이 사람도 실존인물(?)이라고 우겨대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 질문들도 나쁘지 않았고 인터뷰도 잘 진행이 됐는지, 끝나자마자 고용이 됐다고 연락이 왔다. 너무 신이 나서 뛸 듯이 기뻤다. 그쪽에서는 내 여권 사본과 주소를 물어봤다. 나는 채용의 절차이니까 의심하지 않았고 정보를 넘겨주었다. 그랬더니 이제 그 ‘홈오피스’에 필요한 장비를 구매할 수표를 보내줄 테니까 그걸로 내가 필요한 것들을 사면 된단다. 그 수표가 한 6천 불 정도 되는 금액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좋게 말해서 순진했던 나는 신이 나서 남편한테 가 얘기를 했고, 남편은 이건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해보려 해도 스캠 같다며 적극적으로 이 회사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편이 조사한 지 10분도 안돼서 이 케이스는 100000퍼센트 스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떤 사기꾼 애들이 남의 회사 이름과 정보, 심지어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정보를 도용해서 사칭한다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그 수표가 집으로 배송이 되고 그 수표를 사용하는 순간 내 통장에서 그 수표에 적힌 금액만큼 빠져나간다는 그런 얘기였다. 그때부터 난 다리에 힘이 풀리고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제 수표는 집으로 배달될 거고, 만약 남편이 없었다면 난 그 수표로 6000불을 잃었을 거고, 무엇보다 바보같이 속아 넘어간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그리고 그토록 탈출하고 싶던 이 회사에 또 기약 없이 계속 나가야 한다는 사실도 나를 지구의 외핵까지 밀어 넣었다. 그때 미국으로 넘어오고 처음으로 울면서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그게 사기였다면서 내가 바보같이 속았다면서 두 살 난 아이처럼 엉엉 울었더랬다. 왜 그런 거에 속았냐며 잔소리를 하실 줄 알았던 엄마 아빠는 ‘그래도 남편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야, 큰일 날 뻔했네. 괜찮아, 울지 마’ 하며 다독여주셨다. 아직도 남편은 가끔씩 이때 이야기를 꺼내면서, 남편 말 잘 들어서 손해 볼 거 하나 없다며 나를 놀리곤 한다. 아, 수표는 정말로 집으로 무려 특별 배송이 되어 왔다. 남편은 그 수표의 사진과 인터뷰 내용, 회사 정보 등을 FBI와 해당 회사와 해당 은행에 보냈다. 그 회사와 수표를 발행한 은행은 이런 일이 있다는 걸 알려줘 고맙다고 했고 FBI는 이런 일이 하도 많고 스캠 조직(?)들이 이리저리 잘 빠져나가서 잡을 수 있을 진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도 내 6000불은 지켜졌고 다행히도 그들의 입장에서 내 여권은 ‘외국인 여권’이었기 때문에 별 쓸모가 없어졌는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매일 서로 놀려대고 장난치던 남편이 세상 듬직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그 후로도 계속 포기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넣었고, 몇 군데 인터뷰를 보고, 몇 명의 헤드헌터들과 연락도 주고받으면서 지냈다. 간혹 엘에이나 텍사스, 애리조나 쪽에 채용 공고가 나면 보이는 족족 이력서를 넣으면서. 하지만 아무래도 굳이 서부에서 동부에 사는 사람을 직접 보고 인터뷰하기는 힘들고, 또 시차도 있어서 스카이프로 인터뷰를 하기에도 번거로웠기 때문에 서부에 있는 회사로부터 연락이 오는 곳은 딱히 없었다. 이력서를 보낼 때도 딱히 기대를 하지 않고 보냈다. 애플에서 3달짜리 계약직 포지션으로 그쪽으로 넘어와 신제품 프로젝트를 같이 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와서 나는 또 당장에라도 짐을 싸고 갈 작정이었지만, 남편의 열렬한 반대(?)로-자긴 석 달 동안 혼자 집에서 뭐 하냐며, 그럼 석 달 후에 네 커리어는 어떻게 되냐며 나를 열심히 설득했다- 그 마저 물거품이 되었다. 역시 미국에서 네트워킹 없이 괜찮은 곳에 직장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걸까, 하며 우울한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던 중, 뉴저지에 있는 어떤 의류 회사에서 내 이력서를 보고 연락을 해 왔다. 전화 인터뷰를 하고 또다시 연락이 와서는 대면 면접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대면 면접을 하고 싶다는 회사들은 몇 있었지만 집과의 거리도 꽤 되고 꼭 가고 싶던 회사들이 아니어서 직접 간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 회사는 거리고 가깝고 회사 복지제도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연봉도 높게 책정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되기만 한다면 이곳으로 이직을 해야겠다 싶었다.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이제 진짜 이직할 수 있게 되는 건가 하는 기대감이 외핵까지 내려가 있던 나의 마음을 다시 끌어올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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