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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민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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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Park Jul 01. 2020

이제는 떠날래요

뉴욕과 뉴저지에 미련이 없어지다.

한 직장에서 3년을 일하면 권태기가 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 권태기가 1년 반 만에 오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정직원 연봉이라고 올려 준 급여는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와, 클로이 씨 이제 연봉 많이 올랐네요'했지만 사실은 미국 내 디자이너의 평균 연봉에도 채 닿지 않는 숫자였다. 처음에 아무것도 모를 때에는 달러를 한화로 변환해보고 와, 이 정도면 나 잘 나가네- 하고 생각했었다. 순진무구하게도 생활비와 물가를 생각 안 한 탓이었다. 3만 불로 연명하던 인턴 시절, 매 달 600불씩 나가는 방세에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끼곤 했다. 그냥 가정집에 방 한 칸이고 화장실도 공유해야 하는데 600불이라니. 주인집 이모 내외께서 정말 가족같이 대해 주셨지만 그것과 돈이 나가는 건 적은 연봉으로는 어쩔 수 없이 별개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카풀. 입사할 당시에 내가 출퇴근 교통편을 걱정했더니, 분명히 다들 회사 근처에 사니까 클로이 씨 하나 태워다 주고 내려다 주는 건 일도 아니라고 걱정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런데 다달이 지날수록 어쩐지 다들 피하는 기색이었고, 운전면허도 없는 내게 차를 사라고 은근하게 압박을 주었다. 사장님도 '차는 그렇게 생각보다 안 비싸, 한 달에 몇백 불밖에 안 드는데'하면서 옆구리를 계속 찔렀다. 그만한 연봉에 한 달에 몇백 불을 잘 타지도 않을 차 때문에 소비하는 건 나로서는 길거리에 돈을 그저 뿌리고 다니는 것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나는 주말에 딱히 비싼 곳에 가서 먹거나 쇼핑을 하지 않더라도 거의 뉴욕 시티에 나가 살다시피 했는데, 뉴저지에서 시티로 들어가고 나올 때에는 차가 있더라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더 저렴하고 편해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스를 이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딱히 차가 필요 없었다. H1B 비자 기간 동안에 집을 이사했는데, 집에서 회사까지의 거리는 차로 정말이지 2-3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마저도 웬만한 직원 분들의 집 가는 길에, 혹은 출근길에 내려다 주기만 하면 되는 위치였다. 일부러 이사를 할 때 그런 것까지 신경 썼었다. 카풀 비를 드리겠다고 했었는데도 다들 이 정도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당신들 출퇴근 때 오고 가는 길이라 별거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었다. 그런데 이제 정직원이니까 알아서 살아남으란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없는 길도 뚫어서 걸어 다녔다. 고속도로를 걸어 다녀야 했는데, 차들이 아주 무서운 속도로 내 옆을 훅훅 지나갔다. 매일 이러다 어느 순간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며 걸어 다녔다. 겨울이면 눈이 많이 왔는데, 그 눈들을 다 내가 걸어 다니는 곳으로 밀어 놓아서 거의 눈 속을 헤엄치다시피 해야 했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겨울이었는데도 회사에 도착하면 땀이 났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나 혼자인 것도 한몫했다.

K-Pop 관련된 굿즈를 만드는 게 주된 업무였다. 재미가 있다면 있었지만 소속사에서 걸어오는 저작권 이슈도 있고 디자인할 수 있는 영역도 꽤 제한적이었다. 거기에 저번에도 언급했듯이 마케팅한답시고 계속 이것저것 베끼라는 직원과, 디자인이 이 회사의 이윤을 창출하는 데 있어 꽤 나쁘지 않은 요인이었는데도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니 탓이었던 회사 분위기. 포토샵이면 뭐든 된다고 믿고 있던 사람들과 일 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더 나은 디자이너가 될 수 있게 이끌어 줄 다른 디자이너가 없다는 것에 점점 지쳐갔다. 한 1년까지는 혼자서 독학으로 시야를 넓게 가지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디자인 측면에서 디자이너의 눈으로 피드백을 주는 사람이 없다 보니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점점 안갯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입사할 당시에만 해도 다른 포지션이지만 같은 또래의 직원들이 많았는데, 다들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한 명 두 명 퇴사를 해 나갔다. 추후에 일손이 모자라 영상 편집까지 독학을 해서 손을 대게 되었는데도 그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없었다. 나는 인심 좋게 반값 행사를 해가며 두 사람 분의 일을 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매주 나가던 뉴욕도 이제는 슬슬 지겨워(?) 졌다. 화려한 도시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만큼 화려하게 비정상인 사람들도 많았다. 남편이랑 나갈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기분 나쁜 일들이 여자인 친구와 나갈 때는 항상 일어났다. 캣 콜링이라든지 어디서 야한 잡지를 들이대면서 놀라게 하든지, 우리를 향해서 소리를 빽 지르든지. 정돈되지 않은 도시는 냄새가 나기 일쑤였고 지하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수많은 관광객들에 떠밀려 걷지도 서지도 못하는 상황들과 무례한 뉴요커들까지. 모든 것들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이제 콩깍지가 벗겨지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을 보게 된 것이다. 분명 로맨틱한 도시임은 맞지만, 이제 그만 본다고 해도 별 아쉬울 것이 없다고 느껴졌다.  


한때는 디자이너로서 세계 디자인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는 뉴욕에서 일해 보는 것이 소원인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그런 소원도 더 이상 소원이 아니게 되었다. 뉴욕의 비싼 생활 물가만큼 연봉도 잘 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 세계에서 몰리는 디자이너들로 인해 디자이너에 대한 수요에 비해 공급이 큰 시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제대로 된 회사보다는 그렇지 못한 회사들이 많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제 나는 정말이지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름이면 습하고 비가 한 달 내내 오는, 겨울이면 폭설로 갇혀 지내야 하는, 남편도 나도 가족이나 친구 없이 섬처럼 떨어져 살아야 했던 이 곳을 이제는 떠나야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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