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다려주자

by Chloe 슬기

나는 책을 쌓아 놓고 이 책 저 책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지만, 조용히 앉아 종이책을 들고 그 이야기에 빠져드는 시간을 정말 좋아한다. 근데 어찌 된 일인지 한국에 와서 첫 두 달 동안 백수로 살면서도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교보문고에 가서 두세 시간을 구경하다가도 마음이 가는 책이 없어 빈손으로 나왔다. 별달리 하는 일 없이 시간을 아깝게 흘려보냈고, 그런 나 자신이 또 게을러 보여 한심하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일은 하지 않지만 지구 반바퀴를 이사 와서 비자 같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고, 당장 도시가스비를 내는 방법부터도 처음이고 낯설었다. 놀러 온 한국과 살러 온 한국은 생각보다 달라서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적응”이란 것에 백 프로를 쏟아붓고 있었나 보다.


며칠 전 다시 교보문고를 찾았다. 이번엔 삼십 분도 안 돼서 두 권을 들고 나왔다. 저번에 한번 스치듯이 읽고 자꾸 생각났던 “기록이라는 세계”, 그리고 목차만 펼쳐봐도 한눈에 뭔가 내 책인데..! 싶던 “일단 의심하라, 그 끝에 답이 있다”. (퇴근 한 남편이 책의 제목만 보고 빵 터졌다. “딱 여보 같은 책을 골라왔네”)

카페에 앉아 먼저 기록이라는 세계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항상 생각이 많고 해야 할 것들이 끊임없이 떠올라서, 그리고 굉장히 목표지향적인 사람인지라 나는 매일매일 우선순위로 정리된 투두리스트를 달고 산다. 여행을 다녀와도 이것저것 영수증이니 팸플릿이니 모아서 스크랩북을 만든다. 근데 이상하게 일기는 안 쓴다. 내 “감정”을 마주하는 일이 익숙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의 첫 챕터부터 설득당하고 나는 당장 연력을 주문했다. 마음속 깊숙이 고여있는 뭔가를 끄적거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랜 숙제였던 “악필 교정”도 하기로 마음먹고 볼펜과 공책도 샀다.

이렇게 생각지 못하게 스파이크가 튀었다. 나는 이제 열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징징거리며 그렇게나 찾아 헤맬 땐 안 생기던 게. 한 가지라도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고 싶은 게 생길 걸 알기에, 이번엔 어떤 여정에 이끌려갈지 기대가 된다.


모든 것엔 때가 있다는 말이 이럴 때도 쓰는 거 맞나? 다그치는 대신 "아무 생각도 안 날 땐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돼" 하며 마음을 조금만 내려놓고 나를 기다려 주면 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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