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보다 미국에서 산 시간이 훨씬 더 길다.
내 고등학교 졸업식이 되어서야 평생 처음 미국에 와보신 한국식 부모님과, 혼자 비집고 들어가 적응하고 청소년기를 보낸 미국 문화 사이에서 어릴 적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딜레마였다.
어른이 되었을 때는 나에겐 이 세상 어디에도 집이 없는 것 같았다. 한국인이라고 하자니 나는 많아야 일 년에 2-3주 부모님을 뵈러 한국에 방문하는 것 외엔 아무런 연고가 없었고, 내 대부분의 인생을 보낸 미국에선 난 뿌리도 없는 그저 일 안 하면 쫓겨나는 외국인노동자 신세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갭은 커져만 갔다.
부모님을 따라 어릴 적 이민 온 친구들, 미국에서 태어나서 이중국적으로 자란 친구들, 한국에서 학교를 마치고 큰 꿈을 가지고 미국에 온 친구들. 그 사이에서 나를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소속 또는 고향이라 부를 만한 곳도 없는데, 꼭 낙동강 오리알 같은 이도저도 아닌 "무 정체성"이 아주 오랜 시간 나를 외롭고 힘들게 했다.
물론 신분이 정착되고 나선 내가 가진 문화와 동기화되어 조금 안정감이 생겼지만, 여전히 속이 반만 찬 껍데기 같았다.
근데 이게 결혼을 한 뒤로 서서히 사라져 가더니 언젠가 완전히 없어졌다. 거짓말처럼 내가 그런 고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집이란 건 "어디" 보다도 "내가 돌아갈 곳"이면 충분한 거였던가 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고마운 남편은, 나를 묘사하는 수식어들이 내 전부가 아니란 걸, 나를 꼭 무언가로 이름표 붙일 필요도 없다는 걸 알게 해 줬다.
사람은 어차피 변화를 반복하는 현재진행형이니, 앞으로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고민이 더 의미 있을 것 같다.
이제는 미국인 신분으로 한국에 아주 이사를 와서 다시 한번 이방인이 되었다. 익숙한 듯 낯선 이곳에서 매일이 새롭고 이미 미국은 까마득한 먼 곳이 되었다. 하지만 별로 혼란스럽지 않다. 나는 국제 미아가 아닌 세계시민 일뿐.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미국도 한국도 아닌, 우리 가족 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