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은커녕, 모두가 폴더폰을 쓰던 시절 홀로 유학길에 올랐다. 인천공항에서 부모님과 작별인사를 하고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며 27시간 만에 도착한 그곳. 스쿨버스에 올라 산을 넘고 강을 건너 학교에 다니는, 영화에서 보던 미국과는 아주 거리가 먼 깡촌이었다. 낯설게 생긴 침대나 세면대부터 15년 인생에 처음 마주하는 문화까지 모든 것에 적응해야 했다. 스트리밍은 존재하지 않던 2000년대 초중반, 드라마 한 편 다운로드하는 데 꼬박 20시간이 걸리는 인터넷과 문자나 영상통화는 고사하고 유선전화에 국제전화카드(요즘 친구들은 뭔지 모를 듯한) 번호를 입력하는, 아빠가 충전을 깜빡하시면 부모님이랑 얘기도 못하는 그런 때였다.
처음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폭우가 내리던 날이었다. 깊은 밤 방 밖에서 나는 삐그덕 소리에 잠이 깼다. 홈스테이 가족들은 모두 2층에 있고 나만 1층 방에서 지냈으니, 이 시간에 돌아다닐 사람이 없는데. 강도인가, 머릿속에 지금까지 본 기괴한 공포 영화들이 스쳐가며 너무 무서웠다.
내가 미국은 왜 와서 엄마, 아빠도 못 보고 죽나. 강도한테 내 사정을 말하고 살려달라고 부탁해 볼까. 비는 쏟아져 내리고 강아지는 쉴 새 없이 짖고 전화기는 밖에 있고.. 이불속에 웅크려 가족사진을 붙들고 울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오들오들 떨다 용기 내어 2층에 뛰어 올라갔는데, 홈스테이 가족이 나 때문에 놀랐다며 다시 1층으로 쫓아냈다. 알고 보니 거센 폭우에 오래된 집 창문과 나무벽이 흔들리는 소리였다. 웃픈 해프닝이었지만 말도 안 통하는 그곳에서 세상천지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
밥도 못 먹고 영하 20도에 방에서 히터도 못 켜고 신데렐라처럼 집안일하던 집에서 1학년, 알코올중독과 정신적 질환 그리고 복잡한 가정사가 있던 집에서 2학년을 보냈다. 그렇게 부모님 없이 다양한 어른들을 겪으며 중고등학생에겐 조금 버거울 법한 일들에 너덜너덜 상처투성이가 되어가는데, 도움 받을 곳도 없고 오로지 내가 나 자신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도 처음엔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영어는 고작 학교에서 배운 게 다라, 귀가 트이고 친구들의 말과 수업이 잘 들릴 때까지 반년 정도 걸린 듯하다. 첫 학기에 들었던 수업 중에, 창피하지만 영어와 생물학은 간당간당하게 패스, 건강학 수업은 패일 했다. 영어가 그래도 좀 되기 시작한 두 번째 학기를 보내고 1학년 말에 "가장 발전한 학생" 상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나름 공부를 잘했는데, 어딜 가나 열등생 처우를 받는 게 서럽긴 했다.
부모님 잘 만나서 유학을 갔다며 친구들은 부러워했지만, 나는 사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다. 언어가 통하는 곳에서 엄마가 해준 밥을 먹으며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친구들이 오히려 부러웠다. 그럼에도 표현도 포기도 못하는 소심한 성격에 책임감과 돈을 많이 들인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려 끝까지 악으로 버티고, 대학원 졸업을 마지막으로 9년의 유학을 마쳤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삼켜냈던 옛날이야기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나오던 때도 있었다. 덕분에 20대엔 그때에 비하면 그 어떤 일도 별게 아니고 수월할 만큼, 그저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행복하지 하는 마음이 들 만큼.
물론 3, 4학년에 돌봐 준 가족처럼 좋은 홈스테이도 존재하고 유학이 체질처럼 잘 맞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모든 감각이 예민한 난 그쪽이 아니었던 것 같다. 쉽지 않았던 그 시간들에 가치를 불어넣어 줄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내가 잘되는 것이라 믿었다. 사실 성공의 기준은 누구나 다르고 난 아직도 명쾌한 답을 찾지 못했지만, 열심히 달려와 다다른 지금은 훨씬 평안하고 이제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의 감정에 휩싸이지 않는다. 그냥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며 묵묵히 내 갈 길을 가다 보면, 모든 일은 버텨지고 지나간다는 덤덤함과 세상 그 어디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적응력을 얻은 것, 큰 별 탈 없이 내 몫을 하고 살고 있는 게 이미 충분한 값을 한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