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한달살기를 처음 결심하게 된 것은 아이가 학기 중에 내내 약을 달고 사는 걸 보면서부터였다. 기관 생활을 하며 안 아플 수 없다고 하지만, 매일 달고 사는 약들, 그리고 둘째한테 옮을까 전전긍긍하고 예민해하다가 결국 둘째도 옮아버리는 결말. 아픈 아이들이 안쓰러워야 하는데 화가 나는 나를 보며 제정신이 아니구나 느꼈다.
세상 소중하게 생각했고, 지금도 소중한 아이에게 왜 이런 마음을 갖게 됐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의 결과가 아이와 진득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그게 제주도 한 달 살기가 되었다. 그리고, 둘째가 태어난 뒤로 내내 첫째에게 예민하게 굴고 있는 내가 못나 보여서 첫째에 대한 미안함도 제주도 한달살기를 계획하는데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단순하게 제주도 한달살기를 하면 아이와 질적으로 보내는 시간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다녀온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여행을 간 며칠은 설레지만, 며칠이 지나고 보면 또 다른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여행을 가든, 일상생활 속에서든 아이와 질적으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으면 내가 관심과 애정을 많이 쏟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 그저 단순히 여행을 간 것만으로는 아이와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첫째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아야지- 생각하고 갔던 제주 한 달 살기의 마음가짐은 초장부터 삐걱거렸다. 나도 힘들고, 아이도 힘들다 보니 오히려 아이의 짜증이나 모난 행동을 너그럽게 받아주기 어려웠다. 왜 너는 여기까지 와서! 가 목구멍까지 치솟는 날도, 못 참고 뱉는 날도 많았다.
그래서 아무 수확이 없었냐 하면 또 그건 아니었다. 제주도 한 달 살기는 아이도 나도 서로에게 둥글게 깎이며 온순하고 이해심이 많아진 시간이었다. 첫째는 그저 사랑이 고팠을 뿐이고, 나는 아이 둘을 잘 케어하려다 보니 너무 지쳐있었을 뿐이었다. 제주도 한 달 살기가 아이와 나에게 모두 여유를 만들어줬고, 그 덕분에 자칫하면 '엄마는 동생만 좋아해!' 하며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냈을지도 몰랐던 아이의 7살 기억을 행복하게 바꿔줬다고 믿는다.
또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았던 것 중 하나가 제주에서 액티비티를 즐기기보단, 아이와 많이 눈 맞추고, 대화하며 정적인 시간을 보내다 오는 것이었다. 분명 계획은 잔잔하게 집 앞 바닷가에서 실컷 놀고, 도서관도 가고, 오름도 올라가며 아이와 심도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는데... 6월 말의 제주는 사람이 쪄죽기 딱 좋은 날씨라 바다는 고사하고, 야외활동 자체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정적인 활동들을 안 좋아했다.
그래서 급히 계획을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쪽으로 수정했다. 육지에서는 거리가 멀어 맘먹고 가야 체험할 수 있는 카약 체험이나, 승마, 카트, 요트 투어 등을 중점적으로 넣었다. 중간중간 미술관이나 박물관, 숲길 트래킹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주에는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어서 각각의 퀄리티가 좋은 편이기도 하고, 세세한 주제로 깊게 고민한 흔적이 가득한 곳들도 많아 영감을 받기에 좋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평소 아무 목적 없이 걷자고 하면 워낙 싫어하던 아이라 오름이나, 숲길 트래킹을 싫어할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곧잘 걷고 따라왔다. 한 달 살기 초반에 갔을 때보다 후반으로 갈수록 걷는 힘이 좋아지는 걸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이렇게 커가는구나 싶기도 하고. 가장 놀랐던 곳은 서귀포 치유의 숲에서 3시간 30분을 내리 걸었을 때였다.
오직 치유샘을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3시간 30분을 걸었다는 점에서 내 아이가 많이 달라졌구나- 싶었다. 무슨 일을 해도 그저 짧게 관심 가졌다 금방 시들어버리곤 해서 걱정이었는데, 내 아이도 하고 싶은 게 명확하다면 어떻게든 해내는 아이라는 걸 이번 트래킹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다른 일을 할 때에도, 조급해하거나 다그치지 않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줄 수 있게 된 계기가 됐다.
또 아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좀 더 세세하게 알 수 있었다. 7살이 된 내 아이는 단순히 자동차라면 다 좋아하던 3살 아이가 아니었다. 취향이 생겼고, 그 취향 속에서도 더 세분화된 아이의 단단한 세계가 있었다. 좋아하는 것이라면 단순히 팸플릿 하나에 나온 것만 있어도 손에 꼭 쥐고 보고, 또 보는 덕후 기질이 있는 아이였다.
내가 아이를 정말 모르고 있었구나. 내 아이는 이렇게 착실하게 자기 세계를 쌓으며 자라고 있었는데 내가 그걸 몰라줬구나 싶어 미안하고 대견했다. 제주 한달살기 덕분에 아이를 찬찬히, 그리고 오랫동안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얻은 수확이었다.
아이의 성장도 있었지만, 나의 변화도 느껴졌다. 결혼 전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또 그에 못지않게 여행을 계획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결혼 후 아이가 태어나고, 남편과 여행 성향이 맞지 않아 내 식대로 하면 계속 싸우게 되어 여행 계획은 늘 남편에게 맡겼고, 그저 수동적으로 따라다녔다.
그렇게 다니는 여행에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도, 어차피 아이가 있으니 별 수 없다- 좋자고 간 여행에 매번 힘들어서 싸우는 것보다 낫다-라는 생각에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내가 좋아하던 것과 현실 사이에서 타협해왔었다. 남편에 대한 불만을 말한 것 같지만, 아쉬움이 남은 것만 사실이고, 그런 여행을 한 것도 내 선택이기에 큰 불만은 없다.
불만은 없었지만, 이번 제주도 한 달 살기는 오롯이 내가 짠 계획대로 움직이는 여행이다 보니, 계획을 짜고, 계획대로 여행하며 굉장히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는 나에게 달렸다는 생각에 책임감이 조금 버겁긴 했지만, 여행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는 일은 버거움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뿌듯하고 즐거웠다. 이런 자기 긍정과 행복감이 자존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고,
결국 한 달 살기가 끝날 때 즈음에는 맞아- 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그럼 난 앞으로 구체적으로 뭘 하며 살면 좋을까라는 고민의 밑거름이 되어줬다.
또 언제 아이들과, 그리고 친정 부모님과 이렇게 긴 시간을 부대끼며 보낼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것을 알기에 더더욱 귀한 시간이었다. 결혼 후 이런 형태의 여행이 쉽지 않은데, 지지하고 응원해 준 남편에게 고맙다. 제주도 한 달 살기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귀중한 경험이 되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또 우리는 성장하리라 믿는다. :)
앞으로는 제주도에서 한 달간 지내며 했던 일들, 그 일을 하기 전에 알아두면 좋을 정보들, 그리고 느꼈던 점을 세세하게 기록해서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보려고 해요. 책 한권이 나오는 그 날까지 함께 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