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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옹 Mar 31. 2023

심리상담 기록 2

무너지는 모래성을 파도에 쓸려가도록 두자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이 나를 바라본다 했던가.

니체의 흔한 명언은 호러였다.


심리상담은 나 혼자 파던 땅굴보다 더 깊고 어두웠다.

무섭고 큰 괴물이 숨어있을지도 모르겠다.

피하고 싶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피하려는 나와, 맞서려는 내가 있지만 약속을 어기기 싫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 덕분에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못 본 체하며 둥둥 떠다니고 있다.



저는 우울증과 성인 ADHD 치료를 동시에 받고 있지만, 오래된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물 치료를 이어가던 중 주치의 선생님의 제안으로 기존 진료시간을 늘려 심리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모두 기억하지 못하지만 치료과정을 최대한 기록해보려고 합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심리적으로 더 건강하고 평범한 행복을 누릴 날을 기대하며 이 글을 씁니다.

여러분의 마음 건강을 바라는 마음에 기록하고 나누려 하지만, 읽다가 마음이 불편하신 분은 언제든지 창을 꺼주시기 바랍니다.



40분 상담은 이번이 두 번째 회차는 아닙니다.

이전 몇 회차에서는 대체로 제가 절반은 입을 꾹 닫고 있거나,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거나 해서 기록을 할 생각일 들만큼 어떤 결과물이 나오지도 않는 상태로 지나갔어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상담을 회피하고 싶어 지더라고요.

그래서 상담 초반에 "세팅"이라는 것을 잘 만들어 상담자와 내담자의 규칙들을 만들고, 잘 지키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ADHD 약도 함께 복용 중입니다. 그래서 약을 먹는 것도 자주 놓치고, 약 자체를 분실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하지만 40분 상담을 빠지거나 예전처럼 예약일과 예약 시간을 자주 변경하면 다른 환자분들께 피해가 갈 수도 습니다. 그리고 기존 진료에서는 약을 처방하고 약의 효능을 확인하는 것 외에 상담할 시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본격적인 상담이 시작되면 내담자가 심리적인 여러 이유로 힘들어서 "세팅"이 무너질 수 있다고 설명해 주셨어요.


그리고 정확히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과거의 어리석은 나..) 저는 이 과정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너무 힘들거든요. 이야기를 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판도라의 상자를 연 대가를 치르는 것처럼 상담이 끝나면서부터 일주일 동안 여러 생각들이 저를 괴롭게 합니다. 어떻게든 누르고 회피하고 살았던 것들이 고개를 쳐들고 몰려오는데 견고하게 지은 모래성 따위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처음 몇 번의 상담은 지금 생각해 보니 방어기제가 발동한 것 같고, 선생님께서는 어떤 이야기든 들어주시기만 했던 것 같아요. 가끔은 "무슨 말을 하면 되나요?"라는 질문으로 소심한 반항도 해보았지만 흔들림 없이, 서운할 정도로 단호하게 제 이야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한갓지게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생각도 해보고 드라마에서 본 장면들도 떠올리고.. 타자화 하여 "흔한 한국의 폭력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이의 이야기"는 너무 지겹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가 그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도 하지 못하면서 말이죠.


이번 회차에서 마음의 벽을 부수고 나온 것 같아서 2 회차라고 적었습니다.

이전의 과정들은 긴 - 첫 회차 정도로 정리해도 좋을 것 같아요.


분명한 건, 내가 어떤 생각과 의도를 가지거나 계획적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짐을 타인과 나눈 기분도 들고 한바탕 울고 나오니 마음이 힘든 것이 조금은 나아졌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건 맞겠죠?라는 질문에는 대답해 주셨어요. "그럼요, 물론이죠."라고.


저의 아버지는 몇 개월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제 어머니도 대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에 돌아가셨고요.

어릴 때 어머니에 대한 폭력, 자식들을 향한 많은 형태의 폭력성과 어릴 때 치료받지 못한 ADHD와 여러 가지 이유로 오래 겪어온 중증 우울증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발견하고 아파하며, 돌아가신 어머니와  살아계신 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채로.. 제가 외면한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상담 시간에 울면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머리로 아버지를 미워하고, 탓하고 외면했지만 마음으로는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이 큽니다. 손이 많이 가는 전형적인 한량이셨던 아버지.. 엄마를 아프게 했고, 자식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할지라도 저희 남매들은 아버지를 부모처럼 돌보았어요. 그리고 제가 살만하니 우울증이니 뭐니 하면서 아버지를 저버리고 상처를 드린 겁니다. 저에게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저는 감정을 누르고 살아갑니다. 제가 아버지를 그렇게 되게 한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죄책감이 너무 커서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아요.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이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늘 선생님 앞에서 많이 울면서 이야기했어요.


이 죄책감은 너무 커서, 덜어낼 수 없고 덜어내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온몸이 부서지는 신체의 고통도 견뎌야 할 징벌이라면 견뎌야지 싶다가도 이렇게 떠나버린 아버지가 밉습니다. 아버지는 밖에서는 더없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찾아오는 많은 분들이 진심으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우는 모습을 보며 한 사람의 인생을 내가 너무 함부로 정의 내린 건 아닌지 겁이 났어요.


그 뒤로 올라오는 모든 감정을 모두 회피하며 울지도 않고 참았습니다.

장례 이후에 혼자 있을 때에도 울음이 몰려오면 꾹 꾹 눌렀습니다.


울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담 선생님께 털어놓고 나니, 깊은 심연 속에서 죄책감이 더욱 선명하게 저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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