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알게 되었다
세잔과 용석은 호명하는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하나의 인물이었다
나는 세잔을 찾아서 용석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하고 반대로 용석을 찾아서 세잔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했다
용석은 빌딩과 빌딩의 높이를 가늠하는 아이였고
세잔은 빌딩과 빌딩의 틈새를 가늠하는 아이였다
세잔과 용석 몰래 말하려는 바람에 서두가 이렇게 길어졌다
(세잔과 용석은 사실 둘이다)
다시,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세잔과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모르게 되었다
세잔은 새총에 장전된 돌멩이였다
세잔은 숲의 모든 나무를 끌어안아 본 재였다
세잔은 공기의 얼굴 뒤에 숨어있는 프리즘이었다
용석아
네게서 세잔에게로 너희에게서 내게로
전쟁이 유예되고 있다
용석아
네 얼굴로 탄환이 쏘아진다 내 배후는 화약 냄새가 가득하다
세잔과 용석은 새들의 일회성 날갯짓, 접히는
세잔과 용석은 수도꼭지를 타고 흐르는 물의 미래, 버려지는
세잔과 용석은 공중의 양쪽 귀에 걸어준 하얀 마스크, 아무도 모르는
나는 누구를 위해 세잔을 기록하나
용석을 기록하나
시의 모든 굴뚝에서
세잔과 용석이 솟아난다 수증기처럼 함부로
2020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당시 심사평을 보기 전에 당선자의 소감을 보겠습니다. 당선자 박지일 시인의 수상소감은 우리가 앞으로 시를 써나가는 데 있어 꽤 괜찮은 조언이 될 것 같아섭니다. 저는 이때만 해도 당선자가 말하는 '시하기'라는 게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나중에서야 김혜순 시인의 시론집 『여성, 시하다(문학과 지성, 2017)』를 보고 알았죠. 지난날 제가 소개한 김혜순 시인의 '날개 환상통'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녀는 ‘시 쓴다’ 하지 않고, (몸이) ‘시 한다’(doing)고 표현했다는 거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당선자는 김혜순 시인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시적 사유를 함에 있어 얼마나 노력했을지도요. 그렇습니다. 에둘러 말하자니 입이 근질근질하니 그냥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멋진 시, 좋은 시를 쓰자면 시론집을 읽더라도 김혜순 시인의 시론정도는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낡은 작품이나 낡은 시론, 혹은 쉽게 이해되는 평이한 시론이나 작품들만 읽어서는 좋은 시를 쓰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맨날 그저 그런 서정이나 고향이 어떻고, 추억이 어떻다는 그런 시만 읽으면 시가 늘까요? 사유를 하자면 이해가 잘 안 가는 시를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되니까요. 그런 생각이 바로 사유의 출발이고요. 저는 어떤 작품을 읽고 나면 시인의 나이대를 짐작해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정적인 시어가 많다거나, 시 속에 등장하는 단어의 개수가 많을수록 시인의 나이가 많을 거라 생각하는데 확인해 보면 대개 그렇더군요.
제 말이 정답은 아니겠으나 20대 중후반, 많아도 서른 초반의 나이대에서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오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서정과 추억의 시를 이미 다 섭렵했고(마치 피카소가 어린 나이에 세밀화를 다 섭렵했듯이), 성인이 되어서는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사유를 합니다. 20대 후반의 어린 나이임에도 그네들의 시 구력은 10년을 넘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결국 좋은 시는 그렇게 써지는 거지요.
누누이 말하지만 시는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즉,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다는 말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어려워하는 '낯설게 하기'라는 거. 그래서 쉬운 시를 공부했으면 이제 어렵고 쉽게 이해되지 않는 시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꾸만 쉬운 시만 보면서, 이게 바로 진정한 시지... 이러면 본인의 시 세계는 더 이상 확장되기 힘듭니다. 그러기 위해선 다양한 장르의 글을 읽어야 하는 건 필숩니다. 시를 잘 쓰기 위해서 수필, 평론, 소설을 읽는 건 그래섭니다. 생각의 폭을 넓혀주거든요.
지금까지 적은 글은 '쉬어가기' 코너에서나 적을 말이지만, 이 시를 소개하다 보니 적게 되었습니다. 그럼 당선자의 수상소감과 연이어 심사평을 한번 보겠습니다.
[당선소감] 시하기의 ‘재미’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말이라는 것으로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퍽 힘들었습니다. 대화 도중 더듬기 일쑤였고 네, 글쎄요, 그러게요, 같은 짧은 말들을 주로 내뱉었습니다. 뱉지 못한 것들은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누군가 훔쳐간 물건처럼 제 것이었으나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글로 옮기는 것은 더욱 힘들었습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신인은 패기가 있어야 한다고, 당선 소감에 앞으로의 방향성을 적음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고. 저는 패기 있게 전진하는 것보다, 옆과 뒤를 살피며 걸음을 옮기는 것이 좋을 뿐인데요. 방향성 같은 거창한 것을 쓰기에는 이곳보다는 일기장이나 메모장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뿐입니다.
아무래도 제게 시하기의 이유는 재미였던 것 같습니다. 시라는 것은 제게 경전도 아니었고 성서도 아니었고… 일종의 부채감 같은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은 제게 시하기는 즐거운 행위였습니다. 정상성이라는 무서운 허구를 자꾸 들이미는 세계는 이상해 보였고 또 어찌어찌 세계라는 것이 굴러가고 있다는 것. 그것은 더 이상해 보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아는 것은, 어떠한 것도 모르는 저밖에 없다는 것. 그런 나와 함께 순간들을 잠시 붙잡는 것, 그곳에서 뛰어노는 것. 그런 것들이 재미있었습니다. 꾸려지는 찰나의 세계에 저를 잠깐 비집어 넣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더라도 말입니다.
시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최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는 질문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선생님들, 친구들, 길, 별, 재영 감사해요. 있는 어머니 아버지, 없는 동생, 가능성을 발견해주신 심사위원님들,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써보겠습니다. 과감하게 놀아보겠습니다. 이름 없는 이름들과 함께 순간을 붙잡고 있겠다고, 믿어보겠습니다.
[심사평] 고유한 호흡, 긴 여운
심사를 맡은 세 사람이 응모작들을 읽기 전에 한 약속 아닌 약속은 지금 한국 시에 부족한, 비어 있는 감각을 채워줄 만한 작품을 눈여겨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그 ‘감각의 정체’에 관해서는 굳이 합의하지 않았고, 다른 눈(관찰), 코(호흡), 입(언어)을 가진 작품들을 각자의 손에 쥐었으며, 그것들을 거듭 살핀 끝에 일곱 분의 응모작들을 최종심 대상으로 삼았다.
‘공 하나를’ 외 4편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청사로 들어간 사람’은 매끈했다. 행과 행 사이에 ‘간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음이 믿음직했다. 그러나 응모작들이 모두 어딘가 낯익었다. ‘소풍과 정원’ 외 4편은 구조적으로 잘 짜인 작품들이었다. 착상을 확장하는 힘이 느껴졌으나 시상의 전개가 다소 예상 가능한 차원에 머물고 있어서 심심했다. ‘그래, 나는 곤란할 때 메모지를 찾아’ 외 4편은 투박함이 장점이었다. 쓰고 있는 이가 쓰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썼다는 느낌이었지만, “손가락에 핀 서러움을 삼키다 혀가 베였다”와 같은 성긴 문장들이 다음을 기약하게 했다. ‘황소가 춤출 때’ 외 4편은 ‘다른 서정’에 대한 기대를 일순 품게 했으나 뒷심이 부족했다. ‘오이, 오일러’ 외 5편 역시 표제작에서 드러나던 활력이 응모작 전편에 깔려 있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최초의 충돌’ 외 4편은 주저하지 않고 내뻗는 말의 에너지가 인상적이었지만 다소 중언부언이었고 그로써 시의 리듬이 굳어 있었다.
그리고 ‘세잔과 용석’ 외 4편이 남았다. 박지일님의 응모작들은 무엇보다 읽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머물렀다. 자신만의 고유한 호흡을 유지한 채 여간해선 서두르지 않았다. 따뜻하고 유려하다가도 일순간 차가워질 줄 알았다. 사유가 과장 없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두 사람을 호명하며 이룩하고 있는 당선작의 기체(氣滯)적인 시 세계는 정물적으로 보이면서도 또한 움직였다. 기록하면서도 함부로 기록하지 않고자 했다.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매혹이 지금 한국 시에 필요한 감각임에 마침내 합의했다.
심사위원 신용목·김행숙·김현 시인
당선소감을 통해서 마음에 뭔가 차오르는 게 있다면 그걸로도 우리는 충분히 배우는 겁니다. 또한 빨간색으로 강조한 심사평을 유심히 봐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시를 쓸 때 참고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유의할 점은 심사평에서 말하는 탈락 사유가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는 겁니다. 탈락한 작품 중에서 '최초의 충돌'은 다음 해인 2021 서울신문 당선작이거든요. 물론 퇴고를 더 해서 당선됐겠지만, 지금 봐도 위에서 언급한 탈락 사유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음 해에 다른 신문사에서 당선작으로 뽑혔다는 건 일전에 다른 글에서도 적었듯이 탈락시키는 작품은 어떻게든 탈락 사유를 적어야 하고, 당선작은 당선 사유를 적어야 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탈락 사유는 참고만 할 뿐, 너무 맹신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오늘 소개한 '세잔과 용석'은 흠이 없을까요? 아니죠. 분명 있겠지만, 당선작이니만큼 좋은 점을 봤을 겁니다. 파랗게 칠한 평을 보면 알겠지만, 정답이라고 할만한 뚜렷한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이걸 감각, 필, 느낌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좋은 시는 어떤 해설이 없이도 좋다는 느낌이 먼저 드는데 '세잔과 용석'이 딱 그렇습니다. 심사자의 평소 취향이 적절하게 섞인 기분입니다. 신용목 시인의 스타일보다는 좀 더 나갔고, 김행숙 시인의 평소 스타일보다는 조금 양보한 듯한 느낌입니다.
시를 보는 안목이 특별히 따로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론서 몇 권을 읽으면 조금 도움은 되겠지만, 그 이론조차도 정형화된 틀에 갇히기 십상이거든요. 사람에 따라서는 이 작품을 라캉, 프로이트, 데리다, 들뢰즈 기타 등등의 철학적 접근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거꾸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시를 쓴 사람이 정말로 온갖 철학적 사고를 해가며 썼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해설은 오히려 시를 더 어렵게, 특별한 사람만이 쓰는 거로 오해하게 만들죠.
그도 아니면 어떻게든 당선작으로 뽑혔으니 이유를 적긴 적어야겠는데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 비평가적인 포즈를 취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에 그런 시가 있다면 신춘보다는 문예지에 조금 더 가깝지 않을까 싶네요. 신춘은 말 그대로 발상의 새로움에 눈길을 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좋아 보였습니다. 신용목 시인을 문단에서는 '바람의 시인'으로 부른다죠. 그만큼 그의 시론은 개인적 서정에 누구보다 친밀하지만 김행숙 시인은 과거 동아일보 단골 심사자인 김혜순 시인과 같은 과(?)로 불러도 될 만큼 이미지를 중시하는 시인입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견해죠.
이 작품을 동아일보 당선작으로 보더라도 하등 반감이 없는 이유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을 시구 하나하나를 분절해서 해석하려 들지 않고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서 느끼려고 했습니다. 세잔과 용석이라는 두 인물(혹은 한 인물)은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물질 만능의 시대에서 우리는 새총에 장전된 돌멩이처럼 소모품으로 사용되고, 한때는 숲이기도 했던 재였고, 굴절된 프리즘처럼 가면을 쓰는 식으로요. 그러기에 우리의 평화로운 삶은 언제든 전쟁의 가능성을 내포(유예)하고 있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 다시 접히고, 버려지고, 아무도 모르는 소외로 몰릴 겝니다.
하지만, 시의 결말에서 인간은 누구를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인지 세잔과 용석의 삶을 다시 들추어냅니다. 여전히 함부로 취급당하는 노동자의 삶이기도 한데, 결국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세잔이고 용석이라는 걸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 시가 그동안의 당선작에서 보이는 낯익은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구조적으로 아주 잘 짜인 시도 아니지요. 서정이든, 이미지든 전반부를 보면 후반부는 어떻게 나가겠다는 예측이 가능한데 그런 점에서(특히 어법에서) 벗어난 것도 당선작으로 선정된 이유 중 하나이지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