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만나요
매일 멸망하고 있으니까
안 그러기로 했는데
만나자고 해서 미안해요
북반구가 흩날리는 미술관에서
등에 붙은 꿀벌은 비상구로 날려주고
한 번 만나요
아직 돈이 없어서 미안해요
옷에 불을 질러서 미안해요
사람들이 울먹이며 복음서를 읽는 세기말이니까
땅이 뒤집혀 생긴
아름다운 추상화 앞에서 봐요, 우리
당신의 해골이 얼마나 자랐는지 보여줘요
살았는지 확인해보려고
서로의 어깨를 건드려보는 거리에서
당신이 돌아보았을 때
<종말을 전시하는 비엔날레>
현수막이 펄럭인다면
여기가 세상 끝이니까
하늘에서 윙윙 벌이 쏟아지니까
더 움직일 수 없으니까
재난 경보음이 울리는 미술관에서
한 번 봐요, 우리
밖에서 보자고 해서 미안해요
살아있는 당신 해골을
오래 관람해서 미안해요
창밖은 부옇고
우린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으니까
딱 한 번만
만나요
2019 손미 시집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2019년 1월이었습니다. 제가 가입한 문학카페에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전람회 / 손미 - 이 시 이해를 못해서... 시 공부도 할 겸 내공 있는 분들의 해설을 부탁합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시를 공부한 게 2018년부터였고, 당시의 문예지나 현대시를 파고든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1년을 죽기 살기로 현대시를 파고드니 어느 날 문득 시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죠. 하지만 고작해야 1년이니 갈 길은 여전히 멀었습니다. 그러니 카페 신입회원인 제가 느닷없이 나서서 이 작품은 이러저러한 걸 말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엔 저 역시 자신감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댓글로 공격을 받는다면 어쩔까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줄줄이 달린 댓글을 관망만 했더랬죠. 정말 문학카페가 이런 곳이구나 싶게 건강한 토론이 이어지더군요. 그중에 저와 생각이 같은 딱 한 개의 댓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바로 이거였죠.
“이 시의 이미지들을 잘 따라가 보세요 멸망 북반구 비상구 불 세기말 땅이 뒤집힘 당신의 해골 종말 세상 끝 재난 경보음이 올리는 미술관 등을 이미지들이 섬뜩하지 않나요 이미지들이 화자의 심리와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잖아요 당신과 나는 이별 상황인데 그 상황과 정서를 자칫 비유기적이지만 유기적인 이미지들이 환기하고 있네요”
하지만 더 이상의 댓글은 이어지지 않았고, 어영부영 글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시 저만의 글쓰기 플랫폼에 이 시를 올려두고 <나만의 해석>이라는 제목으로 올려두었습니다. 혹시라도 처음에 글을 올린 분이 검색하면 찾아보지 않을까 싶어서였죠. 물론 저 역시 이 작품이 좋았습니다. 비록 이렇게 쓰지는 못하지만, 현대시를 보는 시안이랄까요. 그런 게 좀 생긴 것도 같았으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대체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떤 장르의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쓰고자 하는 장르의 작품을 읽어내는 안목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시쳇말로 이 정도면 나도 쓸 수 있겠는데... 그런 생각이 차오를 때까지요. 한때 이런 말이 있었죠. 읽는 사람은 없고, 쓰는 사람만 많다는 말. 인풋 없이 아웃풋만 쏟아내니 질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말일 겁니다.
사실 문학 카페라고는 하나 어떤 작품을 두고 열띤 토론을 하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기에 이처럼 해설을 부탁한다는 글이 올라오면 일단 흥미롭고 재밌습니다. 이건 시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안의 높고 낮음이 아닌, 다른 사람은 이 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자기 생각과 비교해 볼 수도 있으니까요. 아마도 많은 회원님이 댓글을 읽어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당신에겐 이 시가 어떻게 해석되나요? 몹시 어려운가요? 도대체 이 시인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나요?
그렇다면 바로 보신 겁니다. 이 시는 독자와의 소통적인 측면에서 쉽게 읽히는 시는 아니니까요. 어쩌면 시를 쓴 시인 자신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읽는 시는 대충 몇 가지로 분류되는데 읽자마자 바로 이해되는 그런 시가 있습니다. 그중에는 감동보다는 힘이 느껴지는 시가 있지요. 예를 들자면 박노해 같은 분이 쓰신 민중 시랄까요. 그리고 힘은 뺐지만 아주 감동적인 시도 있답니다. 정희성 시인이 쓰신 「저문 강에 삽을 씻고」와 같이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위로하는 그런 시들.
그러다가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소위 불통의 시라 불리는 미래파가 득세합니다. 온통 어렵게만 보이는 시들이 등장하고 시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조차 없는 시들이 쏟아지기 시작하죠. 물론 당시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이나 각종 문예지 수상작품도 그런 시가 뽑혔고요. 그 후로도 미래파는 오랫동안 문단에 영향을 끼쳤는데 어쩌면 독자들이 시를 외면한 이유 중의 하나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각설하고, 이제 오늘의 작품 「전람회」에 관해서 얘기해 볼까 합니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시인을 조금 알 필요가 있답니다. 고백하자면 저 역시 시를 처음 공부할 당시 미래파라고 불리는 작법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답니다. 그래선지 이런 시가 그리 낯설지는 않은데요. 손미 시인은 『양파 공동체』라는 시집으로 32회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분이랍니다. 상을 탔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시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상을 받았다는 건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근거로는 충분하겠죠.
손미 시인의 시를 격찬하는 분 중에는 김혜순 시인, 김행숙 시인, 권혁웅 시인 등이 있는데요. 이들이 격찬했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자신들이 쓰고 싶은 시를 손미 시인이 대신 썼기에 그랬을 거로 생각합니다. 이 중에 권혁웅 시인은 서두에 언급한 파격적인 시를 쓰던 동시대 시인들에게 미래파라는 명칭을 붙이면서 논쟁을 이끌던 분이랍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작품을 미래파라는 테두리에 넣고 싶지는 않고, 그저 그녀만의 시 세계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손미 시인의 인터뷰를 보면 그녀는 스페인의 국민시인으로 불리는 로르카의 시를 아주 좋아한다고 했는데요. 로르카의 시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이미지의 시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로르카는 훗날 자신이 쓴 시에 대해서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 적도 있는데 이는 그만큼 자신이 상상하는 이미지 속에서 획득한 영감으로 시를 썼다고도 볼 수 있겠죠. 그리고 손미 시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신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했더군요.
결론적으로 손미 시인은 자신이 치밀하게 직조한 시를 쓰기도 하겠지만, 이미지가 가진 원래의 의미에서 벗어나 파편적인 이미지를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신화적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어떤 열망이 유난히 강한 시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녀의 시를 좋아하는 김혜순 시인 역시 방향은 다르지만 딱 그런 경우거든요. 그런 점을 바탕으로 그녀의 시를 본다면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파악하는 것은 유의미한 해석이 아니라는 거죠.
다시 말해 「전람회」는 파편적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의 연쇄적인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며 종국에는 독자 스스로 한 덩어리로 뭉쳐가야 나름 해석이 가능하다는 뜻이랍니다. 또한 그녀의 시에서 주로 나타나는 특이한 양식은 나와 너의 존재가 서로의 반대편에 위치할 뿐 결코 화합하지 못하는 존재로 자주 그려지더군요. 이를 참조한다면 이 작품 역시도 꼭 한 번만 만나길 원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는 게 아닌가 싶네요.
문학 카페의 댓글 중에 딱 한 분만이 이미지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했는데 그분의 말처럼 이 시의 파편적인 이미지를 살펴보면 매일 멸망한다거나, 북반구가 흩날리는 미술관, 비상구, 돈이 없어서, 옷에 불을 질러서, 복음서를 읽는 세기말, 당신의 해골, 종말을 전시하는 비엔날레, 세상 끝, 더 움직일 수 없는, 재난 경보음... 전부 소멸과 결핍으로 이어지는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나요?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미술관을 말하는 게 아니라 북반구가 흩날리는 세기말을 말하고 싶은 거겠죠. 이렇게 가지런히 나열된 이미지가 바로 「전람회」에 걸린 이미지겠고요.
그리곤 말하죠. ‘창밖은 부옇고/ 우린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으니까// 딱 한 번만/ 만나요’라고. 여전히 화합하지 못하는 나와 네가 나오지만, 화자는 세기말로 가는 그런 마지막 순간조차도 너와의 만남을 열망하고 있죠. 이미지의 지나친 과잉을 드러내면서까지요. 그러니 결론적으로 이 시를 단어 하나하나에 매달려 해석하여 그 의미를 이어 완결된 문장으로 적는다는 건 불가능하답니다. 유의미한 해석도 아니고요. 그러니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거겠죠.
거 왜 우리도 그럴 때 있지 않나요? 말할 수 없는 슬픔이나, 설명할 수 없는 분노, 혹은 그리움이나 짜증들, 표현은 못 하지만 분명히 그 순간 내 안에 들어온 감정들요. 손미 시인의 「전람회」는 그럴 때 시각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어휘가 지닌 이미지로 써 내려간 한 편의 그림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지 않을까 싶군요. 그래서 그림은 눈으로 보는 시고, 시는 언어로 쓰는 그림이라고도 하잖아요. 제목도 맞춤하게 전람회고요.
<아함경>에 보면 우리의 마음에 관한 글이 있는데 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있다고 말할 수 없고 마음은 쉴 새 없이 활동하고 있으니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또 우리가 바쁘게 마음을 쓰고 있지만, 마음은 항상 텅 비어있으니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이 텅 비어 있으나 항상 쓰고 있으니 우리에게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죠. 그런 마음을 그린 언어로 쓴 그림이 손미의 「전람회」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