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지방에는 첫눈이 왔다는데 제가 사는 이곳은 막바지 가을로 한창입니다. 베란다에서 보면 5층 높이쯤인 은행나무인지라 4층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예술이죠. 가을의 은행잎이 이렇게 샛노랗다는 걸 저는 여기 살면서 알았습니다. 물론 길가에 수북하게 쌓인 잎이나, 스산한 바람에 날리는 은행잎을 볼 때도 모르지 않았지만, 베란다에서, 그것도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가을은 본연의 노랑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 좋습니다.
손을 뻗으면 손가락도 노랗게 물들 것만 같거든요. 그럴 때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마음도 뭉클해집니다. 이럴 때 음악이 빠질 순 없겠죠. 저는 아이유가 부른 ‘Love poem’을 틀었습니다. ‘사랑시’죠. 이 뭉클함을 어디든 전하고 싶은데 받는 사람은 또 유치하다 할까 봐, 혹은 바빠 죽겠는데 팔자 좋다며 장난스레 넘길까 봐 그냥 혼자 듣습니다. 전에도 몇 번 들었지만, 가사를 유심히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가사가 이렇게나 아름다웠군요.
https://www.youtube.com/watch?v=A4jp4bH52E8
저는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은행나무를 보면서 나직이 중얼거려봅니다. 좋아요. 이런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그저 풍경이 아름다워서기도 하지만, 저로서는 슬픔에 더 가까운 아름다움이어서 더 좋습니다. 그제는 해질녘 거리를 걷는데 문득 서러운 마음이 들었더랬죠.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낮고 어둡게 깔린 하늘 아래, 잎을 다 떨군 벚나무를 보니 마음이 아려오더군요.
집으로 돌아와 배가 고파 냉동 핫도그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입에 물었는데, 웬걸요. 억울한 감정이랄까요. 아니, 아니에요. 억울함이 아니라 다른 감정인데 달리 표현을 못 하겠습니다. 그건 아마도 황지우 시인이 ‘거룩한 식사’에서 적은 것처럼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그 느낌일 겁니다. 그때 누구라도 전화를 걸어와 밥 먹었니? 이렇게 물어봐 주면 얼마나 따뜻할까, 그런 생각을 했더랬죠. 여러분은 혹시 <담보>라는 영화를 보신 적 있나요? 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진다지만, 이건 그야말로 작정하고 신파를 내세웠음에도 저는 인물의 정서에 상당히 기댔던 기억이 납니다.
역시나 좋은 영화 한 편을 볼 때나 좋은 음악을 듣고 감동하는 일은 좋은 책 한 권을 읽은 것과 같은 무게인 듯합니다. 제겐 <담보>가 그랬습니다. 영화를 리뷰하는 글은 대개 방향성이 있는 편이데, 그게 캐릭터를 소비하는 배우적 관점일 수도 있고, 예고편만으로도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기대 예측 가능한 관점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점에서는 배우의 필모그래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다만, 배우의 연기 변신이 감독보다는 폭이 큰 편이므로 대개의 리뷰는 아무래도 감독적 관점에서 풀어가는 게 일반적이겠죠.
그래서 우리는 어떤 영화를 보기도 전에 감독을 보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방식이 전작이 추구한 장르적 관점인데 대표적으로 조폭 영화가 그렇고, 신파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대와 혹평의 기준 또한 관객의 입장에서는 저마다 살아온 고유한 정서를 따라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실 장르에 상관없이 모든 영화는 개인적 취향인 것이고 누가 만들고 누가 연기하느냐는 그다음의 기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정서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경우엔 개연성과 우연성이 얼마나 적절한지가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시대적 배경에 따라 적절함의 눈높이가 상당 부분 조절되기도 합니다. 마치 '라떼는 말이야'가 주는 향수처럼요. 그때 관객은 가장 현실적인 균형 감각을 지우고 감정의 진폭에 누구보다 크게 영향받지 않을까 싶은데요. 역시나 제겐 <담보>가 그랬습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저는 위에 캡처한 두 장의 장면에서 잠시 화면을 정지했는데요. 어이없게도 영화적 내용과는 상관없이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저무는 걸 보면서 가까운 저의 미래를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답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 그 자체가 아니라 창밖으로 비치는 파릇한 신록과,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생의 막바지에 이른 한 인간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슬픔이었는데요. 앞으로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껴져 가슴이 뭉클했답니다.
그리고 또 한 장의 사진은 그야말로 영화적 이야기에 온전히 저만의 정서가 가미된 장면인데요. 통장에 기재된 내역이 전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마치 나이 드신 부모님이 삐뚤삐뚤하게 써 내려간 글자를 보는 기분이었달까요. 저는 학창 시절 어머니로부터 돈 봉투를 받은 기억이 있는데요. 풀칠하는 자리에 '형만이 10만원'이라고 엉성하게 써진 글자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영화를 소비하는 특별한 시선은 문학적 글쓰기에도 상당 부분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신파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대개 그러하듯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야기 전개가 진부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지금의 저에겐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한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쓴 시 중에 ‘우리는 언제 이렇게 늙어왔을까’라는 시가 있는데요. 그러게요. 우리는 언제 이렇게 늙어왔을까요. 유년시절 밤하늘 별을 세면서 빛나는 꿈을 가졌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기까지 와버렸네요. 어떤가요? 당신도 한때는 빛나는 별이 될 거라고, 빛나는 별이었던 시절이 있지 않았나요? 그래서 그제 제가 그랬던 것처럼 터벅터벅 걸어가는 걸음이 더 무겁지 않았나요? 맞아요. 그래도 우리는 알죠. 잘 압니다. 우리네 삶이 빛나지 않았어도, 빛나는 별이 아니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있는 그대로 눈부시고 빛날 테니까요.
저와 가까운 분이 보내줘서 알게 된 곡 ‘나는 반딧불’이라는 곡인데 한번 들어보세요. 원곡은 2020년 중식이 곡인데 올해 황가람이 리메이크한 곡입니다. 꼭 들어보세요. 당신은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qJwymrRXOLI&t=1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