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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만 Nov 22. 2024

신춘문예) 너무 작은 숫자 / 성다영

도로에 커다란 돌 하나가 있다 이 풍경은 낯설다 도로에 돌무더기가 있다 이 풍경은 이해된다


그린벨트로 묶인 산속을 걷는다

끝으로 도달하며 계속해서 갈라지는 나뭇가지


모든 것에는 규칙이 있다 예외가 있다면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공학자가 계산기를 두드린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렇기에 더 중요합니다 너무 작은 숫자에 더 작은 숫자를 더한다


사라져가는 모든 것은 비유다


망할 것이다


한여름 껴안고 걸어가는 연인을 본다 정말 사랑하나봐 네가 말했고 나는 그들이 불행해 보인다는 말 대신 정말 덥겠다 이제 그만 더웠으면 좋겠어 여기까지 말하면 너는 웃지


그런 예측은 쉽다

다영 씨가 웃는다

역사는 뇌사상태에 빠진 몸과 닮았다


나무 컵 받침이 컵에 달라붙고 중력이 컵 받침을 떼어낸다


물이 끈적인다 컵의 겉면을 따라 물방울이 아래로 모이는 동안 사람과 사물은 조금씩 낡아간다


조용한 공간에 금이 생긴다


되돌릴 수 없다



2019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당시 심사평 중에서 우리가 시를 써나가는데 도움이 될만한 글이 있어 아래에 소개합니다.


적어도 시에서 고유한 세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세계를 향해 가는 ‘언어적 의지’ 일 것이다. 언어적 의지는 시인의 의지가 아니라 시인이 구사하는 언어에 숨어 있는 힘에 가깝다. 그 힘으로 인해 우리는 시가 만드는 특별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어떤 언어는 동시대 시인들에게 마치 공통감각처럼 통용되기도 하는데, 그 유행에 시인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방법론에 휩쓸린 나머지 자신의 세계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리는 모두가 잘 쓰고자 한다. 하지만 ‘쓰려는 것을 잘 쓰는 것’과 ‘잘 쓰기 위해 쓰는 것’은 다르다. 시가 고유한 세계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언어의 장르이면서 또한 진실의 장르이기 때문이다. 성다영은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선작 ‘너무 작은 숫자’는 침묵과 수다를 격정 속에 교차시키고 딴청과 응시를 침묵 속에 빠뜨리면서, 이러한 언어의 불균질성이야말로 상실 앞에 선 마음의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말한다. 비록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사라짐의 의미를 깨달을 수는 없지만, 그 순간에 동참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들이 겪는 상실의 필연적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컵에 달라붙어 있던 컵 받침이 무심하게 다시 떨어지는 일에서조차도 말이다. 그것이 성다영 시가 가진 언어적 의지이다.


심사위원 장석남·김민정·신용목




해마다 신춘문예를 통해서 수많은 작품이 쏟아지지만, 누군가 제게 물었을 때 바로 생각나는 작품 중의 하나가 오늘 소개한 이 작품입니다. 당시 성다영 응모자의 수상소감을 보면 엉뚱하게도 한여름 폭염경보가 내려진 날에 당선소감을 미리 써놨다고 하더군요. 이어지는 소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해 경향신문이 참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 내용은 글의 말미에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그동안 소개한 작품을 세어보니 열두 편이더군요. 어떤가요? 처음엔 눈이 번쩍 뜨이고 혹~ 하는 마음이 일었는데 어느새 타성에 젖어 흥미가 떨어지진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작품을 소개하는 저조차도 때로는 타성에 젖는데 읽는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서요. 조금만 힘내시길요. 당연한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잘 넘어가면 다시 혹~ 하는 마음이 생겨날 테니까요.


시를 쓴다는 거, 참 어렵습니다. 좋은 시는 왜 이렇게 어렵게 보이면서도 자꾸 궁금해지는 걸까요? 똑같은 한글인데도 어떻게 이런 생각, 이런 표현이 가능한지... 저 역시 매번 놀랍니다. 그래서 뜬금없게도 나이를 핑계대곤 했는데, 그게 핑계가 아니었습니다. 젊은 시인들의 언어감각은 확실히 다르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겠더군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그들을 따라가려면 더 치열하게 파고들 수밖에요.




이 작품 역시 올해 2025 신춘문예에 다시 응모하더라도 당선될 확률이 아주 높을 겁니다. 우리가 이 시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중요한 건 이 시의 분위기죠. 이제 시의 분위기만 봐도 어느 정도 감이란 게 올 겁니다. 제목인 <너무 작은 숫자>, 당선작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제목도 참 폼납니다. 이쯤 되면 제목이 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감이 오지요? 내용도 보면 크게 어렵게 쓴 것 같지도 않은데요. 말맛이랄까요, 왠지 그런 게 느껴집니다. 마지막 시구에서 '되돌릴 수 없다' 이렇게 갑자기 끝나는 단절감에서 비장미가 느껴지는 방식도 좋고요. 


잠시 다른 말을 해보자면, 손택수 시인은 2024년 광주일보 심사평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를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오랫동안 뜻과 주제와 내용 파악으로 시를 수용한 결과다. 시는 이해 너머 사랑의 영토다. 소리와 이미지, 독특한 어조, 명명할 수 없는 고유한 분위기들이 시의 건축학적 자재에 스며드는 사랑의 요소다. 풍화마저 건축의 일부이듯이 시의 건축에 있어 건축 너머의 천변만화하는 흐름을 놓치지 않을 때 이미 굳어진 기존의 이해는 새롭게 구축되고 우리의 일상 또한 새뜻해진다.


이해할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너무 반듯하고 투명하게 닦인 창을 통해 바라본 풍경이 쉬 잊히듯이 빠른 이해는 빠른 망각을 부르고 사유의 자동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해의 소비 시스템을 벗어난 시들은 대체로 창에 낀 먼지와 빗물이 흘러내린 자국 같은 불투명을 거절하지 않는다. 물론 이 불투명은 방법적인 것으로서 '쉬운 시'나 '난해시'의 이분법을 훌쩍 뛰어넘는 명징한 의식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손택수 시인의 말처럼 오늘 소개한 작품은 이미지와 독특한 어조, 고유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또한 너무 반듯하고 투명하게 닦인 창을 통해 바라본 풍경이 쉬 잊힌다고 말하네요. 이 말은 곧 조금도 어렵지 않아서 잘 읽히는 그런 작품을 경계하라는 말일 거고요. 시를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내용을 조금 살펴볼까요?


이 시는 화자의 여린 시선으로 인해 오히려 맑은 시심이 돋보이는데 제목에서 말하듯이 이 시는 너무 작은 숫자라고 말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사소함의 시선으로 읽힙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이라든가, 혹은 거대한 댐도 주먹만 한 구멍 때문에 무너지는 것처럼 말이죠. 혹자는 이 시를 두고 라깡의 상실에 대처하는 방법을 끌고 오기도 하는데요. 저는 시를 쓴 시인이 라깡의 이론을 염두에 두고 썼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건 거창하게, 혹은 좀 어렵게 말하기 좋아하는 평론가의 시선일 뿐이죠. 자, 그럼 평론가의 시선이 아닌 우리의 시선으로 한번 감상해 봅시다.




도로에 커다란 돌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이처럼 도로에 커다란 돌 하나가 있다면 왜 여기 커다란 돌이 있는지 누구라도 의문을 품겠죠. 따라서 이러한 풍경은 우리에게 낯섭니다. 하지만 자잘한 돌무더기가 있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어떤 필요에 의해서 누군가 가져다 뒀겠거니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풍경이니까요. 다시 말해 큰 것과 같은 큰일은 이해되지 않지만, 작고 사소한 것과 같은 대수롭지 않은 일은 쉽게 이해하고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점 하나가 관계의 무너짐인데 이 시에서 화자는 공학도가 계산기를 두드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작은 숫자, 사소함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린벨트로 묶인 호젓한 숲 속을 걷는 연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사랑스러워야 하는데 시적 화자의 눈에 들어오는 건 끝으로 갈수록 갈라지는 나뭇가지였죠. 갈라지는 것으로 관계의 뒤틀림을 연상해 본다면 이런 현상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규칙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더 많은 표본이 쌓여서야 규칙으로 명명되는데 화자는 공학도가 계산기를 두드린 것처럼, 쉽게 지나친 너무 작은 사소한 것들 위에 더 사소한 것을 더해봅니다. 그리하여 끝내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던 것들을 대변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고, 사라져 가는 모든 것은 실상 작은 것들이 미리 보여준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관계는 곧 망할 것이라고 확신하죠.


껴안고 걸어가는 연인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정말 사랑한다고 너는 말했고, 화자인 나는 덥겠다고 말합니다.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정반대임을 알 수 있죠. 남녀 관계 역시 둘만의 역사라고 본다면 이런 관계는 이미 뇌사 상태에 빠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찻집으로 옮겨가서도 시선의 사소한 불일치가 보입니다. 나무 컵 받침이 컵에 달라붙는 모습을 보는 시선은 중력이 컵 받침을 떼어낸다는 다른 시선과 극명하게 대비되죠. 물이 끈적이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컵의 겉면을 따라 흐르는 물방울, 이 작은 물방울은 처음에 쉽게 이해되는 자잘한 돌무더기의 다른 이름일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 작은 물방울이 모이는 동안 사람과 사물이 낡아가듯이 그들의 관계 역시도 낡아가는 중입니다.


마침내 금이 가는 조용한 공간처럼 관계는 끊어지고 관계는 되돌릴 수 없는 각자의 자리로 떠나갑니다. 제목에서 말하듯 너무 작은 숫자와 같은 아주 사소한 시선들로 관계의 연약함을 이렇듯 선명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당선작이 될만한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시를 해석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고 할지라도 이 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막연하지만 필연적인 어떤 상실'을 말하고 있음에는 분명해 보이네요. 끝으로 서두에서 언급했던 그녀의 아주 사소하지만 큰 울림을 줬던 당선소감의 나머지 부분을 옮기면서 작품 소개를 마칩니다.


매년 그렇듯이 올해도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무기력한 순간에도 시를 썼습니다. 그때마다 미리 써놓은 당선 소감을 꺼내 읽으며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는 시가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를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시를 씁니다. 문학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것 같아서 실망할 때에도. 시를 쓰다가 실패할 때에도. 삶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어서 깜짝 놀랍니다. 살아있다는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전화를 받고 사람들에게 당선 소식을 알렸습니다.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매우 놀라거나 그저 그런 반응. 매우 놀라는 사람은 대체로 시인을 위대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카프카가 말했듯이 시인은 사회의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보잘것없고 연약합니다. 그래서 지상 생활의 어려움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느낍니다. 시인이 연약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삶을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저도 미래를 걱정합니다. 20년 후에 임플란트 비용을 어떻게 낼 수 있을지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다는 감각은 깨끗하게 포장된 안전한 길 위에 있지 않습니다. 저는 길을 잃기 시작하면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설렙니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낯선 것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낯선 것은 변방에 있습니다. 변방에는 소위 정상이라는 괴상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변방에는 나이, 지역, 국적, 인종, 질병과 장애 여부, 학력, 가족 형태, 성적지향, 성정체성이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시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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