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해지면 죽을
끓입니다
식사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가볍게 훌훌 넘기고 싶다는 말
어제의 파도는 우물우물 삼켜도 된다는 그 말
그게 잘 안 돼요
부드럽게라는 말이 목에 걸려요
당분간 절식이나 금식
이상적인 처방이라는 건 알아요 미련이 생겨서
나는 죽을 먹습니다
맑고 흰죽을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
돌아서서 코를 풀었죠
조금 묽어졌다는 뜻이지만
눈물은 짜니까
빨간 눈으론 돌아다닐 수 없으니까
그런 날은 손바닥마다 노란 가시선인장꽃
울지 않은 척 했어요
얹혔을 거라고 수군거릴 때마다
이 고비는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생각에 걸려
어제도 오늘도 삼키죠 백번도 더 생각하죠
죽이고 죽이다 보면 또 다시 죽
이렇게 맑고 흰죽
목이 메여요 달랑 죽 한 그릇인데
눈이 부셔요
새로 태어난 것처럼
몸속을 돌아다니는 물기가
어제의 죽이라 하겠지만
밤마다 복닥복닥 탕! 탕!
죽 끓이는 시간이 또 다시 찾아오고
죽은 조금만 쑤어도 넘치게 한 솥이에요
후회도 한 솥 미움도 한 솥이어서
나는 먹고 또 먹을 테죠
다행이다 싶지만
맑고 흰,
무명의 시간들
좀 서운해요 돌아서면 고프고
어떻게든 달래고 싶은데
받는 게 이것 밖에 없는 이 속이
내 속이 그렇다는 거죠 지금
* 4⦁3 사건 피해자인 진아영 할머니는 턱과 이가 없어 평생 소화불량으로 인한 위장병과 영양실조를 달고 살았다.
2020 제8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
역대 수상작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각주에서 설명하듯이 이 작품은 진아영 할머니의 삶을 그린 내용이지만, 각주 없이 감상해도 참 좋습니다. 아래는 당선작으로 뽑은 심사평입니다.
이 작품은 4⦁3사건의 피해자인 진아영 할머니에 대해 그리고 있다. 그녀는 턱과 이가 없어 평생 소화불량으로 인한 위장병과 영양실조를 몸에 달고 살았다 한다. ‘죽’을 통해 불편한 몸을 떠올리고, 그 불편함을 야기한 사건을 되새기면서, 그 사건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을 쉽게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하에서, 주어진 삶을 힘겹게 가누어나가는 한 인간의 애잔한 안간힘을 그려내고 있다.
죽을 먹을 수밖에 없지만, 언제나 ‘부드럽게’라는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삶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죽’은 ‘죽이고 죽이’는 비극적인 사태를 떠올리는 매개체이면서 언제나 목 메이게 하는 것으로 가장 절실한 삶의 영양소이다. 음식을 통해 쓰디쓴 역사의 맛을 되새기는 절실함이 가슴을 울리게 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저는 이 작품 이후로, ‘희다’의 활용어인 ‘흰’이 제목에 들어가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네요. 소설가 한강의 작품 중에도 <흰>이 있죠. 올해 4⦁3 당선작 제목도 ‘흰 문장’이었고요.
이 작품 역시 따로 설명할 것도 없이 그냥 좋습니다. ‘흰죽’이 이렇게 슬픈 거였나 싶어지면서 왠지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2020년 당선작인데 저는 이보다 앞선 2019년에 정확히 이 제목을 문장 속에 쓴 적이 있습니다. 제대로 글 써보겠다고 서울 생활 정리하고 여수에 내려온 게 2018년 12월이었는데 당시 수필 형식으로 썼던 글이고, 발표할 기회가 없어 지금도 여전히 갖고만 있는 글입니다.
「지금도 밥에 관한 영상을 보거나 글을 읽을 때면 가슴에서 밥물처럼 끓어오르는 무엇이 있다. 하여, 방울방울 터지는 소리에서 꾸역꾸역 비집고 나오는 이야기가 들린다. 한 번은 몸살기가 있어 죽을 쑤던 날이었다. 보글보글 끓는 밥물을 보면서 사는 게 왜 이렇게 고단한가 싶다가도 방울져 터지는 맑고 흰죽을 보고 있자면 또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그럴 때면 삶이라는 게 이렇듯 밥 한술 뜨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당시 당선작 제목을 보면서, 어?? 나도 저 구절을 쓴 적이 있는데… 하면서 찾게 됐던 겁니다. 그럼에도 이 제목으로 시를 쓸 생각은 못했던 게지요. 왜 그럴까요? 변희수 시인은 이 제목으로 이렇게 멋진 시를 썼는데 말이죠. 아마도 그건 언어에 대한 사유가 부족해서일 겁니다. 그도 아니면, 타성에 젖은 쓰기였든지. 어디 이뿐일까요. 우리가 앞으로 쓰게 될 무수한 문장 속에는 제목으로 쓰면 좋은 구절이 분명 있을 겁니다.
요는 이겁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처럼 자세히 보아야 되고, 오래 보아야 됩니다. 시도 그렇다, 입니다. 시를 쓸 때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이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한 편을 쓰더라도 제대로 써야겠다는 그런 자세가 중요합니다. 전통 서정시든, 현대시든 그렇습니다. 굳이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특정한 주제를 정해놓고 쓰는 전통 서정시가 그런 경웁니다. 솔직히 말해 현대시는 그날의 기분(feel)에 따라, 수필 쓰듯이 그냥 써지는 경우가 많죠. 퇴고를 거치면서 틀을 다듬고 의미를 부여하면서요.
그래서 저는 사유의 깊이 면에서는 현대시를 쓰는 분들보다 전통 서정시를 쓰는 분들의 언어적 사유가 더 깊지 않을까 생각하는 편입니다. 좀 이상하죠? 현대시가 더 어려운(?) 편이니, 그들의 작품이 더 사유가 깊어야 하는데… ㅎ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전통 서정시를 쓰는 분들 중에는 현대시를 발표하는 분들이 제법 보이지만, 현대시만 쓰는 분들은 발표를 안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전통 서정시 부류의 작품이 별로 없습니다. 늘, 현대시 같은(?) 부류만 씁니다. 오히려 전통 서정시를 낮춰 보는 경향까지 있는 것도 같고요. 물론 일부가 그렇다는 거지, 전부는 아닙니다.^^
각설하고, 오늘 소개한 시 역시 지금껏 소개한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다시 응모해도 당선될 만한 작품입니다. 특별히 한 구절을 꼽을 수는 없지만, 흔한 말로 ‘말맛’이 느껴지죠. 특히나 행을 끝내는 어미 부분에서 두드러집니다. 1연처럼 -습니다 체로 쓰다가 명사형으로 끝내는 2연, 그러다 –요 체로 끝내는 3연, 그러다 그걸 다 섞은 4연, 나아가서는 –까 체로 끝내는 6연이죠. 심사평에서 언급했듯이 친숙한 어투에 7연처럼 언어유희를 가미한 ‘죽이고 죽이다 보면 또 다시 죽’이라는 시구도 그렇고요.
이런 서정은 어떻게 생겨날까요? 마냥 타고난 감성이라 둘러치기엔 유려한 말맛에 깃든 애시린 슬픔의 정조가 탁월합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며칠 전 구병모 소설 <파과>를 원작으로 한 영화를 봤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주인공의 노트에 희미하게 써진 문장이 보이더군요. 정지시켜 놓고 읽어보니 왠지 가슴을 울리는 글귀여서 적어뒀습니다. 원작 소설에 나오는 문장인지, 혹은 각색한 문장인지는 모르겠으나 문장은 이랬습니다.
그 사람 옆에 설 수 없다면 그 사람 앞에서 죽어
그 사람의 목적이 될 수 없다면 그 사람의 흉터로라도 남아
지옥에서 보자는 말 참 좋은 것 같아요
어쨌든 다시 보자는 뜻이잖아요
늙으면 옛날에 자기가 한 선택을 후회하고 자기혐오에 빠져
하지만 지금의 선택도 결국 후회할 거야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란 없어
당신이 이럴까 봐 겁나 너는 자라서 겨우 내가 된 거냐
너도 나만큼 잘 컸구나, 라는 한마디만 해줘
진실을 깨닫게 하는데 피보다 나은 게 뭐가 있을까
■ 사유는 하나의 문장에서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면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네요.
제 글을 읽고 가슴에 뭐라도 들어왔다면, 그 역시 사유의 출발이지 않을까요. 그런 분이 부디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