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로 부릅니다. 양파 속에 앉아있는 당신과 당신 속에 앉아 있는 양파의 조합. 껍질 사이로 터지는 흰빛의 회오리. 이글루라 부릅니다. 천년 전에 내린 비가 기다리고 있는 집. 오래된 사건으로 다시 태어나는 집. 얼음과 얼음으로 마주 앉았습니다. 거대하고 동그란 악수. 반갑습니다! 평화로운 저녁을 만들었습니다. 얼음이 얼음일 때의 공포와 얼음이 얼음을 버릴 때의 쓸쓸함을 쌓아올렸습니다. 이누이트라는 말은 선뜩한 날고기. 길고 느린 석양의 조합. 결론을 알면서도 오늘의 손가락을 구부리는 이유. 비명을 지르면서 냄비를 놓지 못하던 엄마와 손바닥을 빨갛게 태우던 아빠의 시간. 양파의 흰 피는 화끈거리고 양파 속에서 찬바람 부는데 손 안의 오로라가 자꾸 미끄러집니다. 흰빛의 현란함이 위대, 라거나 장엄으로 불릴 때 한 방울의 내가 흘러내리던 사건. 걸쭉하게 웅크린 이글루 위로 위대와 장엄이 쏟아집니다.
2021 제27회 마지막 진주가을문예 시 부문 당선작
오늘 소개한 작품은 문예지 당선작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문예지로 분류한 까닭은 단순히 여타 문학상으로 치부하기엔 엄연히 등단지로 인정받던 <진주가을문예>의 의미가 축소되는 것 같아섭니다. 여긴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있는데 2019 제25회에서 최종까지 올랐으나 아깝게 떨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당선작을 보면 알겠지만, 진주가을문예의 수준은 유명 문예지 못지않았는데 사라져서 많이 아쉽네요. 정월향 시인은 진주가을문예로 등단했고, 다음 해에 ‘그런 온도’로 수주문학상을 수상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작품을 소개하고 싶었던 이유는 시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이미지가 어떻게 확장의 과정을 거치는지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럼, 일단 심사평부터 봅시다.
당선작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오래 매만진 손길이 느껴지는 정갈한 구성과 읽는 이를 사로잡는 이미지 사용이 돋보였다"며 "언어의 활용 폭이 넓어 하나의 문장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던진 단어를 딛고 날아오르는 시원한 날갯짓에 가슴이 탁 트이는 듯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양초라는 하나의 사물에서 출발하여 양파, 이글루, 이누이트, 석양, 상처 등을 경유하며 일상 속에서 위대와 장엄을 발견해낸 탁월한 작품이었다"고 표현했다.
이제 시를 살펴봅시다. 제목이 ‘양초라는 사건’인데 양초에서 사건이라고 할 만한 건 불이 타오르는 이미지일 텐데요. 시의 시작을 보면 ‘오로라로 부릅니다’ 로 시작하네요. 그리고 시의 마지막을 보면 그 사건은 위대와 장엄으로 흘러내리는 사건이 됩니다. 즉, 양초의 가느다란 불빛은 시적 화자가 가진 내면의 기억과 감정을 끌어내는 이미지의 출발인 셈이죠. 그래서 결국 그 이미지가 무엇이 되느냐 하면, 양초라는 사건은 위대와 장엄으로 흘러내리는 오로라가 된다는 말입니다. 두괄식 구성으로 오로라로 부른다고 결론을 미리 말해놓고 그 과정을 보여주는 거라고 이해하면 될 듯합니다.
양초의 불빛이 어떤 이미지로 변화했는지 살펴보면 양파로 시작해서 이글루(집), 이누이트(가족), 석양, 가족의 상처, 흰 피로 이어집니다. 잘 보시면 알겠지만, 양초는 흰색이고, 양초의 불빛은 붉은색이죠. 양파와 이글루는 흰색이며, 석양과 가족의 상처는 붉을 테니, 이누이트(가족)가 석양의 조합이라는 말은 가족은 상처의 조합임을 알 수 있겠네요. 마지막에서 양파의 즙을 흰 피라고 하는데 여기서 ‘흰 피’가 위대와 장엄으로 가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흰 피가 왜?? 의문이 들겠지만, 희다는 것은 예로부터 순결, 순수, 신성, 초월성을 내포합니다. 신라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게 된 계기가 ‘이차돈의 흰 피’였음을 떠올리면 되겠네요.
‘양파 속에 앉아있는 당신’이라는 건 당신의 감정이 양파처럼 겹겹이 쌓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 속에 앉아 있는 양파의 조합’은 당신의 수많은 감정이라는 말이고요. 양파의 하얀 ‘껍질 사이로 터지는 흰빛의 회오리’는 당신이 분출하는 감정을 흰빛의 회오리라는 이미지로 표현한 겁니다. 양파니까 감정을 흰빛의 회오리라 한 거고, 좀처럼 변하지 않는 당신의 견고한 감정이기에 흰색과 단단한 이미지를 주는 ‘이글루’라는 이미지는 그래서 나오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 오로라로 부른다고 했으니 당연히 지역은 북극권일 테니까 이글루는 자연스럽겠네요.
이글루는 천년 전에 내린 비가 얼어서 만든 얼음집이니 오래된 사건으로 인해 다시 태어난 집인 셈입니다. 그런 집에서 얼음과 얼음으로 마주 앉았으니, 자연의 경외감 속에서 한낱 인간으로 살아가는 고독함이랄까요. 그런 여건에서도 평화로운 저녁을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느껴지지 않나요? 그 역시 장엄함의 하나일 겁니다. 이어지는 비명을 지르면서 냄비를 놓지 못하던 엄마와 손바닥을 빨갛게 태우던 아빠의 시간은 일상의 고통이겠고요. 단단하고 차가운 이글루는 단단하고 차가운 현실이니까요.
양파의 흰 피로 표현한 흰 즙은 실제로도 피부에 닿으면 따끔거리고 화끈거리는데요. 흰 초가 양파와 이글루가 되고, 촛불이 흰 즙이라면, 수많은 껍질인 양파와 이글루를 이루는 얼음과 얼음은 화자의 굳건한 감정이 되고, 그 같은 감정은 흰 즙인 흰 피로 인해 자꾸만 미끄러지는데 촛농처럼 흰 피 한 방울로 내가 흘러내리던 사건은 비로소 자아의 전환을 가져오게 됩니다. 촛농이 한 방울씩 걸쭉하게 흘러내릴 때, 그 걸쭉함은 양초처럼 단단한 이글루에 흘러내리는 식인데 이는 한 인간이 자신을 희생하여 위대와 장엄이라는 감정과 연결되는 순간을 말합니다.
그러니 이 시는 불을 밝히는 ‘양초라는 사건’이라는 그 사소한 행위로 양초가 지닌 내부와 불을 밝히는 외부를 연결하는 이야긴데, 개인의 사소한 기억과 상처가 양파와 이글루, 얼음, 이누이트, 가족의 상처를 거쳐 외부 세계인 오로라의 환희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줍니다. 그런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위대와 장엄을 드러낸 것이고요.
알고 보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별생각 없이 보면 또 어려운 게 시가 아닌가 싶네요. 양초에 불을 밝히는 그 작은 일로 이런 시를 쓴 걸 보면 시인은 참으로 섬세한 감각을 지닌 듯합니다. 지금 당장 양초를 준비해서 불을 붙이고 가만히 바라보세요. 양파와 이글루와 얼음을 상상할 수 있나요? 요즘 불멍도 유행이라는데 우리도 멍만 때리지 말고, 사소한 사건에서 비약적인 이미지로 나아가봅시다. 어디 불멍뿐인가요. 바람 멍도 있고, 어둠을 바라보는 밤 멍도 있지 싶네요. 지금 새벽 3시가 다 돼가니 저도 베란다로 가서 밤 멍과 바람 멍을 좀 해야겠습니다. 담배라도 한 대 피우면 불멍도 되겠군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