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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기) 단상들

by 최형만

25. 07. 11 새벽 1시를 지날 무렵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웠다. 의자에 기대 고개를 들면 보이는 맞춤한 자리, 거기 달이 있었다. 그제도 어찌나 밝은지, 보름인가 싶어 달력을 보니 보름달이었던 것. 얼핏 보면 노랗다가, 다시 보면 흰색 같은데, 자세히 보니 흰색에 회색 얼룩과 연노랑이 섞여 있다.


삼국시대처럼 아주 먼 옛사람들은 저렇게 환한 달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차도 없고, 휴대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편의점도 없고, 메이커 옷도, 구두도, 아파트도, 피자도 라면도 커피도 유튜브도 없던 그 시절의 사람들은 달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달을 볼 때마다 나는 인간의 끈질김을 생각한다. 정말 대단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저 멀리까지, 거기가 어디라고 저기까지 갔을까? 가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을까? 그러고 보면 인류 역사의 발전에 있어 이성적 지식은 문학적 감성에 비해 압도적이지 싶다. 사람의 정서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한다면 어쨌거나 지식이야말로 가장 눈에 보이는 차이가 될 테니까.


그런 점에서 현대 철학은 인류의 길잡이가 될 수 없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는데,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유래된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이 현대에 와서도 철학은 여전히 과학적 이성의 시녀가 아닐까 싶어서다. 사실 중세에서 철학이 담당한 부분은 신학의 신앙적 진리를 설명하는 이성적 도구로 작용했으나, 현대에 와서 철학은 그들이 담당하던 이성을 과학에 완전히 넘겨준 것 같다.


뭐랄까, 과학이 몇 걸음 앞서가면 철학은 뒤늦게 헐레벌떡 쫓아와서는 사람이 그래선 안 된다는 둥 어깃장을 놓는 역할이랄까. 실제로 생각해 보면 과거 철학이 담당했던 이성이라는 게 지금의 이성과는 달랐을 거라 본다. 이는 신학의 본질을 생각하면 더 분명해진다. "신학(神學)"은 ‘신(神)에 대한 학문’, 즉 어떤 종교의 신, 교리 등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모세가 바다를 가르는 것처럼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이해 못 할 기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가?


하지만 신학의 시녀인 철학은 그조차도 이성적으로 이해시키고 설명해야 했으니 얼마나 많은 구라를 쳤을지 상상이 가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인간이 저 달까지 가게 만든 굳건한 과학적 이성과는 달리 인간의 유한성을 증명하는 존재로 해나 달을 봤을 철학적 이성은 언제든 무너질 모래탑이지 않았을까.


다만, 이렇듯 굳건한 이성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우리가 달을 보면서 여전히 그리움을 말하고, 사랑을 떠올리는 걸 보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철학적 구라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을 것 같긴 하다. 이는 마치 설명할 수 없는 신학의 영역이 사랑(달=여자)이라면, 그 사랑을 얻기 위해서 온갖 사탕발림과 구라까지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모든 수컷의 본능 같달까.


나는 베란다에서 달을 보면서 나라는 인간은 얼마나 철학적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정말 수컷으로서 살고나 있는지 생각했고, 고로 인공지능이 등장하는 이 시대에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신학의 시녀일 수밖에 없겠구나, 또 그런 생각을 했다. 하긴 그러니까 이렇게 글을 쓰는 거겠지만.



25. 07. 13 새벽 3시 무렵


연일 이어지던 무더위가 웬일로 주춤하는 기분이다. 저물녘 베란다에 서서 얼굴을 내밀면 바람이 살랑이더니, 새벽인 지금은 가을밤처럼 선선하기까지 하다. 아직 매미도 울지 않았는데, 기사를 보니 다음주에도 무더위가 이어질 거라 했는데... 지금은 또 가을 같다.


밤하늘을 보고 나지막이 혼잣말했더랬다. 어디에도 가 닿지 못할 말들이 허공에 떠다녔다. 눈을 감으면 선명한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열렸는데, 하나같이 서늘한 가을 같은 기억들. 청춘은 이미 다 가버렸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면 문득 삶의 종착역 가까이 와버린 느낌이어서 조금은 무력해진다. 하긴, 어디 나만 그럴까. 꽃시절을 보낸 모든 종이 다 그러하겠지.



25. 07. 15 밤을 꼴딱 새우고


아주 괜찮은 시를 완성(?)한 날엔, 그것도 한 편이 아니라 몇 편일 때는 마음도 제멋대로 붕- 뜨고야 만다. 당장 경제적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제대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2021년 종영된 드라마 <인간실격>을 유튜브에서 결말 포함된 하이라이트로 우연히 봤다. 호스트바에서 선수로 뛰다가 지금은 애인이든, 친구든, 뭐든 역할 대행을 하는 남자(류준열)와 유부녀(전도연)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 거기서 각자의 내레이션이 나오는데 문장이 가슴에 콕콕 박혔다. 유튜브에서 ‘인간실격 내레이션’으로 검색하면 다 나오긴 하는데 드라마 하이라이트라도 보고 들어야 가슴에 비수를 푹푹 찔러대니 그냥은 듣지 말 것. ㅎ (참고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전도연의 내레이션 중에서



사랑하는 아버지.

아마도 나는 언젠가 마흔이 넘으면

서울이 아닌 어느 곳에 작은 내 집이 있고

빨래를 널어 말릴 마당이나

그게 아니면 작은 서재가 있고

아이는 하나 아니면 둘.

운이 좋으면 내 이름의 책.

전혀 안 팔리는 책이어도 좋은 그런 책이

서점 구석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그런 사람이 돼 있을 거라고…

그게 실패하지 않은 삶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전부 다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그중에 하나 아니면 두 개쯤 손에 쥐고서

다른 가지지 못한 것들을 부러워하는 그런 인생.

그게 내 마흔 즈음의 모습이라고…

그게 아니면 안 된다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무엇이 이토록 두려운 걸까요?

아버지, 어쩌면 나는 아버지한테 언젠가 이 말을 하게 되는 일이

사는 내내 가장 두려운 일이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 나는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되지 못한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아니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사실 저도 무슨 일이 저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건지 잘 모르겠거든요.

그냥 누군가 들으면 고작 그런 일로 죽겠다는 생각을 했냐며

화를 내거나 비웃을지도 모를 그런 작고 흔한 일들이

제게도 있었을 뿐이니까요.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그런 대단한 이유가 아니라서 죄송해요.

나를 구하지 못해서.

나를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살다 보면, 현실이라는 말이 가장 나쁜 순간이 될 때가 있어요.

그때까지의 삶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노력도, 진심도, 다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요.

그나마 좋았던 것, 그래도 이 정도면 남보다 낫다고…

괜찮다고 생각했던 모든 게 다 환상이었구나… 싶은 그런 순간이요.

아무리 좋은 걸 상상하려고 해도,

작은 일에 희망을 가져보려고 해도,

눈앞에 아무것도 그려지지가 않았어요.

너무 괴로워서 하루라도 빨리 이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어떻게 해도 깨지지가 않았어요.

이전으로 돌아가지지가 않았어요.

그때 알게 됐어요.

이전이 꿈이었고, 지금이 현실이라는 걸.

환상이 없는 현실은 삶이라기보다 죽음에 더 가까워요.




류준열의 내레이션 중에서



안녕하세요, 아버지.

어제는 살면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의 내가 조금은 다른 모습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보시다시피 저는 아주, 딱, 엉망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저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똑같이 태어나서 아무것도…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

어떡하죠, 아버지?

어쩌다 보니 벌써 제가 다음 주에 스물일곱이 됩니다.

스물일곱에 엄마는 벌써 나를 학교에 보냈다는데

저는 스물여섯의 마지막 날들에

겨우, 돈이란 무엇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나한테 돈을 제일 많이 쓴 사람이 아닐까?

하는 그런 나쁜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

돈이 있었다면 아마도 모두 나에게 주었을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돈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저는 완전히 잘못 돼 버린 걸까요?

인간답게 사는 일에 실패해버린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직 아무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남이란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밥을 먹고

비슷한 대화를 하고

비슷한 곳을 바라보며

그렇게 그냥 원래부터 비슷한 사람인 척 섞여 사는

그런 걸로는 부족한 걸까요?

무슨 일을 하는지 긴 설명이 필요 없는

모두가 알 만한 괜찮은 일을 하면서

괜찮은 학교에 다니고

괜찮은 사람들을 만나고

괜찮은 생각을 하는 그런 삶.

그런 게 남들처럼 사는 거라면, 아버지…

저는 어쩌면 지난 몇 년 동안 내내

누구보다 빨리, 누구보다 멋지게

바로 그 남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길바닥에 던져버린

그 시간의 빈자리를 흔적 없이 메우고

똑바로 앞만 보고 살아온 사람과 나란히 서는 그 일.

남들이 살고 있는 그곳으로 가는 지름길.

그 길을 찾는 그게 진짜 성공이라고

내내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이 되어야 비로소 내가 될 수 있는 이 마음은

잘못된 마음일까요?



언젠가 마흔이 되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주상복합에,

모든 것이 나와 다른 똑똑한 아내와,

막 욕조에서 건진 것 같은 말간 아이도 있고,

밥도 팔고 술도 파는 내 명의의 식당이 강남에 하나.

만약에 마흔이 된 어느 날.

이 중에 어느 하나도 이루지 못한다면

여전히 지금 이대로 내 엄마나 아버지같이 점점 더

가난해지기만 한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쁜 사람이 돼 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당신이 왜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 했는지,

이곳을 떠나려 했는지,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어디로 가려고 했었나요?

어디로 가고 싶었나요?



안녕하세요, 아버지 잘 지내고 계신가요?

보시다시피 저는 여전히 아주, 딱, 엉망입니다.

아주 오랜만에 아무 이유 없이

돈이 아닌 어떤 것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돈도 아니고, 이기고 지는 것도 아닌

작고 이상한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

처음 만나는 세상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무엇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요.

무슨 기대를 했던 걸까요.

어디서부터 잘못 걸어온 걸까요.

마음을 따라 반대편으로 열심히 걸어가 보았지만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단 한 걸음도 가까워지지 못하고, 한 걸음도 멀어지지 못한 채

다시 처음 그 자리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어떡하죠, 아버지?

저는 여전히, 아직도, 하루에도 몇 번씩.

돈이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저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제게 가장 많은 돈을 쓴 사람일 거란 오래된 생각을

습관처럼 또 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끔, 그러다가 아주 가끔은

그럼 사랑이라는 건 뭘까? 라는…

살면서 또 한 번도 한 적 없는 그런 생각 속으로

깊게 빠져들어 버리고 맙니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내 안에 그 사람의 공간이 생겨나고, 자라나고…

그러다가 결국 온통 한 사람으로 가득 차버리는 나른한 고통에 대해서.

애써 혼자가 되려고 해도 끝내 혼자가 될 수 없는

달콤한 근심에 대해서.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요?

그 사람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이…

끝내 무엇이 되지 못한다 해도 지금의 나에게 솔직한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좋아합니다. 다양한 장르를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내적인 마음을 담아내는 그런 류를 더 좋아합니다. 그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그런 까닭에 저는 또 글을 씁니다. ‘폭싹 속았수다’도 언제 때가 되면 정주행해야 할 텐데요.^^


작품을 소개한 지 오늘로써 꼭 일 년째 되는 날입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 작품을 소개했는데, 여러분의 성에 찼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저 개인적으로는 당선작도 당선작이지만, ‘쉬어가기’ 코너에서 더 많은 말을 했고, 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곳에서 푸념 삼아 늘어놓던 말들, 혹은 분개해서 갈긴 글들… 그런 게 제가 글을 쓰는 이유였으니까요.


일 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그만해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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