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우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주전자 물 끓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미풍에 머리카락 날리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창문보다 낮게 목소리를 죽이는 아이, 이웃집엔 중문도 방음벽도 없단다 얌전히 울면 해바라기 씨를 가득 줄 테야
호기심 많은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쪼아대도 가둔다 짧고 단단한 부리로 백합 꽃잎을 쪼아 대도 가둔다 동글동글한 눈빛으로 수도꼭지를 툭툭 건드려도 가둔다 집안에서 제일 예민한 각도로 웅크리는 아이, 이웃집엔 꽃병도 수도꼭지도 없단다 너의 호기심을 잠그면 해바라기 밭을 줄 테야
혼자 놀기 좋아하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오후 햇살이 올리브색 깃털 위로 미끄러져도 가둔다 건반 위를 콩콩 뛰어다니기만 해도 가둔다 깨지지 않는 거울을 보고 혼잣말을 해도 가둔다 방안에서 깃털을 고르는 아이, 이웃집 엔 햇살도 거울도 없단다 방안 가득 네 꿈을 펼친다면 새장을 통째로 줄 테야
아파트 밖을 나서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창문 여는 소리만 들려도 가둔다 놀이터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높아 져도 가둔다 마오리족의 깃털처럼 가벼워지려는 아이를 가둔다 창살 안에서 노란 깃털을 뽐내는 아이, 이웃집 엔 너 같은 아이도 악보도 없단다 내 앞에서만 노래하면 새장을 요람처럼 흔들어 줄 테야
2025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오늘은 ‘카카리키 앵무’라는 작품입니다. 우선 제목이 좀 생소합니다. 찾아보니까 ‘카카리키’는 작고 활발한 성격을 가진 앵무새로 뉴질랜드 원산지의 토종 앵무새를 말하더군요. ‘카카리키(KaKariki)’라는 이름은 마오리족 언어로 ‘작은 앵무새’라는 뜻이고요. 아래는 심사평입니다.
“「카카리키 앵무」는 사회문제로 떠오른 층간소음문제, 육아, 가족, 교육문제 등을 반려동물을 통해 바라본 작품이다. 당선작을 받쳐주는 다른 작품의 수준이 조금은 고른 이에게 마음이 더 기울였다. 또한 시를 끌고 나가는 뒷힘과 함께 당선자 쪽의 발랄과 생기가 우리의 의도에 더 맞는 것으로 여겼다. 부디 당선작이 대표작이 된 시인으로 머물지 않기를 바라며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박남준·김사인 시인”
자, 그럼 이제 시를 좀 살펴봅시다. 우선 이런 시를 만나면 호기심이 생기면서도 순간 어려울 것 같다는 선입견이 들 겁니다. 왜냐, 일단 외래어기 때문이죠.ㅎ 앵무새 자체를 말할 것 같진 않고, 앵무새를 통해 신화나 철학을 말할 것 같거든요. 그런데 웬걸요. 내용을 읽어보니 헷갈리는 것도 없이 명쾌합니다. 그래서 심사평을 보니 역시나 마찬가집니다. 간만에 당선작이 참 쉽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하나하나 뜯어보니 어렵게 표현하지도 않았고요.
이 작품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그런 겁니다. 알고 보면 참 쉬운데, 순간적으로 어렵게 보이거나 호기심이 느껴질 만한 제목을 어떻게 짓느냐입니다. 어쩌면 신춘문예에서는 이게 가장 첫 번째로 고민해야 할 부분이겠네요. 보시다시피 시에서 앵무새를 걷어내고 고양이나 개, 혹은 다른 애완동물을 넣어도 주제를 구현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왜 앵무새로 했을까요?
시의 구조를 잠시 봅시다. 총 4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각 연의 시작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그리고 각 연의 마무리를 “~줄 테야”로 끝냅니다. 내용만 다르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각 연마다 크게 차이는 없죠. 맞아요. 당근과 채찍입니다. 자유를 억압하면 그에 따른 보상을 주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아이’는 앵무새를 말하지만, 우리네 삶으로 연결하면 실제 아이를 가리키는 식입니다.
그런 연약한 아이의 이미지로 가져올 만한 애완동물로 뭐가 있을까요? 고양이나 개는 좀 아닌 것 같고, 작고 앙증맞고 연약한 이미지로 새가 딱입니다. 앵무새는 우리에게 친숙하기도 하니까요. 더구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소품으로 ‘새장’까지 있으니 완벽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냥 ‘앵무새의 말, 혹은 앵무새의 노래’라고 했다면, 심사자의 시선을 크게 끌진 못했을 겁니다.
시인은 앵무새의 종류를 찾아봤겠죠. 그러다가 ‘카카리키’를 찾아냈을 겁니다. ‘카카리키 앵무’, 적고 보니 일단 좀 있어 보입니다. 심사자 역시 그냥 앵무새라고 했을 땐 자신이 흔히 아는 새라고 가볍게 넘겼을 테지만, ‘카카리키 앵무’라고 하니 어떤 종류인지, 슬쩍 호기심이 갔을 겁니다. 그래도 명색이 심사잔데 검색해 봤을 겁니다. 일단 시는 제쳐두고, 카카리키로 검색해서 알게 된 깃털의 이미지라든가, 색깔이라든가 그런 것들을 알게 됐을 테고, 그런 심상은 자연스럽게 시로 투영됐을 겁니다.
제가 서두에서 얘기했듯이 신춘문예 당선작치고는 좀 심심한 편이긴 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작품을 소개한 까닭은 이런 스타일의 시는 다시 응모해도 당선될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앞 문단에서 언급한 것처럼 심사자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미 카카리키 앵무새의 활달함이나 습성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 새를 창살에 가둔다는 건, 심사자가 익히 알고 있는 억압보다 몇 배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단언컨대, 신춘문예는 누가 더 신박한 아이디어를 내느냐의 경쟁입니다. 좋은 작품요??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심사자로 하여금 좋은 작품이라고 느끼게 만드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같은 말이래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 아시죠? 어차피 네 개의 연이 다 같은 형식이니까 1연만 예로 들겠습니다.
"조용히 우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주전자 물 끓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미풍에 머리카락 날리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창문보다 낮게 목소리를 죽이는 아이, 이웃집엔 중문도 방음벽도 없단다 얌전히 울면 해바라기 씨를 가득 줄 테야"
보세요. 다른 연도 모두 마찬가지로 이 시의 기본적인 형식은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 가둔다 – 가둔다 – 아이 – 없단다 - 줄 테야"입니다. 여기서 만약 ‘줄 테야’가 아니라 ‘준다’, 혹은 ‘주겠다’로 쓰면 느낌이 어땠을까요? 그리고 –다, 로 끝나는 문장 뒤에 한번 쉬어가듯이 명사형 –아이, 로 호흡을 한 템포 끊어가지 않고 계속 –다, 형식으로 했다면요?
이 점이 제가 작품을 소개하면서 늘 강조하는 시의 형식입니다. 이런 표현이 이른바 ‘말맛’을 만들고, 언어적 리듬을 만들거든요. 그래서 이번 작품처럼 해석이 어렵지 않을 때는 어떤 형식으로 써나갔는지 살피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자면 우리가 시를 쓸 때 조사 하나를 두고도 넣을지 말지 고민해야 한다는 겁니다. 작가 김훈도 그의 작품 『칼의 노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에서 원래는 “꽃은 피었다”로 시작하려 했으나, 결국 담배 한 갑을 피워가면서 고민한 결과 “꽃이 피었다”로 고쳤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긴 소설에서도 이럴진대 짧은 시에서 조사의 역할은 전체 시의 분위기를 바꾸기에 충분합니다. 어쩌면 이 작품을 쓴 시인도 ‘카카리키 앵무’로 할까, ‘카카리키 앵무새’로 할까 고민 좀 했을 겁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신춘문예에서 제목은 작품의 절반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심사자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세요. 그러면 심사자는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봐줄 겁니다.
덧 - 제 생각에 ‘통닭과 치킨’이라는 제목도 괜찮지 싶네요. 통닭이 시골스럽고, 미개발지고, 서툴고, 첫사랑이고, 경험 많은 노인이라면, 치킨은 도시적이고, 역세권이고, 닳고 닳은 사랑이고, 연약한 청춘이라는 이미지, 아마도 연배가 좀 있는 심사자라면 ‘통닭’에 눈이 갈 것이고, 젊은 축에 든다면 ‘치킨’에 눈이 가겠지요. 어쨌든 심사자의 인식 밖에 있는 그 나머지에 대해 쓰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2020 경향신문 당선작 ‘세잔과 용석’처럼 신춘에 도전해 볼만한 제목입니다. 한번 해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