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 비평 / 이현아
비평
그곳에서 나는 연극배우였다. 이 연극에는 미친 사람들만 출연했고 그들은 돈이나 죽음이나 직업이나 생활 같은 것 모두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울거나 웃었고 갑자기 화를 내기도 하였으며, 그러므로 이 연극에는 극단적으로 화합만이 존재하거나 갈등만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 연극에는 대본이 있다.
이 연극에서 어떤 미친 사람은 단 한 권의 책만 읽었다. 그 책은 책자처럼 아주 얇았고 책 읽는 사람은 책을 다 읽으면 거꾸로 뒤집어서 다시 읽었다. 그는 책을 읽다가 가끔 노트에 뭐라고 끄적이기도 하였는데 절대 자기 노트를 보여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면 노트의 페이지를 찢어서 먹어버렸다.
극의 중반부에서 나는 미친 사람들과 춤을 춘다. 이것은 대본에 있는 내용이고 음악이나 인디언 분장이나 북소리 같은 것은 없다.
(미친 사람처럼 자유롭게 춤을 추시오.)
다들 몸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고 누군가는 바닥을 굴렀다. 넘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 춤을 추다가 나를 때렸고 나는 분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개 많은 관객은 우리의 율동이 만들어내는 거대하고도 불규칙한 운동에 집중하였으나
그날, 그 사람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오랫동안 응시하다가 시선을 거두고 들고 온 수첩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부터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지를 갑자기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소리를 지르고 가슴을 주무르고 문질러도 나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것 같았고
오로지 수치심만을 느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연극배우 일을 그만두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몇 번이고 미친 사람이 되고자 집에서도 바닥을 기고 머리를 쥐어뜯고 그것을 먹어보기도 하였지만 내가 연기하는 미친 사람은 나를 설득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역류성식도염에 걸린 환자였다.
그러나 관객을 연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 옆에 앉은 누군가 작게 웃으면 나도 작게 웃었고, 사람들이 크게 웃으면 나도 크게 웃었다. 눈물을 흘리면 조용히 했다. 지루한 표정을 지으면 눈을 가늘게 떴다. 연극이 끝나면 극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면 되었고 누군가 감상을 물으면 "옛날 생각이 나더구"이라거나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 대답하면 되었다.
동조할 수 없는 관객도 있다. 지금 내 옆에 앉은 사람은 감동하지도 웃지도 따분해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장면은 보지도 않고
리플릿만 읽어대거나 고요하게 무대의 배우들을 관찰하고 노트를 꺼내 무언가 적고만 있다.
내가 노트를 슬쩍 훔쳐보려고 하자 그는 노트를 찢었고
그것을 구겨서 한입에 넣었다. 그는 얼굴이 새빨개진 나를 보고 종이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저 좋아하세요?
2024 제31회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몇 마디를 얹기 전에 시 두어 편을 더 올릴 테니 귀찮더라도 마저 읽어보세요.
지루하진 않을 겁니다.
계속 / 이현아
나는 천국에 있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물고 빨거나 혼자 있었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과 사랑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신이 주었다.
신은 나에게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고
집에서 혼자 책만 읽는 당신과
물고 빨고 함께 잠들고 싶었다. 당신은 언제나 조금 외로워 보였으므로 그런 당신을 내가 위로해주고 싶었다. 당신의 집에 얹혀살고 싶었다.
그래서 당신 집 근처만 얼쩡거리다가
천국에서 쫓겨났다.
내가 깨어난 곳은 개미굴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일개미였고 가지고 있는 언어가 없어서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위험을 무릅쓰고 외출했고 설탕을 가지고 개미굴로 돌아올 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살다가 누군가의 발에 밟혀 죽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천국으로 돌아왔고
당신은 이곳에 없었다.
나는 신을 만나서 당신을 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이곳이 사랑과 사랑 아닌 것으로 구분되던 시절 있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천국에서 결핍을 채우고 다시 태어났다고 했다. 몇몇은 지옥에 갔다고 했다.
왜요? 이유를 묻자
신은 대답 대신 내게 당신을 보여주었다.
당신은 개미굴에 있었다.
여왕개미가 되어 설탕만 계속 먹고 알만 계속 낳았다.
순 사기로군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신이 나를 밀었고
나는 사탕으로 태어났다.
천국 / 이현아
1
내 친구는 신을 만나러 갔다.
교회나 성당이나 절로 간 것은 아니고 아마 인도나 지옥으로 갔을 것이다. 아니면
일본이나 미국으로 갔을 수도 있고.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위해 신을 만나러 가는 것 같은데
내 친구는 신에게 맞은 적도 있고(물론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다) 신이 매번 친구를 괴롭히는 사람을 대신 용서해주었기 때문에
그를 아주 없애러 갔다.
나는 친구를 응원하고 있다.
신이 없으면 재수없는 사람들도 없어질 것이고
세상이 좀더 합리적으로 변할 것이며
우리도 용서라는 걸 가져볼 수 있을 테니까,
네가 모험을 떠난 지 칠십 년이 지났지만
2
있지, 나 말이야.
비가 아주 많이 와서 수몰된 마을
개집이 있고 지붕 위에 올라간 개를 상상했어.
물은 점점 더 차오르고
개 옆에는 천사가 도착했어.
천사는 개를 설득해서 천국으로 데려가려고 했고
개는 천사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어.
당연하지. 그 개는 너랑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개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천사를 설득할 줄 알았어.
결국 천사는 화를 내면서 돌아갔고
폭우랑 개만 남았어.
목 끝까지 물이 차오르게 되자
다행히 목줄이 헐거워졌고
개는 수영해서 어딘가로 사라졌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몰라.
넌 그 개가 살았으면 좋겠어?
난 그 개가 살았으면 좋겠어.
3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가
친구가 내 귀에 속삭였다.
"쟤가 걔야."
우리는 깔깔 웃었고
손을 잡고
가던 길 갔다.
여러분은 이 작품을 읽고 첫 느낌이 어땠나요? 가령 ‘비평’을 읽으면서 이게 수필이지, 시야? 그런 생각이 들진 않았나요? ㅎ 추가한 또 다른 작품 두 편 같은 경우에도 시라기보다는 왠지 난센스퀴즈나 콩트를 읽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나요?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시인이 있었는데 고선경 시인(28)입니다. 고선경 시인은 일전에 소개한 2022 조선일보 ‘럭키슈퍼’로 등단한 MZ세대랍니다. 제가 그녀를 떠올린 까닭은 등단작 ‘럭키슈퍼’를 좀 더 길게 쓰면 바로 오늘 소개한 이런 스타일이 아닐까 싶어섭니다.
고선경 시인은 2022년 신춘으로 등단한 후 이듬해 10월에 첫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를 『문학동네』에서 냅니다. 무려 16쇄(3만 부쯤)를 찍었으니 시집 시장에선 이례적인 판매 부수입니다. 그리고 올 초에는 출판사 『열림원』이 새롭게 시인선을 시작하면서 고선경 시인을 001번으로 그녀의 두 번째 시집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을 펴냈습니다. 그리고 최근엔 그녀의 첫 산문집이 역시나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고요. 2022년 신춘으로 등단한 시인이 짧은 기간에 메이저 출판사에서 시집 두 권, 산문집 한 권을 낸 셈이죠. 그러니 일단… 많이 부럽습니다. 이렇게 내고도 이제 겨우 28세라니, 과연 문단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MZ 시인답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에도… 고선경의 시집이나 오늘 소개한 작품을 읽을 때면 왠지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네요. 이런 마음이 나이에 따라붙는 꼰대 기질인지 모르지만, 확실히 시가 가벼워도 너무 가볍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건 정말이지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살아낸 청춘과 그들이 살아내는 청춘은 분명 다를 테니까요. 이래서 꼰대가 되나 봅니다.ㅎ 앞으로 열심히 쓰면서 극복해야겠지요.
자본주의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움직입니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는 법이죠. 그렇다면 오늘날 MZ세대로 불리는 이들 세대가 원하는 시는 어떤 종류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고선경 시인을 검색해 보면 각종 블로그에서 시가 너무 좋다고 칭찬 일색입니다. 시가 어려운 줄 알았는데 시가 이런 거라면 나도 앞으로 시를 써보고 싶다는 글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김혜순 시인의 시집을 보여주면 이런 반응이 나올까요? 절대요. 네버 네버 네버입니다.
어떤 독자는 제법 다른 생각을 적었던데 의견이 이랬습니다. “고선경 시인이 10년이 지나도 지금처럼 인기가 있을까? 묻더군요. 자신이 읽어본 고선경 시인의 시는 젊음을 빼면 남는 게 없을 거라나요.ㅎ 나이 많은 저로서는 일단 위로가 되면서 조금 진정이 되더군요.
8~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외국 여행을 하는 청춘들의 대답으로 그럴듯한 말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라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 세대는 자기 자신을 찾는 것보다 대개가 명품구매나 음식점, 카페, 여행지, 공연장, 쇼핑몰 등 트렌디한 핫플레이스가 목적일 뿐입니다. 영상 세대인 그들에게 시는 난센스퀴즈처럼 간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깔깔깔 웃을 수 있는 포인트가 있어야겠죠.
그런데 이게 또 은근히 어렵습니다. 별 깊이는 없어도 그냥 한 번쯤 생각하게 만들거든요. 좋게 말하면 기발한 발상인데, 나쁘게 말하면 말장난에 다름 아니죠. 그런 점에서 문학동네는 시류를 잘 읽는 자본주의 출판사답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저를 포함한 연식이 된 사람이 쓰는 진지한 시는 젊은 세대들에겐 먹히지 않는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죠.
그래도 이런 시를 읽으면 재밌긴 합니다. 우리가 한번 읽고 바로 이해되는 전통 서정시와는 다르게 읽는 재미가 있거든요. 어쩌면 오늘 소개한 시인도 고선경 시인처럼 빠른 시간 내에 문학동네에서 첫 시집이 나올 것도 같네요.
오늘 소개한 시는 여러분들이 그냥 읽으면 됩니다. 어렵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쉽게 읽힐지라도 담고 있는 내용은 깊습니다. ‘비평’의 경우, 타인의 시선과 인간의 자유, 연기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말하는 작품입니다. 화자는 ‘미친 사람’을 연기하며 극한의 자유와 광기를 체험하지만, 수첩에 무언가를 적는 관찰자의 시선 앞에서는 더 이상 미친 사람처럼 행동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연기된 자유와 진짜 자유, 관찰과 참여, 인간의 욕망과 사회적 규범 사이의 긴장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에 “저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은 이 시에서 각성을 일으키는 한방에 해당합니다. 관객으로서의 관찰과 관계, 평가와 인간적 욕망 사이의 미묘한 경계를 드러내거든요. 그런 점에서 ‘비평’은 제목도 딱 맞춤이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좋습니다.
시는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형식으로 표현하는가에 달렸습니다. 스마트한 시, 감각적인 시를 써봅시다. 누구나 다 아는 슬픔을 누구나 다 아는 정서로 누구나 다 아는 말로 쓰지 맙시다. 구질구질한 감정의 찌꺼기로 짜내는 눈물이 아니라, 차라리 깔끔하게 펑펑 울어대는 그런 시를 써봅시다. 슬픔도 당당하게 자랑하는 그런 시를 써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