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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 이기리

by 최형만

마침내 친구 뒤통수를 샤프로 찍었다


어느 날 친구는 내 손목을 잡더니

내가 네 손가락 하나 못 자를 것 같아?

커터 칼을 검지 마디에 대고 책상에 바짝 붙였다


친구는 나의 손가락을 자르지 못했다

검지에는 칼을 댄 자국이 붉게 남았다


내 불알을 잡고 흔들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유리문에 비쳤다


엎드려 자고 있을 때

뒤로 다가가 포옹을 하는 뒷모습으로

옷깃을 풀고 가슴 속으로 뜨거운 우유를 부었다


칠판에 떠든 친구들을 적었다

너, 너, 너

야유가 쏟아졌다

지우개에 맞았다


불 꺼진 화장실에서 오줌을 쌀 때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손아귀가 커졌고

천장을 뚫고 들어오는 수십 개의 검지가 이마를 툭툭


종례 시간이 끝나도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나를 끌어안았다

선생님에게 장래 희망을 말했다


저녁을 먹고 혼자 시소를 타면

하늘이 금세 붉어졌고

발끝에서 회전을 멈춘 낡은 공 하나를

두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진흙이 지구처럼 묻은

검은 모서리를 가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건

세상으로부터 주파수가 맞춰지는 느낌

이제 다른 행성의 노래를 들어도 될까


정말 끝날 것 같은 여름


구름을 보면

비를 맞는 표정을 지었다




2020 제39회 김수영문학상 대표 당선작




문학상 수상작을 소개하려고 이것저것 뒤적이는데, 눈에 확 드는 작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개의 OO 문학상이라는 게 일정 부분 주제가 정해져 있는 터라, 저 역시 좀 답답한 느낌이었고, 독자로서도 흥미가 동할 것 같지 않더군요. 그래서 오늘은 제39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이기리 시인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김수영문학상 수상작은 대체로 어렵거나, 아니면 새로운 형식이라는 이유로 실험적인 작품이 다수 존재하기에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독자의 시선으로 봐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이기리 시인은 김수영문학상이 제정된 이래로 등단하지 않은 사람이 당선된 유일한 사례라고 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작품이 더 마음에 와닿은 게 아닐까 싶네요. 단정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저는 가끔 등단자들이 시를 어렵게 써야 뭔가 있어 보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시 한 편의 사유가 아무리 깊다 한들 뭐 얼마나 대단할까요. 저는 가끔 스스로도 이렇게 자학 아닌, 자학을 일삼습니다.ㅎ




이제 시를 한번 봅시다. 제목이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웃음’은 누구의 웃음일까요? 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시 속에서 웃음은 대체로 폭력과 조롱의 상황에서 등장합니다. 친구들이 신체를 희롱하며 웃고, 교실에서 집단적으로 야유하며 웃고,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폭력이 웃음과 결합합니다. 즉, 이 웃음은 따뜻하거나 순수한 웃음이 아니라, 폭력과 결탁된 웃음인 셈입니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그 웃음’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폭력에 노출된 아이가 살아남는 방식일 것이며, 그 웃음을 ‘낯설게’ 끌어안아 새로운 웃음으로 바꾸려는 역설적 표현일 겁니다. 시의 전반부가 직접적 폭력과 조롱이라면, 중반부인 ‘불 꺼진 화장실~’부터는 불안이 환각적 이미지로 증폭됩니다. 고통이 단순히 회상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언어가 만들어낸 초현실적 장면으로 바뀌는 거죠. 여기서부터 고통이 ‘언어 실험’으로 변환되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는데 후반부인 ‘저녁을 먹고 혼자 시소를 타면~’부터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이동합니다.


폭력의 구체적 묘사는 사라지고, 우주적 이미지, 다른 세계의 노래 같은 추상적·상상적 언어가 펼쳐집니다. 이는 고통의 기억을 끌어안되, 전혀 다른 차원의 언어로 옮겨가는 과정인데요. 그래서 이 시를 전체적으로 정리하면 폭력의 공유·모방에서 → 환각적 이미지 변환(화장실 장면) → 우주적 확장(다른 행성의 노래)으로 이어지면서 ‘고통’이라는 주제가 어떻게 언어실험으로 전환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열흘 뒤면 곧 추분입니다. 추분은 춘분과 마찬가지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절기죠. 제가 오늘 이 작품에 꽂힌 까닭이 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허리 통증에 산책이라도 하면 나아질까 싶어 아파트 주변을 배회하는데 아주 잠깐 빗방울이 흩날리다 그치더군요. 본문에 나오는 아래 구절처럼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건

세상으로부터 주파수가 맞춰지는 느낌

이제 다른 행성의 노래를 들어도 될까


정말 끝날 것 같은 여름


구름을 보면

비를 맞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특별히 여름을 좋아하는 건 아닌데, 에어컨도 없는 제가 올 여름은 유난히 좋아했습니다.

어쩌면 이 여름이 영원하기를 바랄 만큼요.


이제는 ‘정말 끝날 것 같은 여름’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J0F-xNso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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