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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흙의 상소문 / 배은율

by 최형만

말 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싶을 때 흙은 붓을 들어 상소문을 올린다

얼마 전 흙속에 이름 모를 시체가 암매장 당한 적이 있다

이럴 때 흙은 운다, 울음이 붓을 키운다


흙이 밀어올린 나무나 풀들은 보이는 붓이지만 아지랑이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붓도 있다 그러나 보이는 붓보다 보이지 않는 붓의 힘이 더 세다


오래 전에 흙은 붓을 들어 낯빛이 다른 계절들이 서로의 낯빛을 훔쳐 달아난다고 쓴 적이 있다 이런 글은 기상이변이나 전쟁이 났을 때 쓰는 글이다 이럴 때 붓은 투박한 땅의 문체로 겁 없이 흙의 상소문을 쓴다


이따금 꽃가지들마다 이슬이 옮겨 앉는 일, 톡톡 터지는 이슬방울에 볼과 볼을 서로 맞대느라 바람이 물빛 아침을 잊곤 하던 일을 기억하기 위해 땅은 붓을 들기도 한다 이럴 때 붓은 새의 귀에도 들릴 듯 말 듯 바위 틈 살꽃들의 신음소리처럼 섬세하게 글을 쓴다


하루를 건너온 빛바랜 기억들이 제 생각의 부피를 키우는 동안, 땅은 붓을 들어 날마다 흙의 상소문을 올린다


흙이 상소문을 올리는 곳은 바람이 오가는 허공이다

허공에는 수많은 소문이 살고 있다

그래서 붓은 늘 분주하다



2025 전라매일 신춘문예 당선작



바야흐로 신춘문예 공고가 올라오는 신춘의 계절입니다.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열병을 앓는 문청들에게 이 계절은 가을도 아니고, 뭣도 아닌, 마냥 피가 마르는 계절일 겁니다. 아래는 심사평입니다.


“「흙의 상소문」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미시의 세계, 이는 불교의 공즉색의 세계와 양자역학의 입자와 파동 그리고 질량·에너지 등가법칙과도 동맥을 이루면서 우주적 비의를 새롭게 읽어내고 있었다. ‘흙이 상소문을 올리는 ~허공에는 수많은 소문이 살고 있다’는 경이로운 표현이 그것으로 우리들의 정신세계를 한층 드높여 주고 있어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언 김동수)”


그럼 시를 보기 전에 심사평을 잠깐 들여다봅시다. 심사자는 평에서 불교의 공즉색, 양자역학의 입자와 파동, 질량·에너지 등가법칙, 우주적 비의를 언급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압니다. 이런 평은 심사자로서의 평일뿐, 화자의 의도는 아니지 않을까~ 라는 걸요. 그러니 이런 평을 보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죠.ㅎ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소개한 작품을 읽은 분이라면 작품을 올리는 저 나름의 기준을 알 겁니다. 시기와 관계없이 언제든 다시 응모하더라도 당선권에 들 만한 작품이 기준이라는 걸요. 하지만,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솔직히 그런 제 개인적 기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소개하는 까닭은 이런 식의 다소 평범(?)해 보이는 작품이 왜 당선됐는지 그걸 말하기 위해섭니다. 더불어 그 평범함 속에서 심사자는 무엇을 봤을지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혹자가 보기엔 그래도 엄연히 당선작인데 시작부터 너무 깎아내리는 게 아니냐고, 나아가 너는 얼마나 잘 쓴다고 이러냐 싶을 겁니다. 맞습니다. 저 역시 여전히 시를 쓰는 게 어렵습니다. 어려워서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까 싶어 밤낮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합니다. 덕분에 조금은 시를 보는 눈이 트였고, 특히 현대시에 있어서는 나름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뤘다고 자부합니다.


당선작을 올려놓고 제가 너무 까는 소리만 해댔네요.ㅎ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목에 칼이 들어오지 않은 이상, 저는 할 소린 해야만 하는 성격이거든요. 사실 칼이 아니라 나무 꼬챙이만 들어와도 저는 끽소리도 못 할 위인이긴 합니다. 아픈 건 질색이거든요.


만약 제가 이 시를 썼다면 저는 일단 ‘그러나’, ‘그래서’ 같은 접속어는 가급적 피했을 겁니다. 그리고 제목 포함해서‘상소문’을 다섯 번 쓰거나 ‘이럴 때’를 세 번 쓴다거나 ‘허공’이나 ‘낯빛’을 두 번씩 쓰진 않았을 겁니다. ‘빛바랜’, ‘꽃’, ‘이슬’, ‘소문’ 같은 조금은 식상한 시어를 쓰지도 않았을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체로 끝맺지도 않았을 겁니다. 어디까지나 제가 썼다는 가정에서 그렇다는 말이니 오해 없으시길요.


그럼에도 이 작품이 당선작으로 뽑힐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당연히 심사자가 보기에 이보다 나은 작품이 없어서겠죠. 그럼, 심사자는 이 시의 어떤 점을 좋게 봤을까요? 서두에 소개한 심사평은 당선작으로 뽑았으니까 격식(?)에 맞게 서술해야 하니 그랬을 뿐이라고 한다면, 심사자가 정말로 이 작품에서 발견한 장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읽듯이 담담하게 말하는 담백함이랄까요? 심지어 ‘흙은 운다’, ‘살꽃들의 신음소리’와 같은 감정적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슬프지 않다는 겁니다. 왜 그런 거 있죠? 사람이 너무 화가 나거나 슬프면 오히려 차분해진다고요. 이 시의 매력은 그런 담담함에 있습니다. 시적 화자는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관찰자적 시점에서 옆집 사람의 일을 기록하듯 서술합니다.


이런 객관적 시선을 끝까지 유지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다름 아닌, 모든 문장을 다, 체로 가져갔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만약 한 두 문장이라도 ~까, ~지, 로 마무리했다면 어떻게든 화자의 감정이 드러났을 테고, 그랬다면 앞서 제가 단점으로 지적한 동일한 시어의 반복도 걸리적거리는 표현으로 비춰졌을 겁니다.


‘상소문’이라는 것은 다들 아시다시피 조선시대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청원서이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심사자는 제목만 보고도 이 시가 무엇을 말할지 어느 정도 짐작했을 겁니다. 사람이 올리는 상소문을 흙이 올린다는 걸로 보아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자연이 인간에게 전하는 생명의 언어이자 경고쯤 되겠구나, 하고요. 특히 ‘흙’이라는 것은 생명을 키우기도 하지만, 죽음의 종착지라는 점에서 오늘날 도처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기상이변을 모두 아우르기엔 딱이었겠죠. 그러니 자연(흙)은 우리네 삶의 온갖 고통과 아름다움을 대신하고 있다는 게 이 작품의 주제인 셈입니다.


오늘 제가 이 작품을 소개한 이유는 그래섭니다. 다는 아니겠지만, 신춘문예는 거대 담론보다는 이처럼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리듬에 초점을 맞추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고, 또한 차분한 진술이 오히려 비극의 깊이를 더한다는 걸 이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싶어섭니다. 그리고 제가 앞서 언급한 글에서 만약 나라면 동일 시어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 역시 작품을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는 걸 실제 사례로 보여주고도 싶었고요.


이 작품에서 시어의 반복은 단조로움이 아니라 시에 리듬을 부여했거든요. 즉, “땅은 붓을 들어 날마다 흙의 상소문을 올린다”라는 식의 반복적인 세계관을 시어의 동일성으로 구현했달까요. 따라서 ‘허공’이라는 시어 역시 대개의 허무함이 아니라, 흙의 상소문이 ‘전달되는 통로’이자, 인간이 닿지 못하는 세계로서의 분명한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이는 심사자가 평에서 언급한 ‘보이지 않는 미시의 세계’가 허공임을 말하는 거겠고요.


결론적으로 이 작품이 당선작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상소문임에도 불구하고 슬프지 않다는 것, 그 담담함이 화자가 관찰자로서 감정을 배제해서가 아니라, 감정까지 초월한 담담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담담한 기술은 어떤 형이상학적 장치나 설명보다도 훨씬 정직하다는 걸 이번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흙이 올린 상소문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 침묵의 붓끝을 통해, 자연과 존재, 그리고 인간의 책임을 다시 읽게 된다는 게 이 작품이 말하고자 했던 바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니 서두에서 언급한 만약에 나라면~ 은,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고 화자의 의도된 선택으로 봐야겠지요. 다행히 심사자가 담담함 속에서 비극의 깊이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탁월한 평인 듯합니다.



여러분의 신춘을 열렬히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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