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인족
안데르센의 공간에서 태어난 거지
오빠는 속눈썹이 가지런했다 컨테이너박스를 잠그면 매일 같은 책을 집었다 모서리가 닳아 꼭 소가 새끼를 핥은 모양이었다 동화가 백지라는 걸 알았을 땐 목소리를 외운 뒤였다 내 머리칼을 혀로 넘겨주었다는 것도
내 하반신이 인간이라는 문장
너 알고 있으면서 그날의 구름을 오독했던 거야
동화가 달랐다 나는 오빠의 방식이 무서웠다 인어는 풍성한 머릿결이 아니라고 아가미로 숨을 쉬었기에 키스를 못한 거라고 그리하여 비극이라고
네가 하늘을 달린다
팽팽한 바람으로
구름은 구름이 숨 쉬는 것의 지문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누워서 구름의 생김새에 대해 생각하다가 노을이 하혈하는 것을 보았다 오빠는 그 시간대 새를 좋아했다 날개가 색을 입잖아, 말하는 얼굴이 오묘한 자국을 냈다
사라지는 건 없어
밤으로 스며드는 것들이 짙어가기 때문일 뿐
오빠에게 오빠의 책을 읽어준다 우리가 읽어냈던 구름을 베개에 넣으니 병실 속 꽃처럼 어울린다 영혼이 자라는 코마의 숲에서 알몸으로 뛰는 오빠는 언제나 입체적이다 책을 태우면서 연기는 헤엄치거나 달리거나 다분히 역동적으로 해석되고
젖은 몸을 말리지 않은 건 구름을 보면 떠오르는 책과 내 사람이 있어서라고
너의 숲에서 중얼거렸어
2017 『시인동네』 수상작
故 김희준. (2020).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34쪽)
오늘 소개할 작품은 시를 좋아하는, 그리고 아주 많이 사랑하는 분이라면 다들 아시는 김희준 시인의 등단작 중 대표작입니다. 이제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는데요. 다들 12월, 잘 보내고 계신가요? 아니겠죠.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평범한 직장인일 때는 결코 알지 못했던 순간이 12월이니까요. 맞아요. 신춘의 당락으로 누군가는 기뻐할 테고, 누군가는 다시 빈손일 테니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써야 합니다. 김희준 시인이 그렇게 일찍 별이 되지 않았다면 그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차가운 바람을 느껴봐, 이 바람이 다 지나면 또 봄은 올 거야.”라고요.
이제 그녀의 작품을 보겠습니다. 2017년이면 제가 직장인으로서의 마지막 해였고, 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을 시기였으니 아마도 그때 이 작품을 읽었다면 내용뿐만 아니라 제목에서 어떤 감흥도 받지 못했을 겁니다. 머메이드도 그렇고, 읽어낸다는 표현도 그렇고, 방식도 그래요. 그렇게 모여서 지어진 「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 시는 제목부터 시작한다더니, 과연 그렇습니다.
머메이드는 인어를 뜻하는 ‘Mermaid’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머메이드 구름’은 인어처럼 물 위를 떠다니거나, 신비롭고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구름을 시인이 상상력으로 표현한 거겠죠. 참고로 그녀의 시는 몽환적이고 감각적이기 때문에 처음 읽을 때는 난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시를 짓는 그녀의 감정을 따라가보시길요. 그러면 우리가 구름을 보면서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처럼 그녀의 시도 윤곽을 드러낼 겁니다.
그녀에게 오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오빠와의 기억을 반인족(상상과 현실)을 매개체로 오가며 삶과 죽음을 풀어냅니다. 그녀의 다른 작품에서도 저는 자주 ‘죽음’의 이미지를 만나는데 그녀가 그려내는 죽음은 육체적 죽음뿐만이 아니라, 상실을 통한 성찰과 성장을 보여주는 시적 장치로 작용하죠.
시를 해석(?)하면서 한 문장씩 독해하는 습관을 버린다면 시 속에서 화자는 구름, 동화, 오빠의 책 같은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죽은 오빠가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머메이드 구름”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상상과 기억 속에서 오빠와 화자가 계속 연결되는 매개체겠죠.
결국 이 시는, 죽음과 상실의 슬픔 속에서도 기억과 상상을 통해 이어지는 사랑과 존재의 지속을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언제나 말했듯 표현의 ‘형식’입니다. 화자는 어디 한 군데에서도 오빠의 부재를 슬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화가 달랐다 나는 오빠의 방식이 무서웠다 인어는 풍성한 머릿결이 아니라고 아가미로 숨을 쉬었기에 키스를 못한 거라고 그리하여 비극이라고’ 말한 것처럼 화자는 오빠의 방식과 어린 시절의 판타지를 비극이라고 하거든요.
“사라지는 건 없어, 밤으로 스며드는 것들이 짙어가기 때문일 뿐.”
이 시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구를 꼽는다면 아마도 이 구절이 아닐까 싶네요. 시 전체가 죽음, 상실, 기억, 존재의 지속을 다루고 있는데, 이 한 줄이 죽음을 단순한 끝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 이어주거든요. 오빠의 죽음, 어린 시절의 기억, 머메이드 구름, 동화 속 비극 등 모든 이미지가 결국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스며드는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나머지 몽환적·감각적 이미지들은 모두 이 시구를 풀어내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故 김희준 시인 (1994~2020) …
시인의 이름을 쓰면서 앞에 ‘故’를 붙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많이 망설였습니다. 1994년생인 그녀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다른 방식으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별에서 함께 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