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신춘의 열병도 이제 끝나고 다시 1월입니다. 정확히 1년 전 이맘때만 해도 계엄 정국으로 온 나라가 혼란의 도가니였는데 시간은 꾸역꾸역 흘러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요즘입니다. 신춘의 열기 또한 계엄의 고비를 지나선지 신문사마다 기록적인 응모였고요.
우선 당선되신 분들에겐 축하드립니다. 또한 아깝게 최종에 그친 분들께도 수고하셨다는 말씀드립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당선작과 최종심에 오른 작품을 비교하면 그리 큰 차이도 없을 겁니다. 오히려 최종에 그친 자신의 작품이, 혹은 최종에 오르지 않았어도 자신의 작품이 당선작보다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눈이 어두워 좋은 작품임에도 본심에 올리지 못한 예심 심사자를 탓하든, 자신의 취향에 따라 당선작을 선한 본심 심사자를 탓할 수밖에요.ㅎ 다들 최선을 다했을 테니 며칠은 그렇게 남 탓을 좀 해봅시다. 그래야 또 2027 신춘을 향해 달려 나갈 힘이 생길 거 아닙니까.
하루에 몇 편씩 조금씩 읽어나간 시 부문 당선작에 대해서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해보자면 좀 많이 아쉬웠습니다. 기록적인 응모였기에 너무 큰 기대를 해서겠지요.
한국일보의 ‘고해성사’를 읽으면서 중앙지와 지방지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고요. 매일신문의 ‘물왕저수지’는 그동안 보여준 매일신문의 격과는 어울리지 않는달까요. 반면 부산일보 ‘셰어 하우스’는 지방지 당선작이라고 보기엔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동아의 ‘디아스포라’나 경향의 ‘졸업반’은 익숙한 소재지만 표현의 형식이 좋았습니다. 세계일보의 ‘크린토피아’는 마지막에 가서 붉은 혈관들이 지도처럼 돋는다는 결말이 예상 가능해서 평이했고요. 조선일보 ‘조금 늦었지만 괜찮아’는 응모작이 많이 모여선지 제목도 감각적이고 작품도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당선작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게 볼썽사납기도 하겠지만, 서울신문 ‘묘사의 밀도’는 제가 잘못 해석하지 않았나 싶어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지만, 오히려 확신하기에 이르렀네요. 영남일보 ‘백지와 백기’를 읽으면서는 당선자의 연배로 보나 작품성으로 보나 지난날 세계일보 ‘비 오는 날의 스페인’을 쓰신 이신율리 시인이 떠올랐습니다.
서울신문 '묘사의 밀도' 개인적 감상평
"보이는 것에 대한 묘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선언이 너무 자주, 너무 노골적으로 반복되다 보니 의미를 심화시키지 않고 호흡을 막는 느낌입니다. 금욕을 예로 든다면 미학적 금욕이어야 하는데 금욕을 과시하는 느낌이랄까요. 회오리–숨–공간–외곽–중앙의 이미지가 초반에는 흥미롭지만 전개의 과정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체류하는 느낌입니다. 그러다 보니 독자로서는 새로운 감각을 얻지 못해 피로(혹은 무료)해지기도 할 듯. 그런 점에서 이건 밀도의 문제가 아니라 압축 실패에 가까워 보입니다.
제가 알기로 시에서 반복이 살아 있으려면 의미가 미세하게라도 변형되거나 정서의 방향이 꺾이거나 문맥이 뒤집혀야 하는데 그 점에 있어서도 반복적인 진술은 주문이 아니라 설명이 되니 주술적 긴장을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독자를 설득하려는 태도로 읽히기도 합니다. 분명히 사유를 많이 한 작품이긴 한데... 아이디어는 하나고, 그 아이디어를 검증하기 위해 너무 많은 반복과 설명적 어휘가 이어지니 독자로서는 시가 나를 데려가야 하는데 화자가 자기 생각을 끝까지 말하려는 느낌도 드네요.
그럼에도 이 작품이 당선작으로 뽑힌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심사자가 화자의 메타적 언어 감각을 지나치게 과신했거나 ‘묘사 거부’라는 반복적 진술의 함정에 빠졌거나, 과학적 은유를 끌어오는 신선함이 시를 알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심사평에서 결코 고작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서 저는 이 시가 탁월해서라기보다 안전하게 '현대적'이기 때문에 뽑힌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이 한 편의 완결된 시라기보다 한 개의 생각을 늘여 쓴 기록에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치열한 난상토론까지는 아니더라도 대개의 심사평마다 만장일치로 선정했다는 말이 저는 왜 암울하게만 느껴질까요.
이렇게 시 감상평을 남기고 끝내자니 신춘이라는 무게감에 비해 어쩐지 좀 아쉽기도 합니다. 이럴 때 딱 어울리는 말이 ‘할많하않’이겠네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게 심사평 쓰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거든요. 언젠가 쉬어가기 코너에서 제가 당선작의 심사평을 그대로 가져와 탈락의 사유로 언급한 적이 있을 겁니다. 예를 들자면 거칠고 투박하지만 신인의 패기를 믿어보기로 했다는 당선 사유가, 거칠고 투박하여 아직은 꽃을 피우기엔 이르다고 판단했다는 탈락 사유가 되기도 하는데요. 이는 제가 만든 말이 아니라, 당시 A와 B 신문사의 심사자가 거칠고 투박함을 두고 정반대의 견해로 한쪽은 당선, 한쪽은 탈락이라는 결정을 내렸기에 했던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써야만 합니다. 최선을 다했던 만큼 실망도 큰 법이라 다시 시작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압니다. 어쩌면 두어 달이 지나야 신춘의 아쉬움에서 놓여날지도요. 시간은 또 꾸역꾸역 흘러갈 겁니다. 새해가 엊그제였는데 벌써 3월이라느니, 5월이라느니, 절반이 갔다느니… 하면서요. 살아보니 시간만큼 무상한 게 또 있을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부쩍 듭니다.
엉뚱한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저는 요즘 점심, 저녁 식후에 빠르게 걷기 운동 중인데요. 그냥 걸으면 재미없으니까 내가 잘 아는 사람 한 명을 정합니다. 그게 친구든, 지인이든, 가족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간에요. 그리고 내가 걷는 걸음 수가 그 사람의 수명이라고 생각하면서 걷습니다. 저는 일단 어머니를 떠올리죠. 88걸음을 걸으면 지금 어머니 연세니까, 그다음부터는 제가 걷는 만큼 어머니가 더 사는 겁니다. 저는 일단 100을 채우죠. 그런 식으로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떠올리며 수명을 부여합니다. 그러다 보면 집에 도착할 때쯤에서야 내 수명을 세기 시작하는데요. 어쩔 땐 현관문 앞에 섰을 때 60이 되기도 하고, 70이 못돼 끝나기도 하더군요.
지금은 겨울철이라 그런지 낮에도 산책길에 사람이 띄엄띄엄이고, 저녁이면 사람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럴 때는 문득 이 길이 저승길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 멀리 앞서 걸어가는 사람이 보이면 그 사람은 나보다 먼저 죽은 사람이고, 내 뒤에 오는 사람은 나보다 늦게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순간 기쁘기도 하겠지만, 또 얼마나 슬플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걷는답니다.ㅎ 누가 보면 혼자 놀기의 달인 같지만, 이게 다 마음이 외로워서 그런 거겠지요.
지금부터는 보너스 영상 2개를 보여드릴 텐데요. 하나는 글쓰기 기술에 대하여 유시민 작가의 답변입니다. 처음부터 봐도 좋을 영상이지만, 이 시간도 아까운 분이라면 30분 33초부터 5분간만 들어보시길요. 그리고 또 하나는 일상의 소재에서 어떤 사유로 시를 쓰는지 제가 달걀을 삶으면서 초고로 쓴 시 한 편을 보여드릴 생각입니다. 달걀을 몇 개 삶다 보면 그중에 금이 갈 때가 있죠? 찬물에 담그거나 그냥 꺼내두거나 하면서 식힐 텐데요. 대개는 금이 간 걸 먼저 먹어야지, 그러지 않나요? 그래서 나중에 금 간 달걀을 찾아보면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란 말이죠.ㅎ
한날 왜 그런지 찾아보니 금 간 걸 꺼내서 식히면 열을 받아 액체에서 고체로 변한 흰자(알부민)가 부풀어 오르고 금이 간 틈으로 흰자가 아주 조금 새어 나온다네요. 이렇게 굳은 단백질이 껍질의 틈을 풀처럼 메우고 색도 껍질과 비슷해져서 결과적으로 금이 메워진 것처럼 보인다나요. 그래서 제가 금 간 달걀에서 금이 사라지는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해봤답니다. 7분가량의 영상인데 이 역시 바쁘신 분이라면 중간쯤에서 보시길요.
아무튼 깨진 금을 보면서 우리네 삶도 수많은 상처(금)를 받거나 주면서 살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걸 시로 써봤답니다. 여기서 팁을 하나 드리자면, 깨진 금에 관해 쓴다고 해서 달걀을 직접적으로 말하거나, 깨진 금 그 자체에 관해서만 쓴다면 시가 되지 못합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모두 우리네 삶으로 가져와야 시가 된다는 거지요. 예로 꽃이나 나무, 하늘, 구름, 바람을 소재로 시를 쓸 때도 소재 자체에 집중한 후에는 반드시 삶으로 치환해야 한다는 거,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번에 경남도민일보 당선작 ‘피자피자’가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피자에 관해서만 썼다면 소품에 그쳤을 겁니다. 하지만, 피자를 소재로 하여 삶을 말했기 때문에 소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랄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2XJSBYfngWA
아무도 모르게 지나간다
미세한 파열음으로 소리도 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금 하나가 지나간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열은 우리를 단단하게 만드는
가장 잔인한 방식
처음처럼 둥글고 매끈한 얼굴에서 우리는 흘러나오는 걸까
소리보다 얇은 선 하나가
나를 통과할 때
사람들은 그 방향을 기억하지 못한다
금은 늘 안쪽에서 시작되고
우리는 서로를 부딪히며 살아가고
한 번 생긴 금은
처음의 곡면을 다시는 믿지 않는 거겠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농담으로 서로의 껍질을 두드리는
그런 사람들, 그런 우리
우리는 부서지지 않은 채
계속 부서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