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손을 놓으려고 집들은 점점 높아진다
닫힌 문의 표정으로 나를 만지는
아이들이 술래를 피해 바다로 간다
멀리 헤엄쳐 가는 의자들
기다리던 것은 당연한 저녁이었을까
불꽃도 없이 돌들이 제 몸을 태운다
나무와 새들이 헤어진다
공중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
그림자만 기어다니는 거리
두고 간 것들로 남은 것들이 축축하다
오지 않은 날을 만지는 기분으로
아이들은 한 장씩 바다를 접는다
물어보지 않아도 큰소리로 대답하고 싶을 때
나무는 큰다.
2026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이 작품 해설에 관한 요청이 있어 올려드립니다. 다만, 제가 지금부터 이 작품에 관해 쓰는 해설은 원론적인 해석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먼저 밝혀야겠네요. 아시다시피 제가 이곳에 작품을 소개하는 기준은 언제든 다시 응모해도 당선될 만한 작품입니다. 물론 제가 생각하는 기준이니 절대적이지는 않겠지요. 그런 점에서 오늘 소개하는 작품을 다른 신문사에 냈을 때도, 혹은 다가올 신춘문예에 다시 투고해도 당선될 만한 작품인가,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저는 심사자에 따라 호불호가 상당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을 심사한 분이 김언희 시인과 박준 시인인데, 두 분의 연배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당선작을 선정하는 데 있어 이 작품의 당선 배경을 짐작해 볼 여지는 있어 보입니다. 여러분이 김언희 시인을 검색해 보면 아시겠지만, 당선작과 같은 갈래의 초현실주의적인 시를 쓰는 분이죠. 반면 박준 시인은 초현실주의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시인이고요.
그럼, 시를 한번 살펴봅시다. 시에 대해서 문외한이거나 이제 시 공부를 시작한 분이라면, 혹은 전통 서정시만 써온 분이라면 이 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 내용인지 이해가 잘 안 갈 겁니다. 그럼에도 이 시를 읽고 막연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시보다도 강하게 느껴질 겁니다. 우리는 그런 시를 ‘초현실주의 시’ 혹은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사용한 시라고 합니다.
더 간단히 말해보자면, 처음 읽었을 때 의미 파악보다 이미지가 먼저 오는 시들은 대개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사용했다고 보면 됩니다. 시를 딱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상징과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이미지를 특히 강조한 장르(?)랄까요. 아무튼 그런 카테고리의 시를 우리는 ‘초현실주의 시’라고 하죠. 초현실주의 시에서 범위를 더 넓혀가면 그게 모더니즘이고요. 그러니 초현실주의 시는 모더니즘 시의 한 갈래라고 보면 되겠네요.
참고 : 모더니즘에는 다다이즘, 상징주의, 이미지즘, 초현실주의 등이 있음.
자, 그러면 이제 이 작품이 초현실주의 작품이구나, 그런 생각이 드시죠? 그럼 이런 종류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초현실주의 기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현실주의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비합리적인 잠재의식이나 꿈의 세계를 탐구하여 표현의 혁신을 꾀한 예술 운동”이라고 나옵니다. 잠재의식이나 꿈의 세계를 탐구한다?? 벌써 감이 확 오지 않나요? 맞아요.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상황을 그저 상상력으로 그려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이미지는 금방 떠오를 겁니다. 화자가 어떤 감정인지, 지금 어떤 분위기인지. 그러니까 초현실주의 시는 현실에서 “가능한가?”를 묻지 않는 장르인 셈입니다. 단순한 묘사를 넘어 독자의 상상력과 감정을 자극할 뿐이죠. 쉽게 말하면 현실과 비현실을 섞어두는 겁니다. 그러면서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거죠. 눈 밝은 독자나 시인들은 전통 서정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신선한 경험을 하는 거고요. 이상의 꽃나무나 오감도, 여기서도 소개한 바 있는 손미 시인의 ‘전람회’나 김혜순 시인의 ‘날개 환상통’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이 바로 그런 종류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제 당선작 ‘사과가 맛없을 때’가 초현실주의 작품임을 감안하고 읽어보세요. 각각의 시구가 파편적으로 이미지를 쏟아내는 작품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지 않나요? 굳이 이 시의 주제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일상의 상실 속에서 세계는 꿈처럼 흔들리지만 삶은 그래도 계속된다는 지속가능성을 보여준다, 뭐 이쯤으로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시구가 맨 마지막에서 말하는 ‘나무는 큰다’입니다. 현실이 이상하게 꼬이는 어긋한 세상에서도 자연은, 혹은 시간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다는 깨달음이죠.
다만, 제가 이 작품에 대해 다시 응모해도 심사자에 따라서 호불호가 있을 거라고 한 이유는 이 작품의 각 행이 다른 행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지 않았나 싶어서입니다. 일전에 제가 소개한 손미 시인의 ‘전람회’나 김혜순의 ‘날개 환상통’은 그런 점에서 초현실주의를 표방하나 전체적으로 하나의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유기성이 있거든요. 초현실주의는 각각의 파편적인 이미지들이 모여 전체를 만들어낼 때 더 힘을 받는 법인데, 오늘 소개한 작품은 물론 제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이미지들이 그저 파편적으로 각 행에서 터져버리다 보니 전체를 향한 기여가 부족해 보인달까요. 그나마 마지막에 ‘나무는 큰다’라고 말함으로써 봉합하고 있지만요.
제가 초현실주의적인 시를 쓴다고 가정하고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꿈과 사물의 뒤틀림을 표현한다고 생각하면 이런 시구를 쓸 수 있겠지요.
“달걀 하나가 하늘을 날고/ 내 그림자는 무릎 위에서 춤춘다”
감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초현실주의 시구를 쓴다고 가정하고 또 써보겠습니다.
“슬픔이 문틈으로 스며들어/ 커튼에 핏빛 꽃을 피웠다”
그로테스크하거나 환상성을 혼합한다면 또 이렇게 쓸 수도 있을 겁니다.
“길가에 늘어진 생선뼈 위로/ 바람이 속삭이며 지나간다”
혹은 일상의 현실을 비틀어 초현실적으로 쓴다면
“시장에서 바나나가 나를 부른다/ 나는 두 손으로 귤빛 하늘을 받았다”
또 시간과 공간의 왜곡을 환상성을 가미해서 쓴다면
“시계가 내 손목에서 녹아/ 바닥으로 떨어진 꿈을 적신다”
또 내면의 심리를 끄집어내 풍경처럼 나열해서 쓴다면
“달은 환자의 눈알처럼 빛나고/ 밤은 오래된 책장을 뒤적이며/ 오늘도 나를 읽는다
어떤가요? 시구마다 다 몽롱하면서 비현실적이죠. 하지만 시어 그 자체는 아주 현실적입니다. 그리고 예로 든 하나의 시구만 읽을 때는 그나마 고개가 끄덕여지죠. 그럼, 이걸 이어 붙이면 어떨까요? 한번 이어 보겠습니다. 제목은 <달걀과 그림자>라고 해두죠.
<달걁과 그림자>
달걀 하나가 하늘을 날고
내 그림자는 무릎 위에서 춤춘다
슬픔이 문틈으로 스며들어
커튼에 핏빛 꽃을 피운 걸까
길가에 늘어진 생선뼈 위로
바람이 속삭이며 지나간다
시장에서는 바나나가 나를 부르고
나는 두 손으로 귤빛 하늘을 받았다
시계가 내 손목에서 녹아
바닥으로 떨어진 꿈을 적신다
달은 환자의 눈알처럼 빛나고 있을까
밤은 오래된 책장을 뒤적이며
오늘도 나를 읽는다
어때요? 제법 그럴듯하지 않나요? 만약 심사자가 이 시를 당선작으로 뽑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심사평은 어떨까요? 아마 이렇게 쓰지 않을까 싶네요.
“〈달걀과 그림자〉는 일상적 사물들을 초현실적으로 전도시키는 이미지의 연쇄를 통해, 세계가 아니라 화자의 인식 자체가 흔들리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 작품이다. 달걀이 하늘을 날고, 시계가 녹는 장면은 초현실주의의 전형적 장치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 시는 기괴한 이미지의 나열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의문형 어조와 ‘읽히는 존재’로서의 화자를 통해, 세계가 화자를 관찰하고 해독하는 듯한 역전된 인식 구조를 만들어낸다. 특히 마지막 행에서 드러나는 내면 인식의 수렴은 앞선 이미지들을 효과적으로 통합하며, 시 전체에 하나의 긴장된 사유의 궤적을 부여한다. 감각적 실험과 인식적 성찰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했다.”
혹은 더 짧게 이렇게 쓸 수도 있겠죠.
“초현실적 이미지의 연쇄를 통해 화자의 불안한 인식 상태를 세계의 풍경으로 전이시키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이미지의 실험성이 마지막 행에서 인식의 문제로 수렴되며, 시적 장치가 사유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응모작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모두 그럴듯하지 않나요? 저는 분명히 각각의 파편적인 이미지로 급조해서 그걸 한데 이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심사평을 보면 하나의 덩어리로 해석하고 있죠. 이런 차이가 제가 당선작을 다시 응모해도 당선될 작품인가 따져보면 호불호가 있을 거라고 한 이윱니다. 오늘 소개한 작품은 부분이 전체를 향해 기여하지 못한다고 보이거든요. 물론 개인적 견해일 뿐입니다. 반면 일전에 소개한 손미의 ‘전람회’나 김혜순 시인의 ‘날개 환상통’은 그런 점에서 파편적인 낱낱의 이미지들이 어떻게 전체로 조화롭게 만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죠. 그래서 그런 작품들은 언제든 응모해도 호불호가 없을 거라고 한 거고요.
그러니 결론,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전체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각 행의 이미지들을 먼저 떠올리면 좋을 듯합니다. 가령 “바람의 손을 놓으려고 집들은 점점 높아진다”에서 바람(자연)의 자유로움과 인간의 욕망(집)을 떠올리고, “아이들이 술래를 피해 바다로 간다”에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아이들을 상상하고, “멀리 헤엄쳐 가는 의자들”에서 일상의 사물이 비현실적으로 움직이면서 현실에서 부유하는 느낌 정도로, “기다리던 것은 당연한 저녁이었을까”에서 당연히 오는 저녁을 괜히 기다렸다는 허무함과, 동시에 안정감을, “불꽃도 없이 돌들이 제 몸을 태운다”에서 우리는 외부의 자극 없이도 스스로 변화하고 고통을 읽어낸다는 식, “공중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의 힘을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오지 않은 날을 만지는 기분으로/ 아이들은 한 장씩 바다를 접는다”에서 미래의 기대와 불안이 현실을 ‘접는(초현실적 이미지)’ 행위로 나아가기도 하고요. “물어보지 않아도 큰소리로 대답하고 싶을 때”에서 이 모든 비현실적인 상황에서도 큰소리로 대답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읽히죠. 결국 자연과 인간은 그렇게 현실을 지탱하며 나아가고 있음을 “나무는 큰다”라고 마무리합니다.
이런 해석 역시 앞서 제가 습작으로 급조한 <달걀과 그림자>의 심사평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어쩌면 이 시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해석이 아니라 이미지의 잔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문학 작품에 정답은 없을 테니까요. 우리가 정말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작품이 있다면 그 역시 새로운 사조의 발생으로 보는 게 문학이라는 장르니까요.
요청하신 분께, 그리고 이 작품이 궁금하셨던 분들께도 작은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