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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완보동물 / 김한규

by 최형만

걸을 준비 없이 생각 없이 걷지 않는 걸음이다 말할 수 없는 걸음 사이를 묻지 않고 물을 수 없게 궁금하지 않는다 살지 않으면서 살면서 망각도 없이 망각을 모르며 잊은 채로 기억을 모른다 몰락하고 있는 사이를 이미 몰락한 기관으로 들어가 숨을 죽이고 버티는 곳을 찾지 않으며 안이 되었다 처음도 아닌 처음에서 끝을 잘라 낸 끝에서 시작하며 시작을 끊는다 머뭇거리지 않으며 줄곧 생각하지 않으며 기능과 작동의 세계를 세계로 삼지 않는다 되돌아 오는 법이 없이 닿는 곳을 멈추지 않는 고요한 습관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기이하게 보이려는 의도 따위는 아무런 기이함도 없이 어떤 수단도 되지 않았다 올려다보는 눈과 내려다보는 눈을 함께 닫고 창은 열지 않는다 할 말이 없는 이유를 말에서 찾지 않는 오랜 침묵이 저절로 부화한다 남지 않으려는 의지를 남기지 않고 뒤에서 자꾸만 뒤로 물러났다 생겨난 것에서 필요한 것을 구하지 않는 방법으로 구하게 되었다 밖은 밖이 아닌 곳으로 만들어 가두지 않고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고 버려두었다 되풀이하지 않고 거듭하지 않으며 자리를 바꾸지 않는 하나의 동기뿐이다 그것을 낳으려고 낳지 않았다 죽는 기분을 갖지 않은 채로 죽음을 싸고 있다 살면서 죽어 있다



2022년 제5회 박상륭상 수상작 중 대표작


저는 우선 이런 작품을 만나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전율을 느낍니다. 전율은 두려움으로 몸이 벌벌 떨리는 현상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전율이 아니라, 뭐랄까요. 경외감으로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는 말이 맞겠군요. 그럼 봅시다. 왜 이런 작품을 만나면 그런 걸까요? 그 말을 하기 전에 우선 하나 물어볼게요. 여러분들은 어떤 시를 좋아하나요? 아마도 대개는 서정성이 가득한 시거나, 조금 더 나아간다면 약간의 모던한 느낌을 풍기는 현대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를 공부하면서 조금씩 느끼는 거지만, 이런 작품을 만나면 왠지 모르게 도전 의식이 샘 솟는달까요. 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작품은 어떻게 쓰는 걸까? 싶어서 골똘히 들여다봅니다. 한때는 잘 이해되지 않는 작품들을 미래파라 하여 문단에서도 시가 맞냐, 아니냐로 시끄러웠던 시절이 있었죠. 오늘날의 현대시는 미래파가 등장한 걸 고마워해야 합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그저 그런 서정에만 머물렀을 테니까요.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김한규 시인의 박상륭상 수장작 중 대표작입니다. 박상륭상을 잘 모르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 조금 소개하자면 계급장 떼고 보자면 김수영문학상에 절대 뒤지지 않는 상이라 생각합니다. 아니, 언어적 실험성과 작품성으로 보자면 오히려 앞선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김수영과 박상륭의 이름값과, 2018년 제정된 박상룡상에 비해 김수영문학상은 1981년 제정되었다는 점에서 그만큼 확고한 위치를 자리매김했다는 차이겠지요. 김수영문학상이 시 부문으로만 경쟁하는 거에 비해, 박상륭상은 시, 소설(단편, 장편), 희곡, 평론, 논문 중에서 수상작 한 편인 걸 보면 확률상으로도 더 어려운 셈이고요.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이 많았던 건 그만큼 박상륭상에 당선되기가 어렵다는 거고, 그래서 오늘 소개하는 작품이 가치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섭니다. 작년이 7회였는데 7회는 ‘당선자 없음’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참고로 6회 당선작은 희곡에서 나왔고요. 이는 어떻게든 수상자를 내는 게 아니라, 작품성이 없다면 뽑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입니다. 그때 ‘당선작 없음’으로 발표하면서 내놓은 심사평 중에서 시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살펴보는 것도 박상륭상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시는 전체적으로 정교한 기교적 훈련과 동시대적 시의 흐름을 무난하게 타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외려 눈에 띄는 작품이 없었고, 혹여 눈에 띄더라도 특별한 개성이나 발성법을 만나기 힘들었다. 비슷한 수준의 밴드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별 차별성 없는 사운드를 관성적으로 연주하고 있는 록 페스티벌을 보는 기분이랄까. 대개 다 나쁘지 않았으나 대개 다 자기만의 편협한 굴레 안에서 부질없는 기술만 연마하는 것 같았다. 그 반대급부에서 마지막으로 논의된 작품은 <세슘 여자의 서 외>였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자신만의 체험을 공동체의 신화로 재구축하려는 시도가 일단 가치 있다고 여겼다. 별다른 시적 기교도 없이 직선적, 그리고 단정적으로 자신과 세계를 둘러싼 문제들과 힘껏 드잡이하는 점도 좋았다. 미세세공술로 가득한 한국 시단에 ‘도끼를 든 여인'(?)이 나타난 것 같아 반가웠으나 문제는 바로 그 '도끼'였다. 시원시원하고 명쾌하고 파워풀하나 그게 잘못 쓰였다간 엄한 사람 잡을지도 모를 거라는 판단 또한 기대감 못지않았다. 자칫 도그마로 굳어 스스로 합리화에 빠질 위험성도 없지 않아 보였다. '최승자+고정희'의 합체 재림일 수 있다는 누군가의 반색은 묵살되었다. 아쉽지만, 내려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 소개하는 ‘완보동물’을 뽑으면서 심사자는 어떤 평을 했을지도 궁금하니까 또 보겠습니다.


“남는 건 시였다. 응모자도 많고 전체적인 수준도 높았다. 마지막 테이블에 올려진 세 명도 시였다. 다른 장르에서 난감해진 눈이 절로 시에 향하게 됐다. 장르에 대한 색안경을 벗고서도 대체로 우수했다. 소설이나 희곡이 못하는 걸 시가 다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곤혹스럽기도 반갑기도 했다. 시는 언술 행위인 동시에 일상적 언술을 깨뜨리는 행위, 라는 기본 전제마저 넘어선 시들이 많았다. 미지근했던 심사 열기가 막판에 달떴다. <녹, 외>와 <죽음의 한 연구2, 외>와 <완보동물, 외>가 그렇게 싸웠다. <죽음의 한 연구2, 외>가 제일 먼저 탈락했다. 표절 시비가 있었던 모 작가의 인용문에서 심사위원 대부분이 감점을 매겼다. 인간의 눈은 간사하기 마련이다. 트집거리가 생긴 거다. 안 보여도 될 감상성이 그때 눈에 띄었다. 만장일치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남은 두 분은 누굴 선정해도 이의가 없을 상황이었다. 최종적으로 <완보동물, 외>에 의기투합한 건 정교하고도 실험적인 통사구조의 자유로운 운용 능력을 높이 산 때문이다. 감정도 심상도, 심지어는 감각마저 다른 차원으로 변용하여 냉혹할 정도로 건조하고 치밀한 언어로 꾸며내는 구성력이 일품이었다.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한국 시에서 볼 수 없었던 '조직력'이라는 평도 나왔다. 호흡도 리듬도 탄탄했다. <녹, 외>가 가진 솔직하고 엄혹한 감성보다 한 수 위라 여겼다. 전체 시 응모자가 기존 수상자들의 시적 모험을 표피적으로 흉내 내려는 것 같다는 1차 심사에서의 우려를 말끔히 벗겨내고 있었다. 반복건대, 시도 그냥 시일 뿐, 시를 흉내 낸 걸 시라 우길 순 없을 것이다. 또 반복건대, 이 상은 박상륭상이다. 그 이름값에 누가 되지 않을 거라는 최종 평가가 있었다. 수상자를 확인하고 나선 문학의 나이는 문학 자체가 스스로 규정한다, 는 새삼스런 자각을 하게 됐다. 수상하신 김한규 시인께 축하와 감사 인사드린다.”


저는 당선작에 대한 평을 읽으면서 뜨끔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 “시도 그냥 시일 뿐, 시를 흉내 낸 걸 시라 우길 순 없을 것이다.” 왠지 모르지만, 뜨끔했습니다.ㅎ 오늘은 이래저래 서론만 길었네요. 그럼, 시를 잠시 들여다봅시다. 제목이 ‘완보동물’입니다. 다음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완보동물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몸길이 0.1~1.5mm 이하의 무척추동물이다. 기생하지 않고 자유생활을 하며 히말라야 산맥에서 심해까지 전 세계에 분포한다. 8개의 다리로 천천히 걸어다녀 완보동물이란 이름이 붙었다. 완보동물은 ‘느리게 걷는 동물’이란 뜻이다. 걷는 모습이 곰 같다고 해서 '물곰(Water Bear)’이나 ‘곰벌레’라고도 하며 주로 이끼류에 서식하여 ‘이끼 새끼돼지(Moss Piglets)’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시를 보시면 처음 생각한 것보다 시 자체를 이해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다만, 제가 이 작품에서 놀랐던 건, 이걸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하는 거였습니다. 서두에서 경외감이 들었다는 건 바로 그런 표현 때문이었고요. 곰벌레가 기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음일지 상상도 안 되지 않나요? 아니, 걷고자 하는 목적지라도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죠. 알고 걷는 건지 그냥 걷는 건지 우리의 시선으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걸 이렇게 표현합니다. “걸을 준비 없이 생각 없이 걷지 않는 걸음이다” 와.... 정말 이보다 더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이어지는 시구 역시 절창 중의 절창입니다. “말할 수 없는 걸음 사이를 묻지 않고 물을 수 없게 궁금하지 않는다 살지 않으면서 살면서 망각도 없이 망각을 모르며 잊은 채로 기억을 모른다 몰락하고 있는 사이를 이미 몰락한 기관으로 들어가 숨을 죽이고 버티는 곳을 찾지 않으며 안이 되었다” 마치 물이 흘러가듯 유려하면서도 언어의 맛이 살아있지 않나요? 분명 걷고 있지만, 걷지 않는 모습이고, 살면서 죽어 있고, 죽으면서도 완전히 죽지 않은 존재입니다. 참고로 완보동물의 생명력은 지구 최강이라고 합니다. 마치 죽은 것 같지만 다시 살아나는 게 완보동물이거든요. 망각도 없으면서 망각을 모르고 잊은 채로 기억을 모른다는 표현은 얼마나 깊이 사유해야만 나오는 시구일까요?


시의 내용을 보면 살아있지만 죽은 것에 가깝고, 죽은 것 같지만 살아 있고,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상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하지만 또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완보동물의 양가적 상태를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되풀이하지 않고 거듭하지 않으며 자리를 바꾸지 않는 하나의 동기뿐이다” 이처럼 움직임과 변화가 무력한 세계를 본 적이 있나요?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서 머무는 게 어떤 상태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살아 있으면서도 살아 있지 않은 존재의 한 방식이죠. 그래서 이 시의 주제는 철학적으로나 생태학적으로, 또 존재론적으로도 다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에서 나오는 구절을 인용해보면 “밖은 밖이 아닌 곳으로 만들어 가두지 않고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고 버려두”는 것으로 생명과 죽음의 모호함을, 의지와 무의지를, 안과 밖의 경계가 모두 붕괴된 ‘정지된 존재’의 초상을 들여다봄으로써 인간의 삶을 들여다 보지 않았나 싶네요.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이런 시적 표현은 어마어마한 내공이 아니면 절대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작품을 읽어보면 시라는 장르가 정말 사유의 최고봉이 맞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이쯤 되고 보니 김한규 시인의 신춘 당선작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2017 영남일보 당선작이었던 ‘공복’이더군요. 역시나 끝내줍니다. 언젠가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다뤄야지, 생각했던 그 시를 쓴 분이더군요.


아래 링크는 김한규 시인이 시를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그리고 시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기사입니다. 한번 읽어보시면 시를 열심히 쓰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함께 소개합니다.


https://v.daum.net/v/20240226211649419



아래 사진은 보너스입니다.^^ 제가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고 찍었습니다.

길냥이가 가을날의 동화를 쓰고 있네요. 여러분의 사유를 맘껏 펼쳐내시길요.


캡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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