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랑 공은 안 친해

by 조삼식

나는 공이 정말로 싫었다. 초등학교부터 학창 시절 내내 체육 시간에 걸핏하면 축구나 하라며 공 하나 툭 던져주고 교무실로 사라지는 체육 선생님들이 원망스러웠다. 또 남자애들은 그저 좋다고 그 공 하나에 매달려 한 시간이 모자라게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공을 쫓아다녔는데, 그 모습이 내 눈에는 마치 디즈니 만화영화 <라이온 킹>에서 스카가 무심코 던져 준 얼룩말 다리 하나에 환장하고 달려드는 하이에나들과 다를 바 없었다. 체육도 엄연한 교과목이니 분명히 정해진 교과 과정이 있었을 텐데, 도대체 당시 체육 선생님들은 허구한 날 축구만 시키면서 어떻게 평가를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도 궁금하다.


보통 축구를 하는 날이면 나는 그늘에 앉거나, 나처럼 축구를 싫어하는 친구들 몇몇과 배드민턴 따위를 치며 시간을 보냈지만, 가끔은 축구를 해야 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빠지는 사람 없이 모두가 참여하도록 강제하는 날이 그랬다. 그럴 때면 내 포지션은 늘 고정이었다. 수비수 또는 골키퍼. 적극적으로 공을 쫓아 드리블을 하고 슛까지 날려서 무려 상대방 골대 안에 공을 넣기까지 해야 하는 공격수 포지션을 맡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그리고 아마 우리 팀 친구들로서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팀 골대 근처에서 서성이며 부디 공이 내게 오지 않기를, 그리고 어서 빨리 수업 끝을 알리는 종이 쳐서 영겁 같은 이 체육 시간이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물론 그렇다고 수비수나 골키퍼 포지션이 딱히 만만한 것도 아니었다. 굴러서든 날아서든 공이 내 근처로 오는 것 자체가 싫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상대방 공격수에게 잘 뚫리는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고, 공은 나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툭하면 내 얼굴로 날아와 안경을 망가뜨렸다. “아, 뭐 하냐?”, “괜찮아? 미안.” 우리 팀의 불만과 상대 팀의 사과가 쏟아졌다. 정말 지긋지긋했다. 공이 얼굴로 날아드는 것도, 휘어진 안경다리를 매만지고 더러워진 안경알을 닦는 것도.


전교생 대부분이 기숙사에서 지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는 이놈의 축구가 더욱 내 삶을 옥죄었다. 중학교 때처럼 체육 시간마다 축구를 하는 것은 물론, 주말에도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은 평일보다 아침 점호 시간이 1시간 정도 늦었다. 가뜩이나 새벽 기상과 심야 자율 학습 때문에 수면 부족에 시달리던 터라 아침잠 1분 1초가 아쉬울 때였는데 무려 1시간이나 더 잘 수 있는 일요일 아침잠이 얼마나 꿀같았겠는가. 그런데 당시 기숙사에는 어떤 축구에 미친 인간이 시작한 것인지 모를 ‘호실 축구’라는 끔찍한 문화가 있었다. 쉽게 말해 기숙사 호실 대항 축구 시합이었다. 그것도 항상 일요일 점호 전 새벽에 열렸다. 경기는 우리 학교를 포함해 근처에 있는 모든 초중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진행됐다. 그나마 우리 학교 운동장에서 하면 다행이었지만 보통 거기는 선배들 차지였다. 그래서 걸어서 20분 내외가 걸리는 학교의 운동장이 우리 경기장으로 정해질 때가 많았는데, 경기를 마치고 점호 전까지 돌아올 것까지 계산하면 훨씬 더 일찍 일어나야 했다.


빠지고 싶다고 마음대로 빠질 수도 없었다. 호실별 인원은 모두 같았기 때문에 우리 팀에서 한 사람이 빠지면 상대 팀에서도 누군가 빠져야 했다. 그렇지만 보통은 다들 축구를 못 해서 죽은 귀신이 붙어 있었기에 웬만해선 빠지려고 하지 않았고, 이것 또한 단체 행동의 일환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아파서도 아니고 단순히 하기 싫어서 빠지겠다고 말하기란 쉽지 않았다. 너무 하기 싫은 날에는 빠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그때부터 방 친구들의 눈총과 틱틱거림을 견뎌야 했다. 그래서 토요일 밤만 되면 항상 긴장했다. 또 룸메이트들이 내일 경기를 잡아 왔다며 신나서 뛰어들어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채로.


그 어떤 악천후도 축구를 향한 녀석들의 위대한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한 번은 눈이 많이 오는 토요일이었다. 나는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설마 눈이 저렇게 쌓였는데 내일 새벽에 축구한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크나큰 오산이었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룸메이트들 중 누군가 경기를 물어왔고, 하필 꽤 먼 학교 운동장에 당첨이 되어 나는 다음 날 해도 제대로 안 뜬 새벽에 추위와 눈길을 뚫고 축구를 하러 가고 있었다. 세상에, 글을 쓰면서도 새삼 끔찍하다.


대학교에 가면서 축구에서 자유로워지는 듯했지만 군대라는 축구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도 끔찍하고 축구도 끔찍한데 군대에서 축구를 해야 한다니! 주말에 좀 쉬려고 하면 불러대는 선임들이 정말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잘 못한다, 몸이 안 좋다, 별로 안 하고 싶다 따위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특히나 이등병 시절의 내게 선택권이란 없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오후, 여느 때처럼 또다시 풋살을 하러 나오라는 말에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질질 끌며 경기장으로 갔다. 학창 시절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단지 같이 뛰는 저놈들이 친구들이 아니라 내가 깍듯이 대해야 하는 선임들이라는 점만 달랐을 뿐, 내 위치는 여전히 골키퍼였다. 저 공하고 무슨 철천지 원수를 졌길래 다들 저 공만 보면 눈이 돌아서는 쫓아다니면서 발로 차 대는 건지 참 희한하다는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 갑자기 눈이 번쩍했다. 공이 얼굴로 날아와 꽤나 세게 꽂히면서 내 안경을 떨어뜨렸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니었는데 그날은 유난히 서러웠던 것 같다.


그날 경기를 주도했던 병장이 기겁을 하고 달려와, 한 손으로는 얼굴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찌그러진 안경을 들고 서 있는 나를 보며 괜찮냐고 묻는다. 군대 규율상 무슨 사건이 터지면 그 자리에 있던 최선임자, 그러니까 가장 계급이 높은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간부가 없었기 때문에 그 병장이 최선임자였다. 꽤나 놀랐던 모양이다. 급기야 그 자리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야, 앞으로 얘는 축구시키지 마.”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그렇게 나는 얼굴과 안경을 시원하게 한 번 내어주고 전역할 때까지 축구 면제권을 부여받았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 선임이 다소간 쫄보였던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게이들이라고 해서 다 모든 운동을 못하고 싫어할까? 그건 아니다. 나만해도 공으로 하는 운동이 싫었을 뿐, 운동 신경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두 발자전거도 혼자 배웠고, 비록 가끔이지만 축구나 농구 같은 구기 종목을 제외한 다른 종목이 체육 수행 평가일 때에는 점수가 꽤 나쁘지 않았다. 9살 때부터 꾸준히 배운 수영도 곧잘 해서, 그때 익힌 수영으로 군대에서 열렸던 병사 수영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포상 휴가를 탄 적도 있다. 그냥 공이 정말 나랑 안 맞았을 뿐이다.


게이들이 축구로 대표되는 구기종목 전반에 소질이 없거나 싫어한다는 건 성인이 되어 다른 게이 친구들을 만나고서야 알았다. 나는 나처럼 이렇게 축구를 못해서 고통받는 남자애는 드문 줄 알았는데, 세상에, 알고 보니 이 땅에 나고 자란 수많은 게이들이 나와 정확히 같은 고통을 공유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게이 사회에 소속감과 동질감을 느꼈다. 이 또한 편견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게이와 공이 친하지 않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범문화적 현상이다. 물론 상상 속의 동물처럼 (농담이고 염연히 실재하긴 한다) 게이 풋살 동호회라는 모임이 있다고도 하니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과연 무엇이든 100퍼센트인 것은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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