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하지만 지금이 제일 소중하다
인간은 한 번도 낙원을 경험해 본 적이 없음에도,
그 낙원을 기다리느라 현재의 삶을 고통이라 여긴다
- 쇼펜하우어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조금 뜨끔했다.
나도 모르게
“언젠가의 낙원”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조금만 더 성공하면,
언젠가 시간이 조금만 더 여유로워지면,
언젠가 돈이 더 많아지면.
그때가 되면
조금은 덜 불안하고,
조금은 덜 조급하고,
조금은 더 행복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은 늘 ‘그 언젠가’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은
그저 ‘참고 지나가야 하는 시간’처럼.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우리는 단 한 번도 그 낙원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머릿속에만 있는 어떤 장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상태를
낙원이라고 부르며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현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스스로를 묶어두고 있는 것 같다.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버티면.”
이 말은 어느새
습관처럼 입안에 맴돈다.
특히나 대한민국 사람들은 더욱 그런 것 같다.
물론 미래를 그리며 사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기대가 너무 커질수록
현재의 삶이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
지금의 하루,
지금의 감정이
모두 ‘낙원 이전의 고통’처럼 느껴질 수 있다.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뜨거운 물을 올려 차를 내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낙원이라는 건 정말 저 멀리에만 있는 걸까?’
찻잔에 찻잎을 담고 물을 따르고
우러나는 탕색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큰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차 한 모금과 함께 깊숙한 내면이 따뜻해진다.
지금 이 순간이,
낙원까지 가는 길목이 아니라 낙원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지금보다 더 나은 어딘가를 상상하면서 살아간다.
지금보다 더 좋은 회사,
지금보다 더 나은 집,
지금보다 더 여유로운 나.
하지만 막상 어느 정도 올라가 보면
그때의 나는 또 다른 낙원을 상상하고 있다.
그렇게 계속 나를 채찍질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저기까지 가야지.”
그전에 그리던 낙원은 도착하는 순간 사라지고
그보다 조금 더 나은 낙원을 다시 찾는다.
‘어쩌면 이미 여러 번 낙원 같은 순간을 지나왔는데
그걸 낙원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뿐일까?’
비도 눈도 오지 않는 조용한 밤,
오늘따라 유난히 잘 우러난 차를 마시며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시간들.
“그래, 이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을 분명히 한 번쯤은 했을 것이다.
그 순간을 낙원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았을까.
쇼펜하우어의 문장을 조금은 다르게 읽어보면 이렇게도 들린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낙원을 기다리지 말고,
이미 지나가고 있는 삶 속에서 작은 낙원을 발견하라.”
물론 우리가 사는 현실이 늘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피곤한 날이 더 많고, 답답한 날이 더 많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싶은 날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끔씩은
‘지금 이 순간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인정해주고 싶다.
조금 덜 완벽해도, 조금 부족해도, 조금 어설퍼도
오늘 이 한 장면이
언젠가는 그리워질지도 모르는
작은 낙원의 일부일 수 있으니까.
인간은 낙원을 기다리느라 현재를 고통이라 여기지만,
오늘만큼은 현재의 삶을 조금 덜 고통스럽게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숨을 천천히 고르며,
‘아, 오늘도 이렇게 감사한 하루를 보냈네’
하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정도면
이 순간도 꽤 괜찮은 낙원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