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의 첫눈

평범함에 대한 감사

by Dean

며칠 전 올 겨울의 첫눈이 왔다.


내 기억의 첫눈은 아직 겨울의 초입이라

펑펑 왔다기보단 살짝 내리다 만 느낌이었지만

어제의 첫눈은 제대로 펑펑 내리는 첫눈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눈이라 반갑기도 하고

운전해서 집에 갈 생각에 막막해지기도 했다.

실제로 눈이 오는 퇴근길은 평소보다 두 배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길에는 사고가 난 차량들과 사람들로 어지러웠다.


집에 무사히 도착하고 나서 든 생각은

‘감사함’이었다.


나도 사고가 났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집에 도착한 것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조금만 더 서두를 했다면,

어쩌면 나도 그 길 위에 서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눈길에서는 내가 아무리 급해도

차는 빨리 달리 수 없다.

브레이크를 세게 밟아도 차는 제멋대로 미끄러진다.


결국 속도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도로에서의 '천천히'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우리 삶에도 이런 날들이 있다.


마음은 한참 앞서 가 있는데

현실은 눈길처럼 미끄럽고,

속도를 내고 싶어도 도저히 속도를 낼 수 없는 날.


예전의 나는 이런 날들이 답답했다.

왜 이렇게 막히는지,

왜 내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지,

왜 나는 늘 늦게 가야만 하는지.


하지만 어제 눈길을 '천천히' 달리면서

조금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느린 속도가 오늘의 나를 살리는 것일 수 있겠다'


평소 같았으면 쌩쌩 달렸을 구간에서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앞차와 더 거리를 두고, 더 조심하며

내가 갈 수 있는 만큼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선택해서 천천히 갔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눈이 나 대신 속도를 줄여준 것일 수도 있다.


무사히 집에 도착해 차의 눈을 털고

따뜻한 집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감사함이 밀려들었다.


오늘 하루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사실은 가장 큰 선물이라는 것.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었다는 것.


우리는 보통 눈에 보이는 성과나 눈에 띄는 변화에만

감사의 이유를 찾으려 한다.


숭진을 했다거나, 연봉이 올랐다거나,

원하던 성과를 이뤘다거나.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날들은 거창한 성과가 없다.

그저 평범하게 출근하고, 일하고, 집에 돌아온다.

눈 오는 날의 퇴근길처럼, 조금 막히고, 조금 답답하고,

조금 더뎌 보인다.


하지만 그런 날들 사이에 우리가 놓치고 지나가는

감사가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사고가 나지 않은 것, 몸이 크게 아프지 않은 것,

돌아가면 나를 맞이해 주는 공간이 있다는 것.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없어지면 바로 알게 되는 것들.


첫눈은 늘 설렘과 함께 온다고들 말한다.

예전에는 그런 설렘만 기억했다면

이제는 그날의 온도와 속도를 함께 기억하게 되는 것 같다.


조금 느리게 가도

결국 집에는 도착한다는 것.

조금 더디게 가는 날이

오히려 안전한 날일 수도 있다는 것.


첫눈이 펑펑 오던 날,

막막했던 퇴근길을 돌아보며

나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무사히 왔네. 정말 감사하다."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간 하루에게

조용히 고맙다고 말해보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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