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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Feb 26. 2023

그러나... 고레에다가 말했다

230224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책 <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2022)를 읽었다. 덩달아 그가 자신의 작업 이력과 관련된 상념들을 모아둔 책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2017)도 오랜만에 꺼내 들었다. 새로이 읽은 책 이야기부터 하자. 그는 책의 서문을 건조한 사건 개요와 인물 설명로 채운다.


  (1990년) 12월 5일 오전 10시. 시찰단을 태운 비행기가 가고시마 공항에 착륙하려던 바로 그 무렵, 도쿄 마치다시 야쿠시다이에서 환경청의 한 관료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야마노우치 도요노리, 53세. 미나마타병 재판의 국가 측 책임자로서 화해를 거부한다는 뜻을 계속해서 표명하던 기획조정국의 국장이었다. - 18p


    일본 환경청에서 기조국장은 2인자의 자리라고 한다. 한국에서 50대에 이정도 직급이 되려면 행정고시 합격 후 공직생활 내내 엘리트 코스만 밟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왜?' 고레에다는 한 권 책 내내 이 질문을 붙든 채 야마노우치라는 인간을 최대한 상세히 그려낸다. 온전히 써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책의 번역본은 최근 나왔지만, 일본에서는 1990년대에 출간된 책이다. 고레에다의 과거 다큐멘터리가 책의 기초였다고 한다. 다큐의 제목은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 '복지 사각지대'를 지적하고 복지 시스템의 개선을 촉구하는 내용일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처음엔) 마흔일곱살에 자살한 호스티스의 고백 테이프를 발견했습니다. ... 이 테이프를 하나의 축으로 삼아 자살한 여성과 생활보호를 끊은 구청 복지과 남성이 대립하는 방송을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촬영 준비에 들어간 단계에서 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 68~69p


  그 사건, 야마노우치의 죽음을 파헤친 끝에 고레에다는 방송의 주제와 내러티브를 통째로 바꾼다. 환경 파괴로 발전하는 산업, 경제 성장의 과실을 맛보는 국가의 한 편에 불쌍한 시민이 자리한다는 이분법은 취재 과정에서 '선량한 관료'라는 제3항을 포함한 복잡한 관계망으로 변한다.




  내게 흥미로웠던 것은 고레에다가 이후 선택한 길이다. 관료의 존재와 행위는 정치학을 비롯한 사회과학 분야에서 '조직행태 이론' 등 연구로 꽤 주목받은 영역이다. 다큐멘터리 PD가 잘 택하지 않는 주어일 뿐, 연구로서는 꽤 많이 다뤄졌다는 뜻이다. 해당 관점에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이란 대충 이러할 것이다. 환경 문제에 관심이 있고 피해자의 고통에 예민한 관료가 존재하는데도 왜 국가는 시민의 편에 서지 않았나?

  고레에다는 이 길을 가지 않는다. 그에게 국가는 완고하게 기업 발전의 편에서 경제 논리를 관철하는 존재로 보인다. 정치권, 정당 내외부에서 고차원적 논쟁이 있을지 모르나 그의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자민당'으로 대표되는 권력의 무게추가 환경 파괴의 영향을 축소해 알리고 오염 물질의 허용 범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기우는 것만이 눈에 명료하다. 그의 질문은 차라리 '왜 야마노우치라는 관료는 국가-기업의 환경 파괴에 맞서는 장벽이 될 수 없었나'에 가깝다. 고레에다는 <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에서 야마노우치가 환경청 기조국장이 이르기 이전 시절을 묘사하며, 그와 야마노우치의 상사 하시모토 미치오 당시 공해과장을 대조한다.


  야마노우치가 이번 법안 제정에 대한 다양한 압력을 '소름이 끼친다'고 표현한 것에 비해 하시모토는 그 압력을 행정에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굉장히 좋은 일'이라며 받아들인다. 이 차이는 두 사람의 행정이라는 일에 대한 자세의 차이, 인간의 자질 차이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그 후 두 사람이 나아간 방향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 시점에서의 인식 차이는 무척 흥미로운 점이 있다. - 103~104p


  법원의 '화해 권고'를 국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할 때, 원고는 미나마타병을 앓게 된 피해 지역 사람들이고 피고는 정부(일본 사회 특유의 어법으로 '국가')다. 법원은 정부가 발생 피해와 환경 파괴의 연관성을 인정해 피해 보상 범위를 넓히고 보상 액수를 높이는 식으로 피해자들과 협상에 나서길 주문하지만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칫 너무 많은 보상액을 지급해야 할 판이다. 게다가 이런 선례를 남기면, 앞으로 환경과 인명 보호라는 대의와 경제 논리가 부딪힐 때 협상이 어려울 수 있다. 단 한번의 '후퇴'가 앞으로의 전선을 '불리하게'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이다.


  환경청은 특별히 사람으로서의 양식에 기초하여 화해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양심이나 양식의 부분과는 분리한 데서 거부한 것이다. 여기서 만약 의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행정으로서의 직업적 식견이지 결코 행정 책임자인 관료 개인의 양식이 아니다. 그러나 야마노우치는 하시모토 미치오와 달리 이러한 비판이 직업인으로서의 자신에게 향한 것이지 자신의 양심에 향한 게 아니라고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야마노우치는 한 인간으로서 고뇌했다. - 194p


  그리고 고레에다는 이렇게 쓴다.


  후생성 내에서도 야마노우치에게 기획조정국장은 적합하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가 미나마타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사회국장 정도의 직위로 후생성으로 돌려보내는 게 어떠냐"는 목소리가 간부에게서도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견디면 차관이 될 수 있으니까"라는 의견도 있고 적당한 자리가 준비될 것 같지 않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얽혀서 그 안은 지워졌다. 그러나 야마노우치가 안고 있던 불행은 그 본질이 직위 문제에 있는 게 아니라 이상주의가 현실주의에 압도당하는 현재라는 시대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였음을 관청 사람들은 과연 이해하고 있었을까. - 239p


  처음엔 어색하게 보였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라는 제목이 지금 보니 꽤 적절한 명명이지 싶다. 아래는 야마노우치가 열다섯살 때 쓴 시 <그러나>를 읽고 고레에다가 남긴 감상. 고레에다는 이 시를 포함해 야마노우치가 '문청' 시절 작성한 여러 작품을 책에 인용하며 그의 캐릭터를 형상화한다. 제목 앞부분에 '그러나'를 집어넣은 고레에다의 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란 현실 사회에 이의를 제기하는 항의의 말이고 청년기 특유의 결벽을 보여주는 말이며 이상주의를 상징하는 말이다. 야마노우치의 인생은 바로 이 시와 마찬가지로 늘 역접의 인생이었다. 학창 시절도, 후생성 시절도 그랬다. 관료라는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그 대명사인 '파벌주의' '권위주의' '출세주의'라는 것과 항성 일선을 그어왔다. 노력은 물론이지만 그의 자질이 그렇게 하게 했다. ... 그는 모든 과거를, 과거의 자신을, 청년기의 빛나는 것으로 가득 찬 모든 말을 마음 속에서 질질 끌고, 그리고 그것들에 속박되어 쉰세살의 지금을 살고 있었다. 과거의 자신에 대한 집착이 현실의 자신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나마타병 화해 권고 거부라는 이번 사건, 그리고 그 뒤에서 자신이 행했던 여러가지 무의미한 획책은 항상 약자 측에 서고자 한 지금까지의 자세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패배를 당한 야마노우치는 거기에서 눈을 돌릴 것인가, 패배라는 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선택에 봉착했다. - 245~248p





  야마노우치가 법원의 화해 권고를 달갑지 않게 여겼을 거란 서술이 인상깊었다. 화해 권고에 반대한다는 점에선 같은 결론이지만, 다른 이유에서 그럴 수 있음을 섬세하게 포착한 서술이었다. 결과적으로 서는 자리가 같으면 똑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요즘 세상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명제일 것이나, 언제까지고 이런 다종다양한 결의 존재를 지지하고 싶다.


  (법원의) '화해 권고'에 대한 야마노우치의 본심은 어땠을까. 그의 성격과 인간성으로 보아 환자의 고통은 남들보다 배는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개인적인 의견으로 구제하고 싶다고 해도 당연할 것이다. 그를 잘 아는 주변 지인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화해 권고'에는 개인적으로 찬성하지 않았다는 것 같다는 증언도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야마노우치의 진의는 국가가 환자 구제를 거부하고 권고를 수용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180도 다르다. 사법이 국가의 가해자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판단을 포기하며 화해라는 뚜렷하지 못한 결말을 궈고하는 것은 너무 태만한 일 아닌가. 너무나도 무책임한 일 아닌가. - 194~195p




  고레에다는 책에서 꽤 많은 분량을 미디어 비판에 할애한다. 그의 시선은 일단 야마노우치의 죽음 직후 아내 도모코를 비롯한 유족에게 언론이 거듭 전화를 걸고, 불현듯 찾아와 입장을 물은 데에 머문다. 어떤 기자는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차려 입고 친구인 양 도모코의 옆에서 그녀의 하소연을 들었다고 한다. 고레에다는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 이렇게 썼다.


대부분의 미디어는 죽음의 사적인 부분 즉 자살에 대한 충격이나 유족의 슬픔을 취재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슬픔이 임팩트가 더 강하고, 별 생각없이 스토리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텔레비전 저널리즘(혹은 다큐멘터리)은 본디 그 현상의 공공적, 사회적 측면에 눈길을 줘야 하지 않을까요.
  ... 부수적 형태로 개인적인 부분이 보이는 경우도 있고, 취재자와 피취재자의 관계 속에서 개인적인 부분이 중심이 되는 작품도 만듭니다. 하지만 그것도 개인적인 부분만 찍는 게 아니라, 개인적인 부분 건너편에서 항상 공적인 부분을 바라봅니다. 그러한 시선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방송에서 묘사하는 대상이 열리거나 닫히는 커다란 차이가 생겨납니다. 74~75p


  이 부분을 조심해서 봐야 한다. 개인적인 영역을 찍는, 취재하는 행위 자체를 고레에다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의아하게 여기는 부분은 개인 대상 취재가 개인을 드러내는 데 그친다는 것이다. 공적인 무엇인가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언론이 개인을 다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알 권리'라는 말로 흥밋거리를 향한 싸구려 입맛에 부응하는 것은 고레에다가 말하는 공공성과 거리가 멀다.

  고레에다가 비판하는 언론의 문제는 또 있다. 야마노우치의 죽음 직후 다수의 일본 언론은 야마노우치의 개인적 곤경을 앞세워 보도했다. 피해자들에게 '보상이 어렵다'는 취지의 잔인한 말을 환경청 대변인으로서 내뱉어야 했다는 등이다. 야마노우치가 경제 논리를 받아들인 국가와 아우성하는 시민 사이에서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들여다본 언론은 적었다. 그가 죽기 전까지 다수 언론의 표제는 (진보 언론이라면) '환경청, 시민 외면' 같은 것이거나 (경제 신문 또는 보수 언론이라면) '정부, 미나마타 억지 주장에 제동'에 가까웠다. 다시 <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의 일부.


  12월 5일 각 신문 석간과 6일 조간 사회면에는 '환경청 국장 자살'이라는 큰 표제어가 난무했다. 지면에는 '문인 기질, 달갑잖은 역할' '화해 거부로 인한 비판의 표적'이라는 말이 보였다. 대장성이나 통상산업성과의 의견 조정이 잘 되지 않고 화해 권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괴로워했다는 사정을 설명한 기사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야마노우치 국장이 자살할 때까지 어디서도 지적하지 않았던 것은 왜일까. '비판의 표적'이라고 쓰였지만 여론을 대표하여 비판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환경청이 화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배경의 정치 그 자체를 비판한 매스컴은 거의 없었다. 담당관이 죽자마자 사실은 둘 사이에 끼여 꼼짝하지 못해 괴로워했다고 아무리 사회면 톱으로 다뤄도 사태는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만약 야마노우치가 자살아지 않았다면 이 문제는 환경청이 나쁜 놈이 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을까. - 221p


  언론은 대체 왜 이럴까. 고레에다가 꽤 길게 인용하는 야마노우치의 1985년작 <복지 업무를 생각한다>는 이 점에서 인상깊다. "복지업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의 자격 규정에는 고결하고 사려가 깊으며 복지 증진에 열의가 있어야 한다는 요건이 강력하게 명시된 것을 저는 무척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 전후 사회복지의 새로운 출발에 어울리는 체계화가 충분하지 않았던 결과가 거기에서 보이는 듯합니다.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사회복지 업무가 사적인 구제 사업의 손에 맡겨진 시대의 직업윤리를 그대로 공무원인 케이스워커의 자격 요건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는 게 아닐까요.(152~153p)"

  직업의 목표에 대한 근본적 고찰과 전문 기술의 형성, 수련 없이 직업인 개인의 정신, 도덕을 강조하다 보면 수급자의 반발만 산다는 것이 야마노우치의 분석이다. 그는 자립하지 못하는 이들의 문제를 '의지 부족'에서만 찾은 결과 자립이 오히려 잘 이뤄지지 않는다는 역설도 거론한다. 고레에다가 '나쁜 미디어'의 원인을 엿보는 대목이다.

  미디어는 '사회 정의'라는 추상적인 개념과 객관성이라는 이름의 무책임하고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언어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자신은 제삼자적 안전지대에서 사회나 시대를 비판한다. 당사자 의식이 없는 그 말투가 정말 미디어가 해야할 역할인 걸까? 그 '정의'가 보는 이 자신의 사고를 오히려 방해하는 게 아닐까?
  전하는 측이 자신의 가치관을 검증하는 일 없이 강요하려는 태도로는 받는 측과의 사이에서 건전한 커뮤니케이션을 해나가지 못한다. 설령 그 사람이 전하려는 것이 평화나 민주주의였다고 해도 거기에 자신을 반영한 형태의 흔들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에 지내지 않는다. 거기서 나오는 것은 프로파간다로서의 영상이고, 그 주고받음에서는 결코 발견이 나오지 않는다. - 275~276p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보수 언론이니 진보 언론이니 말이 얼마나 우스운지 모른다. 취재 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재발견하지 못하는 언론은 얼마나 약한가. 일견 단단해보일지 모르나, 시대의 파도에 유연하게 적응하며 자리를 지키지 못한 채 떠밀려가는 부표가 그러한 모습일 게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고레에다는 이렇게 썼다.


  남겨진 학창 시절의 시와 작문, 관료 시절에 쓴 복지에 관한 논문을 하나하나 읽으며 행정 측에 선 양심적인 한 인간이 복지를 버리는 시대 속에서 스스로 붕괴되어 가는 과정이 느껴졌습니다. 이처럼 취재로 발견한 것을 구성에 짜넣으면서 방송은 보다 복잡한 현실과 대립할 수 있는 강도를 지니게 됩니다. 이 점을 저는 이때 몸소 실감했습니다.
  그것은 저의 선입관이 눈앞의 현실을 만나 깨지는 쾌감이기도 했습니다. - 72p




  고레에다가 자기 자신에 대해 내린 결론이 흥미롭다.


  책을 쓰면서 알게된 것이 있습니다. 취재는 사적인 부분을 공적인 영역으로 여는 행위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저의 관심은 복지를 입구로 삼긴 했지만 한 쌍의 부부 모습, 한 여성의 슬픔 치유 과정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 개인적인 부분에 대한 관심이 취재를 하면 할수록 더욱 강해졌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저널리스트가 아니라는 점을 이 취재를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 79~80p


  공적인 영역에 주목하고자 카메라를 들면서도 끝내 사적인 무엇에 눈길을 주는 자세. 사적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만 어디까지나 공적인 목적을 잊지 않는 태도. 오로지 사생활 보도에 열중하는 언론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일반론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저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저널리스트가 아니다'라고 자평하는 그 역시 다양한 저널리즘 모델의 일부에 속한다고 믿으며. 어쩌면 '논픽션'이라는 틀이 '저널리즘'보다 큰 범주일 거란 생각에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제 곧 야마노우치가 자살한 쉰세살을 바라보는 지금, 다시 이 저작을 읽어보고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묘사흔 '공공'에 열린 복지를 둘러싼 부분이 아니라 부부의 모습이라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에 속하는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이 부부 한 쌍이 어떻게 만나고 함께 걸으며 고뇌하고 헤어지고 다시 재회했는가. 방송 후에 취재를 거듭함으로써 당시의 내가 생생하게 봤던 남겨진 부인의 애도 작업. 아마도 그 애도 작업의 일환으로써 그녀의 말로 이야기되고 그것을 받아 적은 듯이 재현된 부부의 모습.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일 것이다(미리 말해두자면 이는 내가 쓴 것이 아니다. 그녀 안에 있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손을 움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겸손이 아니다. 진실이다). 이런 뜻밖의 사태를 논픽션으로 어떻게 평가할지는 의견이 나뉠지도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그 묘사가 좋든 싫든 이 저작을 사회파 논픽션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이유일 것이다.
  주제나 메시지라는 말로 작품을 말하거나 말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것으로 회수되는 작품은 인간 그 자체의 묘사가 약하기 때문일 수밖에 없다고, 영화를 만들며 늘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나 주제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삶은 그저 삶으로서 거기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다. - 12~13p




  아래는 현업에 있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부분. 고레에다는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 방송 후 다큐 내용을 토대로 책을 써보자는 출판사의 제의를 받고 이후 9개월 가량 도모코씨를 만나러 그의 집에 갔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그가 도모코씨를 만나는 동안 비디오카메라, 녹음기를 들고 가지 않았다는 것. 심지어 그녀 앞에서는 취재 노트에 메모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의 일부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합니다만, 카메라나 녹음기기는 취재자와 피취재자를 서로 공적인 장소에 두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카메라가 존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관계성이란 몹시 중요합니다. / 그러나 이때는 '기록을 남긴다'는 행위가 제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농밀한 시간을 부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 78p


  이 부분에서 이어지는 다음 고백도 흥미롭다.


  이런 말은 주제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타인인 저에게 정기적으로 남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도모코씨에게 슬픔을 치유하는 과정이 된 측면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그 슬픔을 받아주는 쪽이 될 수 있었던 귀중한 체험은 제게도 매우 의미있었습니다. 또 만약 제가 없었다면 모놀로그(독백)조차 되지 않을 뻔했던 이야기가 다이얼로그(대화)가 된 점은 도모코씨에게도 조금은 의미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78~79p


  아래는 아마도, 취재를 직접, 여러 번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일 게다. 어느 정도는 운명론적인, 준비만으로 절대 이룰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시선.


  완성된 책을 도모코씨에게 전하러 갔더니 그녀는 "제가 왜 당신의 취재에 응하기로 했는지 아세요?"라고 물었습니다. "모르겠는데요"라고 솔직하게 대답하자 도모코씨는 "처음 취재하러 온 날, 거기서 쭈뼛쭈뼛 앉아있는 당신이 맞선을 봤을 떄의 남편과 무척 닮아서요"라고 했습니다. 취재에 응할지 말지는 그런 개인적인 직감이나 마음에 달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야마노우치씨에게 이끌린 이유 역시, 그가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생 떄까지 쓴 시나 작문이 저와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79p




  아래는 고레에다가 <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후기에 쓴 글. 야마노우치를 '이중성'을 지닌 존재로 읽는 그의 시선이 풍성하다. 내 안에도 이따금 되살아나는 취재의 기억이 있다. '그러나'를 마음에 품고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을 기록하는 고레에다의 마음 속에도 숱한 '그러나'가 자리했을 것이다. 많은 생각이 드는 밤이다.


  프로그램을 완성하고 책을 다 쓴 후에도 계속 생각했던 것은, 야마노우치 도요노리라는 사람은 가해자였을까, 피해자였을까 하는 한 가지 물음이었다. 복지에서의 이상주의가 경제 우선의 현실주의에 압도되어 가는 그 하강선의 시대를 야마노우치는 필사적으로 살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고급 관료로서 그 하강에 입회했다는 책임에서 그 역시 가해자 측 사람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고, 또 동시에 시대의 피해자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그 두 벡터로 분열되며 아이덴티티의 이중성을 살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가해자성을 고통과 함께 날카롭게 인식했을 것이다.
  그가 낸 결론에서도 이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지금 시대에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좋든 싫든 간에 그 이중성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사람들 대부분이 이 내적 가해자성과 대면하는 것이 괴로워 눈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 ...
  이 책의 독자 여러분이 나와 마찬가지로 야마노우치 도요노리라는 사람의 삶과 죽음을 접함으로써 자신과 자기 직업의 관계에 대해, 그 자리에서의 기술 연마 방식에 대해, 그리고 이 시대와 마주하는 방식에 대해 사고를 심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기를 바란다. 나 자신은 그의 인생을 거듭 더듬어감으로써 다양한 발견을 하고 사고를 심화시키고 있다. 내 안에서 야마노우치 도요노리에 대한 취재는 형태를 달리하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276~2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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