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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Feb 24. 2023

무엇이 본능인가?

23.02.24. 바버라 J. 킹, <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

사실 처음엔 다른 책을 읽고 있었다. 남종영 기자의 <동물 권력>이었다. 책모임 때문에 읽던 중에 마지막 장에 이런 내용이 나왔다. 2004년 12월 시카고의 브룩필드 동물원에선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 30살의 암컷 고릴라인 뱁스babs가 신장질환으로 고통받다 죽음을 맞이했는데, 직원들은 시신을 바로 거두어가기 전에 동물원의 전통을 따랐다. 뱁스의 동료 고릴라들을 한 자리에 모은 것이다. 그의 자식인 바나는 뱁스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배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뱁스의 팔에 뉘였다. 미동도 없는 엄마의 몸을 그렇게 한참 쓸었다. 바나를 따라 다른 고릴라들도 뱁스의 곁에 머물렀다. 사육사 멜린다 프루엣 존스는 이를 고릴라들의 경야Gorilla's Wake라고 불렀다. 마치 죽은 이의 관 옆에서 가까운 이들이 망자의 이야기를 하며 밤을 새던 아일랜드의 풍습인 경야를 떠올리게 하는, 장례 의식처럼 보였던 것 같다.


애도라는 것은 누군가를 슬퍼해야만 할 수 있고, 슬퍼할 수 있다는 건 누군가를 사랑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고릴라가 애도를 할 수 있다면, 그들도 슬퍼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고릴라가 애도의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몇몇 개체들은 이와 같은 행동을 한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궁금증이 일어 인용된 책이 무엇인지 찾고자 <동물권력> 말미를 뒤적거렸다. 바버라 J. 킹의 <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에서 뽑아낸 대목이었다. 곧바로 나는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보야, 일하는 데 계속 메시지를 보내 방해하는 것 같지만 (이미 몇 시간 전부터 아내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서 괴롭히고 있던 참이었다) 세상에 이런 책이 있었지 뭐예요?”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아내의 답이 왔다. 아마도 집안을 잠식해 가는 책더미의 부피를 또 다시 늘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나보다. 불길한 예감을 애써 누르는 듯했다. “응, 이거 꽤 잘 나가는 듯?”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했다. 주제가 참신하지 않느냐, 목차를 보니 꽤 흥미로워 보이지 않느냐, 열심히 읽는다면 고료를 받는 글을 쓸 수 있지 않겠느냐... 메시지 말미에 붙인 귀여운 이모티콘의 엉덩이 움직임이 애처로워 보였다. 답장은 오지 않았고,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득 안은 채 터덜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회사 도서관에 책을 신청해야 하나, 그럼 몇 주는 더 걸릴텐데, 서점에서 서서라도 봐야 하나, 하면서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아내가 집에 새 책을 들고 돌아왔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는 그 책을 들고 춤을 추었는데, 다행히 아내도 기억하지 못해서 이곳에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기억이 나지 않느냐는 말에 아내는 나는 좋은 것만 기억한다는 대답을 남겼다.)


읽고 있던 <동물 권력>을 슬며시 내려놓고, 마치 하이퍼텍스트를 오가듯 (이제 이 단어도 꽤 구닥다리 표현에 속하게 된 듯 하다.) 이 책으로 건너 뛰었다. 다행히 이 책에선 다시 중간에 다른 책으로 건너뛰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례들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동물들의 모습에, 계속 이게 맞아? 이럴 수 있어? 반신반의하며 보게 되었다. 후다닥 앉은 자리에서 끝을 봤다.


인류학자인 저자는 동물들의 사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도 우리가 아끼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슬퍼하고, 추모하고, 애도하듯 동물들 역시 아끼는 존재가 죽으면 이를 슬퍼한다. 인간과 비슷해서 손쉽게 감정 이입이 가능한 유인원이나 반려동물들뿐만 아니라, 어쩌면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몰랐던 존재들도 슬픔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한다. 물론 인간은 동물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없고, 오로지 볼 수 있을 뿐이기에 오해하기 쉽다. 인간이 슬퍼할 때 보여주는 모습들과 닮지 않았다면 그것이 슬픔의 감정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죽음을 목도하고 특이한 형태의 행동들을 취한다. 우리는 그것에 ‘슬픔’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 있다. 우리와 닮은 부분들, 그리고 우리와 닮지 않은 부분들 모두를 본다면, 동물이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에 동의하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닭의 슬픔은 침팬지의 슬픔도 아니며, 코끼리의 슬픔도, 인간의 슬픔도 아니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그런데 종과 종 사이의 차이 못지않게 같은 종 안에서 나타나는 개체 간 차이 또한 중요할지 모른다. 20세기 동물행동학이 얻은 위대한 교훈은,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 이치는 하나가 아니라는 진리가 침팬지나 염소, 닭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19)


동물도 번식이나 생존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는 행동들을 한다. 또한 동물은 아끼는 존재가 세상을 떠나면 그에 다른 신체적, 물리적 변화를 겪는다. 우리가 인간에게도 그러하듯, 포착할 수 없는 표현들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감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인간화된 시선에서만 유지할 수 있는 주장이지 않을까? 영장류의 슬픔이나 행동은 우리가 손쉽게 찾고, 손쉽게 이입이 가능하기에 더 잘 보이는 것일 뿐이다. 물론 인간은 동물이 표현하는 바를 넘어서는 행위들을 한다. 이 책이 그 차이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슬픔이 인간의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나친 의인화에 대한 경계는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인간 이외의 동물이 슬픔이나 사랑과 같은 복잡한 감정을 인간처럼 느낄 것이라고 바로 전제하는 것은 분명 위험하다. 하지만 똑같이 후각이 남다른 고양이 중에서, 유독 오스카만이 임종을 앞둔 환자의 배 위에 앉아 죽음을 함께 기다릴 때, 한 염소가 죽은 동료가 사라지자 목장을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흔적을 찾고 울부짖을 때, 우리는 모든 개체에 대한 일반화된 평가가 아니라 독특한 개체들에 대한 평가라는 유보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슬픔이 눈물이나 망연자실한 표정만으로는 표현되지 않으며, 우리는 슬픔의 얼굴이 여러가지라는 사실만큼은 동의할 수 있다. (물론 이마저도 인간이 그렇게 보기로 작정한, 똑똑한 한스의 오류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토끼들은 특이한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한 우리에서 같이 생활했던 동료나 친한 친구가 숨을 거두는 순간, 높이 뛰면서 일종의 춤을 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동에 대해 갑작스러운 에나지 방출이라는 것 말곤 별다른 설명을 찾아볼 수 없었다.”(92)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죽음과 애도는 삶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스트레스 사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말, 염소, 토끼, 고양이, 개, 코끼리, 침팬지, 인간이 느끼는 슬픔에는 공통된 생물학적 근거가 없을까? 저자는 가설적 수준이지만 “포유 동물들이 생명 활동, 그리고 삶의 경험들로부터 생명 활동에 영향을 받는 방식이 모종의 경향성을 띤다는 관념을 진지하게 상정”(101)하고 싶어한다. 그러면서도 몇몇 관찰 결과들에 ”우리가 이러한 가능성에 매혹돼 무분별한 추측을 쏟아내지 않도록“(117) 경계하길 요구한다. 감상적으로 접근해봐야, 인간의 시선에서 연민을 느끼게 될 뿐이다. 동등한 위치에서가 아니라, 베푸는 입장에서 말이다. 손쉬운 감정적 결론을 내리는 대신 그는 두 줄을 탄다. 애초에 인간은 감정적 이입이 가능하고, 고통을 공유할 수 있어야 고통의 존재를 인정한다. 글러먹은 존재의 한계는, 역으로 이입과 공유의 경계면을 늘리는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감정만이 아니라, 이성적 이해를 통해서도 경계면은 늘어날 수 있다. 바로 이런 책들을 통해서.


감정적 이입이 가지는 문제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방송국에서 인기가 꾸준한 동물 프로그램들은 분명 동물들과 더불어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이 동물을 다룰 때에는 언제나 인간화된 시선 아래에서만 다룬다. 감정을 이입하는 데 장애가 없는 귀여운 동물들이나, 혹은 인간을 닮았거나, 인간의 곁에서 가축화가 오래 진행되어 인간의 행동을 빠르게 이해하는 동물들을, 사람의 목소리와 시선을 통해서, 그들의 고통이나 즐거움을 설명한다. 의인화를 거치지 못하는 동물은 드러나지 못한다.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 있는 동물의 행동만이,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감정으로 번역될 뿐이다. 감정적 이입의 영역은 쉽사리 확장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지 못한 동물들은 잘 다루어지지 못한다. 그렇다고 감정이 아닌 이성에 호소하기엔 시청률은 잔인하다. 이것이 동물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물론 시작은 인간화된 시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존과 무관하고 어쩌면 죽음을 재촉하는 행위를 십여일 간 반복하는 돌고래를 보며 우리는 모정을 떠올린다. 한 번도 물 위로 떠올라보지 못한 자식을 코로 끊임없이 들어올리고, 지치면 다른 동료가 대신 들어올려주면서 1,0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 모습을 보며 장례식장의 풍경을 떠올리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들도 우리와 비슷하게 애도의 행위가 가능하고, 애도를 유발하는 슬픔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한 발 나아가는 셈이다. 비록 인간의 시선에서 시작했을지라도, 우리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없는지, 혹은 우리가 포착하지 못한 표현들이 있었던 것인지를 되물으며 이성적인 이해를 확장해나갈 수 있다. 마중물로서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주변 동물들에 대해 무엇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는 우리의 기대에 상당히 좌우된다. 우리는 기르던 거북이 죽어도 남은 한 마리가 슬퍼하지는 않는지 살펴볼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예 거북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제를 갖고 동물들을 대하면 여러 기회를 놓치게 된다. (207)


이 글을 통해 이 책의 모든 것을 설명할 생각도, 능력도 없다. 인간이 동물의 슬픔을 낳는 근원일 수도 있으며 인간이 안긴 고통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동물들의 자살, 우울증, 자해 행위들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장은 직접 읽어보길 추천한다. 다만 이 책이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다. 지금 우리가 대답해야 하지만,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동물원에서 죽음을 맞이한 유인원들의 경야 의식을 설명하며 글쓴이는 이렇게 말한다. “유인원들에게는 세상을 떠난 동료의 시신 곁에서 시간을 보내고, 사람들이 동료의 시신을 거두어갈 때 그 과정을 지켜볼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257) 본능을 따른다는 동물들도,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엔 이를 달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인간은 이를 위해 정교하게 장례 의식을 발달시켰고, 슬픔을 승화시킬 수 있는 애도의 방법들을 고안해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죽은 이를 기억하는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다.


베를린에 남겨진 2,711개의 콘크리트 비석, 오클라호마시티에 남겨진 168개의 의자, 뉴욕 한 복판에 남겨진 두 개의 큰 폭포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로 인해 세상을 떠나야 했던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슬픔을 긴 시간 나누며,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되새기는 공간이다. “슬픔이 파도처럼 바다를 가로질러 시공간을 초월해 퍼지도록”(320), 슬픔을 달랠 공간은 긴 시간 동안 우리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인간이기에, 추모한다. 반대로 이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동물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이다. 동물조차 애도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를, 부모를, 친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슬퍼하고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을 없애고, 숨기는 데 최선을 다하려 하는가? 연이어 벌어진 참사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기억할 기념비 하나 조차 정치와 경제의 이름으로 밀려난다. 지금 인간도 동물도 아니기를 선택하는 위악스러운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떻게 슬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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