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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Feb 20. 2023

<게임:행위성의 예술> 메모들

23.02.20. 게임 : 행위성의 예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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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를 메모로 남겨둔다. 나중에 정리된 글로 짧게 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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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가득한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다. 주변을 문득 돌아보니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여럿 눈에 띈다. 노트북을 켜고 본격적으로 게임하는 중년의 남성도 있고, 핸드폰에 코를 박은 채 열심히 화면을 터치하는 젊은 여성도 있다.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삶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또는 내일 참여할 대회를 위한 연습일 수도 있고, 오늘 마무리 해야 할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다. 이유는 여럿이다. 게임을 어떤 하나의 목적이나 기능으로 환원하기란 당장 카페 안에서도 불가능하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게임을 그 하나의 목적이나 기능을 들어 비난하는 것도 온당치 않아 보인다. 그것이 유용하지 않다거나, 그것이 사회적 문제들을 배양한다거나 하는 비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게임 전체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오히려 유용성의 여부를 논의하는 것은 게임의 특성 일부분만을 대상으로 삼아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에 불과해 보인다.

그럼 대체 게임이 뭔가? 이것이 현실과 괴리된 어떤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게임은 언제나 현실로부터 한 발짝 멀어선 자리에서 수행되는 어떤 특수한 행위다. 그것은 현실을 반영할 수도 있고,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현실 그 자체로 환원되지 않는 특수한 영역이 있다. 그게 뭘까? 게임의 고유함은 뭘까? 게임이 사회에 해악이다, 혹은 유용하다 말하기 이전에 게임이 대체 뭔가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게임은 장애물과 능력, 그리고 목적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실천이다. 목적은 아주 엉뚱한 것에서부터 사회로부터 참조점을 명확히 찾을 수 있는 것까지 광범위하지만, 확실히 그것은 일시적이다. 게임에 몰두히여 게임 내의 목적에 사로잡힌 채 현실을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라. 게임은 그 목표가 일시적이어야 하고, 그래야만 우리는 더 장기적인 목적인 인생으로 돌아올 수 있다. 장애물과 능력은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플레이어의 다양한 행위를 촉발하는 조건이다. 게임은 다른 기술적 행위들과 달리 목적을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닌 비효율적인 제약들이 존재한다. 손을 쓰지 않는 축구가 그렇고,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슈퍼 마리오가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장애물에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 점프, 달리기, 잡기, 내달리기, 던지기, 쏘기 등 비교적 단순하고 직관적인 능력부터, 수치화되고 누적적이거나 일시적으로 부여되는 특수한 능력들(마법 또는 장비들?)까지. 그리고 보통 이런 능력은 장애물을 극복하기에 아슬아슬할 정도로 적절히 제공된다.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면 사람들은 게임에 싫증을 내고 현실로 돌아올 것이다.


게임 디자이너는 게임의 목표와 그를 달성하기 위한 능력, 그리고 이 능력을 제한하는 장애물이 함께 놓이는 환경을 만들고, 그 안에서 특수힌 방식으로 활동할 수 있는 행위 양식을 제공한다. 그것이 응우옌이 말하는 행위성을 간단히 이르는 것일 테다. EA스포츠의 축구 게임인 피파를 예로 들자면, 디자이너는 게임의 승리라는 목표를 제시하고, 승리를 위해 골을 넣을 수 있도록 선수들을 조작할 수 있는 다양한 기술들을 플레이어에게 제공한다. 물론 모든 선수가 그 기술을 다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좋은 선수를 언제나 활용할 수는 없다. (핸드볼과 오프사이드 같은 제약도 함게임의 규칙으로 부과되어 있다.) 11명을 다 조작할 수 없기에 자신이 조작하는 선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작전을 통해 주어진 움직임을 변경할 수 있다. 그런데 똑같은 축구 게임인 리베로 그란데의 경우 상황이 다르다. 온전히 한 명만을 조작할 수 있으며 그 선수의 시야만이 주어진다. 훨씬 더 한계가 많은 시점에서 경기의 승리라는 목적을 수행하는 동시에, 자신이 게임을 지배하는 즐거움도 달성해야 한다. 같은 축구 게임에서도 디자이너가 목표와 능력, 장애물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그 안에서의 행위 양식은 완전히 달라진다. 감독의 시점이냐, 선수의 시점이냐에 따라 게임 경험은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게임은 예술일까? 그렇다면 고유의 매체는 무엇인가? 매체인 행위성이란 무엇인가? 어떤 수행(실천, 플레이)가 예술로서의 게임의 핵심인가? 왜 ‘분투적 플레이’가 중요한가? 그것은 존재 가능한가, 그리고 존재할 수 있다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


게임 디자이너는 플레이의 목적을 제시하고, 목적에 다다르는 플레이의 한계를 설정하는 제약을 만드는 동시에, 그 안에서 플레이어의 능력도 그에 맞추어 설정한다. 목적-장애물-능력을 고안하여 특정한 형태의 행위성의 양식을 만들어낸다. 게이머는 잠시 일상 생활에서 떨어져 나와 이 행위성의 양식을 수행한다. 그러기 위해 일시적으로 목표를 받아들이고, 장애물에 맞서 능력을 발휘하여 승리를 목표로 게임을 수행한다. 게임이 종료되면 이 목표는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으며 플레이어는 다시 다른 행위성의 양식에 몰입하러 가거나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 일시적인 이입과 탈주의 역량은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으며, 그 과정에서 행위성은 특정한 방식의 도덕성, 미적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그리하여 게임은 행위성의 양식이라는 매체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에서 미적 경험이 전달될 수 있으므로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게임이 무조건 예술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서도 이 분열적이고 일시적인 행위성에 대한 헌신이 가능하며 승리가 최종 목표가 아닌 분투적 플레이야말로 게임을 예술로서 가능케 하는 실천적 행위인 것이다.


모든 게임, 모든 플레이가 예술이 아니다. 분투형 플레이를 통해 게임을 즐기는 행위야말로 게임을 예술로서 경험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게임이 예술의 한 분야로서 경험되기 위해서는 고유한 방식으로 플레이어에게 실천이 가능해야 한다.


행위성의 미학이란, 행위성이 모종의 미적 요소를 산출하고 이로서 게임을 예술로 볼 수 있게끔 만드는 구조, 원리, 방식이다. 그런데 게임 플레이의 과정에서 어떤 미적 경험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게임에는 여러 목적이 있다. 그 중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목적도 가능하다. (미적 경험이 있어야만 예술인가?) 응우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결. 게임은 행위성의 미적 경험을 제공하기에 알맞다는 것이다. 게임만이 그런 미적 경험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다. 문제를 풀다가 완벽한 대답을 찾았을 때, 끼어든 차에 부드럽게 반응하며 피할 때, 우리는 나의 우아한 본능적 대응에 탄복한다. (크 나의 기가막힌 실력을 보아라 애송이들아) 게임은, 이러한  즐거움을 정제하고 농축하여 우리에게 제공한다.


게임은 꼭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재현하고 비판하는 역량을 통해서만 예술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 그것도 분명 예술의 한 가능성일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 꼭 그래야할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꼭 예술인 것도 아니다. 예술과 정치는 어느 부분에서 합치하고 어느 부분에선 겹치지 않는다.


게임은 정치적 논변과 사회 비판의 기능을 할 수 있다. 또한 게임은 픽션일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을 꼭 현실 세계에 대한 모델링의 측면, 그에 대한 논평 기능의 측면에서만 바라봐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게임을 어떤 “의미”로 환원하려는 것이다. 응우옌은 의미와 무관한, 행동하기의 미적요소, 행위성의 미학이 게임에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의 시선에서 게임은 의미가 없다면 유치하다. 그 경우 게임이 문화적 위상을 상실할까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오히려 목표의 유치함과 진지함을 중심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유치한 목표라도 왜 그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지를 따져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목표를 향한 고투 자체가 즐겁기 때문에 그 즐거움을 맛보고자 유치한 목표임에도 불구하고 달려든다. 왜 그 고투가 즐거울까? 그것을 어떻게 예술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목표가 있는, 무관심하지 않은 활동에(칸트적 의미에서) 미적인 요소가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의 고투로부터 미적 경험이 가능할까?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 보고 있으면 흥미를 일으키고 즐거움을 주는 사건이나 장면, 광경들과 같은 일상의 경험도, 존 듀이에 따르면 예술적 실천의 토대다. 그런데 이것은 보는 사람에게도 근사하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에게도 근사하다. 자기 자신도 자신의 근사한 장면들을 보며 우아함을 느낄 수 있다. 더군다나 관객이 볼 수 없는, 플레이어 고유의 미적 요소들이 있다. ‘분석, 결정, 관찰, 반응, 행동’이라는 행위에서도 플레이어는 미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에서 플레이어가 중요한 순간에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무언가를 깨닫는 장면들이 시청자에게 주는 아름다움을 떠올려 보라.)


예컨대 체스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우아한 수를 발견하면서 문제와 해법의 조화가 일어나는 순간, 플레이어는 희열과 아름다움을 경험한다. (해법의 조화) 그리고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금방 알아차린다. 내가 결정을 내리고 행위를 감행한 것이 그 적합한 해법을 산출하는 데 적절했다면, 나는 내 행위와 문제, 해법이 모두 조화되는 데에서 희열을 느낀다. (행위의 조화) “상황을 분석하고, 해법을 찾고, 정확하고 우아하게 반응하고, 번뜩이는 영감을 떠올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플레이어는 안다.”(170)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언차티드에서 절벽에 매달려있는 전차를 향해 뛰어내릴 때, 이 정도의 버튼 누르기 압력과 타이밍이라면 전차의 끝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대로 수행했을 때 내 캐릭터가 그 전차를 간신히 붙잡는다면(씨네마틱 비디오가 재생된다면 더 극적일 것이다) 나는 나의 능력과, 주어진 문제와, 해결책의 조화로부터 기쁨을 느낀다. 피파도 마찬가지다. 선수 한 명에게 미리 작전을 지시하고, 볼을 다른 선수에게 넘겨주자마자 침투 키를 연타하며 최종 수비수를 지나치는 순간, 적절한 속도와 타이밍으로 패스 버튼을 눌러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고 공을 전달 받아 골을 기록한다면, 나는 수행 능력, 방애물, 해결책 모두가 조화로운 순간을 경험하고 황홀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나의 역량의 한계 수준까지 나아갔을 때, 나의 최대치의 능력과 과제의 요구 사항 사이가 합치할 때 우리는 또 다른 희열을 경험한다. (역량의 조화) 게임이 나의 역량의 한계를 이끌어내고, 아슬아슬하지만 그 한계를 발휘하면 극복 가능한 문제들의 수준에서 수행될 경우 우리는 그 게임을 매우 고통스럽지만 즐겁다고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관객이 사전에 알아채기란 아주 어려운 부분이다. 한계는 보통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알고, 자기 자신만이 주로 알기 때문이다. 이 이슬아슬한 합치의 경험은 어려운 게임에 반복적으로 도전하여 고투를 즐기게 하는 이유다. “여기서 아름다움 및 조화로운 합치의 경험은 우리 자심과 세계 사이의 불화가 주는 항구적인 감각에 대한 일종의 위안이 되어 준다. ... 분투형 플레이어는 어려운 일을 완수해 내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닌 극한의 역량과 실천적 세계 사이의 조화를 경험하고자 그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다.”(173)


다른 이론가들은  어려운 게임을 하는 이유를 성취외 보상, 감정의 고저차로부터 오는 쾌 때문이라 보지만, 응우옌은 과제에 참여하고 과제에 합치하는 과정 속에서 느껴지는 조화의 감각 때문이라 본다. 실패하지 않아도 우리 역량과 과제가 조화되는 경우, 즉 준비를 철저히 해서 한 번에 과제를 달성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희열을 느끼는데 이것은 감정의 고저로는 설명할 수 없으니까. 이런 역량의 조화는 경험하는 경우가 드문데, 애초에 우리 세계가 우리에게 강제하는 과제들이 우리의 역량과 대부분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이걸 지금 다 하라고요?) 어떤 경우엔 너무 쉬워서 지르히고, 어떤 경우엔 너무 어려워서 좌절한다. 또 어떤 경우는 아예 우리의 역량과 무관해서 시도조차 불가능하다. (수술 좀 부탁합니다.) 하지만 게임은 ‘할만한’ 난이도로 조정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투를 즐길 수 있고, 역량의 조화를 즐길 수 있도록 조정되어 있는 게임을 우리는 골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당신이 게임을 고르는 안목이 언제나 정확한 것은 아니...)


조화의 미학을 지금껏 다뤘다면 반면에 부조화는? 어색함, 천박함, 실패의 미학 같은 건 있을까? 부자연스러운 조작, 애초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조작을 요청하는 게임도 있다. QWOP라든지, 항아리 게임 같은 것을 떠올려 보라. 성공할 수도 있긴 한데 실패 자체, 웃기게 실패하는 것 그 자체가 목표인 게임들을. 물론 그 게임도 즐기려면 달리려 성공하든 오르려 성공하든 해야 된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우스꽝스러웁게 캐릭터들은 조작될 것이다. 이러한 실패들도 그 자체로 미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게 응우옌의 설명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면, 미적 경험은 애초에 무관심해야만 가능한 것 아닌가? 하지만 게임은 몰입해야 하고, 도구적 계산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 않나? 게임을 되는 대로 하는 사람은 없으며, 명백히 승리를 목표로 하는 도구적 활동인데 이것이 어떻게 미학적인 경험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기껏해야 미학적 경험과 비슷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뿐이지 않은가?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는 분명 관심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미적 경험을 위해 일시적으로만 목표를 채택하기 때문에 관심적이면서도 무관심적이다. 이를 응우옌은 무관심적 관심성이라 부른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대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그 목적으로부터 관심과 연관된 속성들만을 주목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관심은 나의 지각을 여과하고 제약한다. 다만 무언가를 경험하고 싶어서 관심을 가질 때에만 우리는 사물 전체를 주목할 수 있다. 게임을 하는 동안 우리는 구체적으로 승리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내적 층위에서만 그렇고, 외적 층위 그러니까 게이머의 특수한 행위성을 포괄하는 인간으로서의 행위성의 차원에서는 그 내적 층위를 반성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에서 미적 경험은 발생할 수 있다. 우리는 중층적인 행위성을 가질 수 있고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이 어떤 종류의 예술 형식일까? 다른 비슷한 예술 형식의 일부분일까, 아니면 예술이 아에 아닌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게임은 다른 예술 형식과 구별되는 차원을 가질까? 일단 게임은 다른 예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규정적 틀prescriptive frame을 지닌다. 예술을 경험하려면 예술 작품을 맞이할 모종의 규정이 있고 그것을 준수해야만 한다. (예술이라는 것을 경험하려면 규정된 방식에 따라 주목해야만 한다) 예술은 그것을 이루는 재료 이상의 무언가가 있고, 예술 경험을 둘러싸고 규제하는 사회적 규범이 있다. 예술을 경험하는 특정한 방식이 공통적으로 준수된다면 공동의 경험을 가능케 한다.


그런데 응우옌은 이제 와서 자신은 작품이란 개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게임이 작품에 속한다고 주장은 하지만 게임은 예술에 속하는지에 대해선 단정하지 않겠다 한더. 예술의 정의라는 것이 곤란한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지지하는 예술 이론이 있다. 가령 클러스터 이론처럼, 예술의 필요충분조건 같은 것은 없고 가족 유사성의 느슨한 집합이 있다는 것 정도는 동의한다. 그런데 애초에 게임이 에술이냐고 묻는 사람들은 게임이 예술과 얼마나 그 속성을 공유하는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그 활동이 낭비인 것이 아니냐, 시간을 쏟을 가치가 있냐고 묻는 것이다. (그래서 그기 돈이 됩니까? 라고 묻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도 굳이 진창으로 가지 않는다. 단지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미적 경험을 선사하고자 의도적으로 구성된 인공물이고, 그것을 부르기에 적합해 보이는 용어가 예술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 거슬린다면 여러 주요 측면에서 예술과 흡사한 작품들이라고 부르라는 냉소적 문장으로 끝맺음하면서. (이런 식의 실용적 접근은 과연 괜찮은 것일까?)

대신 작품은 중요하다. 작품은 감상과 소비의 특정한 형식을 위해 만들고 의도적으로 저술한 모든 종류의 안정적 대상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여기엔 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신문, 역사책 등 다양한 비예술 대상들도 포함된다. 작품이란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에게 작품과 접하기 위한 규정들을 포괄하고 있는데 (가령 그림을 관람하기 위해선 캔버스를 맛보지 말 것, 그림을 앞에서 봐야지 뒤에서 보지 말 것...) 하다못해 소설도 문장을 순서대로 읽으라는 규정이 있어야만 감상이 가능하다. 그런 규정을 넘어서는 읽기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것은 그 소설을 감상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물리적 재료 이외에 일군의 규정이 더해져야 작품은 존재할 수 있다. 물론 누구도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규정은 언제나 다소간 불확정적이다. 하지만 그 작품을 읽고 싶다면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 읽든지 말든지는 네 자유지만 읽겠다면 순서를 따라야 한다. 무엇을 주목하고 무엇을 무시할지 지정하는 규범이 작품의 일부로 기입되어 있다. (예컨대 향수를 경험하려면 향을 맡아야지 스테이크에 뿌려서 먹어서 경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작자는 그 작품이 향을 밑아서 경험할 것이라는 가정에 기대어 작품을 창작했을 것이니까... 물론 먹어봐도 되지만 그게 그 작품을 창작한 의도도 아니고, 그렇게 경험한 대상은 그 작품이 아닐 것이다. 그런 경험 방식에선 저 액체는 그저 구역질이 나는 다른 작품일 뿐이다. 물리적인 재료들은 규정된 감상의 방식에 따라 작품이거나 아니거나, 다른 작품이 된다.) 그러니 물질로부터 예술가가 의도한 대상을 추출하려면 규정을 따라야 한다.


텍스트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심지어 어떤 작품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기를 기대하면서 창작된다. 응우옌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비교적 간결하다. 여하간 창작자는 물리적 재료로 만들어낸 작품에 접근할 방식을 어느 정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고, 그것을 수용하여 작품을 의도대로 감상할지 아니면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른 작품으로서 수용할지는 전적으로 당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수용자가 의도를 완전히 추론하지 못한다고 해서 의도가 없는 것은 아니며, 수용의 방식이 다양하다고 해서 수용 방식이 아예 제한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이 작품은 이런 것이야, 라고 작가는 말할 근거가 언제나 작품에 내재한다. 작품은 그것의 물질적 토대를 넘어서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널브러진 텍스트는 아니다. 최소한 작가와 관람객 사이에는 의사소통의 안정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감상의 규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규정은 경험을 안정화시켜 사람들 사이에 공유가 용이하도록 만든다.


이건 대화만 해봐도 안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하나의 개념을 다른 의미로 쓰지 않겠다는 규범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보라.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개념을 다듬고 매번 합의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한 규칙을 암묵적으로 준수하려 한다고 가정하고 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그 가정을 배반하는 자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그것마저 없다면 우리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현대 예술이 어려운 것도 작품을 사이에 두고 감상자와 작가 사이에 공유된 규칙, 읽기의 방식이 점차 어긋나는 경우들이 많아졌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도발적이고 메타적인 작품들이 있고, 그리하여 읽기의 실패를 통한 예술적 경험을 유도하고 있는 작품들 때문에 더더욱 이해가 곤란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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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반이나 남았다. 과연 나는 이 책을 '정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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