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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Mar 01. 2023

지식인의 초상

23.03.01. 다나카 히로시, 나카무라 일성 <공생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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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들의 이름을 아는데, 왜 얼굴을 모를까? 왜 그들을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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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 일본 지식인의 시선에서 일본 사회가 공생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였다 다시 상실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일본 사회에 절망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간 "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투쟁을 결행"한 게 아니라 "투쟁했기 때문에 비로소 '전망'이 열"렸음을 몸소 보여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기를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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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다나카 히로시라는 한 사람의 생애가 어떻게 변해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서, 사건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기보다는 시간 순으로, 그리고 그의 삶에 다가오는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다. 그 점에서 중구난방의 느낌도 있지만, 한 일본 지식인이 어떻게 하여 '경계'에 있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게 되었는지, 일본인과 외국인들 사이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 어긋나는 지점이 어딘지를 어떻게 깨닫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꽤나 흥미로운 책이기도 하다. 사람이 어떻게, 나아지는가, 변해가는가를 알아보기에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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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그의 '자명함'을 요동치게 만드는 사건들이 있었다. 하나는 식민 지배의 상징인 이토 히로부미를 천 엔 단위 지폐에 새기는 일본인의 감각이, 조선인(한국인)의 입장에선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때다. 이것이 일본 주변의 피식민 국가의 국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생각 자체가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도 경악스러웠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도쿄대에 유학하고 있던 베트남인이, 도쿄대생들은 자꾸 자신에게 프랑스어로 말을 걸어온다고 토로하던 때다. 식민 역사에 대한 무감각은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아카하타(일본공산당의 기관지)의 '프랑스어 강좌' 캐치프레이즈("인도차이나 3국에 보급되어 있는 프랑스어를 배워, 인도차이나 인민과 우호를")도 똑같은 무지를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이 무지를 '경악'스럽게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는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이니치라는 끼인 존재들에 대한 환대가 가능한 것이었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불편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왜 같은 일본인들이 아니라, 국적이 다른 사람들을 혹은 출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가, 하는 불만 섞인 시선에 언제나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실적으로 투쟁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쪽으로부터 만족스러운 시선을 받지 않더라도, 할 일은 하겠다는 사람. 동시에 자기가 이 모든 것의 주인공이라 말하는 대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도왔고 그리하여 역사가 어떻게 바뀌는 게 가능했는지를 이야기하는 신기한 사람이다. 또 자신도 변했듯, 자신과 마주한 사람들도 변할 수 있으며 변했다는 사실에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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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언급된 사람들의 수가 상당히 많다. 그리고 나는 그들 대부분의 얼굴도 모른다. 이름을 들어본 사람도 몇 되지 않고, 그 이름을 들어본 계기도 이범준 기자의 <일본제국 vs. 자이니치>를 읽으면서였다. 그러니 비교적 최근까지, 나는 이 일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차별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망가지는 것을 무릅쓰고,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끝내 이기거나 끝내 고꾸라지면서도, 변해가고 변화를 만들어내는 그 역사를, 나는 진심으로 다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부끄럽다.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있었던 자이니치 1세대와 달리,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에서 자랐으며 일본에서 생활 터전을 마련해 살고 있는 2세대부터는, 자신들이 영구히 살아가야 할 이 일본이라는 공간이 투쟁과 협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공생'은 포기가 불가능한 선택지다. 귀화나 귀환이라는 조건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것 역시 자신을 온전하게 받아주는 세계가 있음을 확신하고 내던지는 행위가 아니라, 지금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임시변통에 가까운 행동임을 결국은 스스로 알게 된다. 그리하여, 떳떳하기 위해, 그들은 공존을 요구했다. 이 요청에 대답하는 과정이 다나카 히로시의 삶이기에, 책의 제목이 공생을 위하여인 것은 꽤 적절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차별과 싸우는 과정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만든다. 차별을 회피하는 순간,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반대로 내가 무엇과 싸우는지에 대해 알게 되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듣게 된다.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했던 사람들에게 싸움은 필수불가결한 행위다. 싸움의 결과가 비록 그들의 권리를 자유로이 행사하는 바를 제한하는 쪽으로 난다 하더라도, 싸움을 겪은 그 사람은 단단하게 남는다. 이것이 그가 가진 희망의 토대다. 그리고 나 역시, 어떻게 하여 그들이 차별에 맞서 싸움터로 나오게 되었는지, 그 단단하게 마음을 먹는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 낸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거기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바꿔먹게 하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그 지점들에 대해 적절한 대답들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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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부분은 그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김경득 같은 선택을 하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루이 신부의 선택은 따라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차별을 앞에 둔 상황에서 사람에게 중립이란 없으며, 차별 있는 사회에 사는 것은 자신의 존엄에도 상처를 준다는 선언과 함께, 자이니치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지문날인제도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하고 과태료를 무는 행위 같은 거 말이다. 지금까지는 계속 찍어왔어도, 그 행위의 의미를 알게 된 순간부터는 그만둘 수 있는 정도의 윤리, 그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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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주의도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정치가 변화를 이끌 수 있고, 배포 있는 정치가가 호기롭게 행동할 수 있었던 시대의 사람이라서 그럴까? 또한 사람들이 한데 연결되어 있고, 운동을 통해 권리 신장이 가능하다는 실감을 공유하고 있었던 시대를 겪은 사람이기에, 가질 수 있는 진보에 대한 확신적인 태도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반대로 끊임없이 하강 국면을 겪고, 좌절과 침체를 겪는 데 익숙한 우리 세대는 이러한 낙관을 공유하기란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화려한 과거' 정도의 의미로만 남을 수 도 있겠다는 그런 불길한 생각.


그럼에도 우리는 공생을 포기할 수 없다면, 어떻게 지금 차별과 맞서는 사람들과 함께 설 수 있는지 고민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 누가 서서 싸우고 있고, 그동안 어떻게 서로는 서로를 지탱했으며, 앞으로 어떤 희망을 가지고 우리가 서로의 어깨를 맞대어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과거엔 침략자였으나 이제는 협력 파트너'라는 식으로 어물쩡 넘어갈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합니다"같은 책임 전환의 문장이나, 그놈의 자유 타령 말고, 양국이 공유하고 있다는 그 보편적 가치는 무엇인지, 거기에 경계인들과의 '공생'은 끼어들 여지가 있는지가 궁금한 삼일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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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vkDFcEcJoy0

나는 너무나 늦게 당신의 얼굴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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