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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Mar 02. 2023

거룩한 술꾼의 전설

230323

  '오늘 뭐 봤어' 취지에 맞게 한 줄이라도 남기고 잔다. 대구 1박 2일 출장을 다녀왔고 저녁에 단 술을 꽤나 마셨다. 슬쩍 얼큰한 채 <거룩한 술꾼의 전설>을 읽었다. 서울 복귀 전 동대구역 알라딘에서 구입한 책이다. 노잼일 것 같지만 이름이 간지라 돈을 낼 수 밖에 없었다.

  책은 의외로 재밌었다. 파리의 노숙인 안드레아스가 센 강 다리 아래서 만난 노신사에게 돈을 받은 뒤 우여곡절을 겪는 이야기다. 노신사가 준 돈은 200프랑. 일주일 뒤 주말에 근처 성당에 가서 '테레즈'에게 돈을 갚으라는 것이 조건이다.

  안드레아스는 명예를 아는 인물인듯, '갚아야 한다'는 책무감을 내내 느낀다. 하지만 제때 성당에 가서 돈을 갚지는 못한다. 매번 술마실 일이 생긴다. 돈을 다 쓰면?우연히 또 돈이 들어온다. 돈 걱정에 술을 마시고, 걱정이 없어 또 술을 마시는 사이 안드레아스의 삶은 조금씩 달라진다. 깔끔히 면도하고 양복을 입으며 옛 연인과 친구와 마주친다. 노숙 생활 동안 방치했던 삶이 돌아오기라도 한듯이. 그리고 그는 어느날 성당에서 죽음을 맞는다.

  굉장히 짧은 책이다. 단편소설 한 편 분량 정도일까. 중간중간 꽤 붓과 파스텔로 그린듯한 일러스트가 페이지를 채워 겨우 100페이지쯤 됐다. 역자에 따르면 '노벨레'라고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단편 양식이란다. 기이한 이야기를 개연성 있게 전하며, 묘사가 간결한 것이 특징이라고. 묘사야 화려한 것과 차이를 보이겠지만, 개연성이라니. 그게 안 중요한 이야기 작법도 있나?

  한국어로 '거룩한'이라 번역된 단어 원문은 ‘legende다. 기독교에서 성자의 삶을 다룬 이야기에 붙이던 말이다. 주로 신앙의 자세를 보여주는 교훈적 서사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누가 성자인 것이?'거룩한 술꾼'이라고 했으니 안드레아스 얘기일 텐데, 그에게 돋보이는 건 죽음 전까지 간직한 책임감 뿐이다. 삶의 애환을 술 달래는 모습이 '서민의 성자' 같았나. 잘 모르겠고, 신의 가호가 그에게 술마실 기회를 여럿 제공한 것만 알겠다. 이것도 구원이라면 구원인가.

  저자 요제츠 로트는 이 책을 쓰고 얼마 뒤 숨을 거뒀다고 한다. 생전 그가 '당신 책의 술꾼이 어떤 점에서 거룩하냐'는 질문에 내놓은 답은 "그 노숙자는 물론 받은 돈을 다 술로 탕진해요. 그렇지만 하느님은 여러 우회로로 그에게 계속해서 돈을 전해줘요. 그분께서 나의 내면의 불꽃이 꺼지려고 하면 계속해서 내게 시적인 재능을 불타오르게 해주시는 것과 똑같은 거지요"였다. 어쩐지 스페인 작가 파블로 아울라델이 그렸다는 일러스트에서 애수 느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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