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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Mar 03. 2023

'금융화'라는 새로운 사회문제

23.03.03. 미셸 페어, <피투자자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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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서 글을 쓰는 건 저널에 낼 때 하기로 하고, 일단 지금은 메모만. 요새 메모를 쓰고 다시 글을 쓰는 것까지 걸리는 시간이 좀 오래 걸려서 걱정이긴 한데, 그래도 메모마저 남겨놓지 않으면 기억조차 못할까봐 겁이 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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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에서 신자유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 실제로 주조하고 발전시킨 주체성 유형은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이 기획했던 이런 유형과 굉장히 달랐습니다. 달리 말해 금융화를 통해 실제로 현실화된 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이론화했던, 소득으로 셈해지는 자신의 만족을 극대화하는 주체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에 대한 평가를 극대화하는 주체였지요.”(244-245, 미셸 페어와의 인터뷰)


미셸 페어의 논지 자체를 간단히 이해한 대로 설명하자면, ‘임금노동’이라는 속박이자 자유를 노동자들이 활용하여 투쟁하였듯이, 오늘날 ‘금융화’를 속박이자 자유로서 피투자자들이 활용하여 투쟁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 논의는 노동자의 정체성을 벗어 던지라거나(일정 부분 그런 혐의를 지우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노동자 정치의 투쟁 수단들을 전면적으로 포기하라거나(그러나 보통 동시에 두 가지 수단을 실행할 만한 역량이 있는 경우는 없다), 기존의 민주주의의 통제력을 우회하라거나(자율주의자들이 범하는 오류는 피하긴 한다) 하는 주장과는 결이 살짝 다르다.


새로운 사회문제, 그러니까 기존의 계급 대결도 매우 중요하지만 오늘날 '금융화'된 자본주의 아래에서 중요한 대립의 전선은 투자자-피투자자 사이에 놓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연구가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신자유주의 학자들이 생각한 방식으로 빚어지지 않았다는 것(신자유주의와 금융화를 구별해내는 것은 꽤 의미있는 작업이지 않은가 생각한다), 자기 만족을 극대화하는 게 아닌 자기 가치 평가를 극대화하는 주체라는 점, 그리하여 그 가치 평가를 잘 받기 위해 자신의 품성을 다듬어간다는 점을 논하는 데에서 시작하기에 가능한 사유이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핵심은 그 '평가'의 기준을 뒤틀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이윤 대신 가치화의 문제가 중요해졌으니, 우리는 그 '돈줄'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재전유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안하는 거다.


‘노동계급’에 속한다고 할 때에도 일정 부분은 노동자인 동시에 일정 부분에서 자본가인 것처럼(물론 그것이 가능한 상층 노동계급, 그러니까 경계선이 흐리고 그리하여 ‘기업가 정신’을 체화하기에도 무리가 없는 이들에 한정되는 이야기이겠으나), 우리는 투자자인 동시에 피투자자다. 노동자로서의 정체성,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자체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금융 자본의 투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그것이 실물 경제를 좌우하는 힘으로서 작동하는 기제를 전유하여 저항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임금노동을 자유로운 상품 교환인 동시에, 잉여 가치가 산출되는 숨겨진 장소 즉 착취가 일어나는 공간으로서 본 것, 그리고 임금노동자들이 이를 전면적으로 폐기하는 대신 임금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원용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하고(이게 물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노동자 임금의 상승을 요청하고, 만약 그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생산성 향상이 손쉽지 않을 것임을 무력으로 시위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의 임금 억제가 돈도 안 되고 정치적으로도 불만을 양산한다는 또다른 ‘손익계산서’를 만들게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사회적 대타협이 가능해졌다는 것과 비슷한 유비다.


물론 그것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데에는, 노동 임금의 상승분을 바탕으로 한 구매력의 상승, 그리고 이에 따른 이윤율의 저하를 상품 가격의 상승(인플레이션)으로 소화할 수 있었던 당시 복지 국가의 상황도 같이 고려를 해야 한다. 당시 복지 국가는 따로 저당잡힐 만한 것이 없었고, 그들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장치들, 국가 조세와 국경 보호 조치가 있었다. 이것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하는 동시에, 자본이 이리 저리 이동하며 치르는 비용에 비해 얻는 것이 없도록 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상승은 자산 소유자들로 하여금 자산가치의 하락을 우려하게 만들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조세-보호무역-복지라는 매듭을 풀어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1970년대 신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이었으며, 이것은 1980년대 보수 정치인들이 성공적으로 도입한 정책들로 실제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국가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국가의 정책에 필요한 자본을 ‘대부’를 통해 마련하도록 규제를 완화했다. 그리하여 국가는 자신의 자율성을 금융 자본의 손에 넘겨주었다. 이는 감세 조치와 연결되어 있는데, 감세 조치는 국가가 스스로 활용할 수 있는 자산을 획득하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더욱 더 대부에 의존토록 했다. 동시에 국가는 자신들의 세수 부족으로 인한 복지 축소를 감당하기 위해, 국민들로 하여금 대부에 의존토록 했다.


그리하여 정치는 완전히 금융 자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공약을 내 건 정치인들은 당선이 어렵거나, 당선된 후에 ‘간헐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깨닫고 스스로의 의견을 철회시켰다. 선거는 4년에 한 번 돌아오지만, 자본은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여기에 다시 '민주주의'의 장벽을 치겠다는 좌파 포퓰리스트들의 주장은 어떤 점에선 조금 순진하고, 어떤 점에선 조금 과거 회귀적이다. 그것은 행복했던 과거로 다시 돌아가자는, 복고적이고, 때로는 우울한 전망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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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경계’를 바탕으로 한다. 국민국가의 범위를 넘어서는 민주주의 정치는 실현된 적도 없고, 실현 가능성도 낮다. 그것은 언제나 ‘일국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 그러니 미셸 페어가 인용한 일국 민주주의라는 말은 일종의 냉소적 비판이다. 국민국가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는 금융 자본에 대항하여 한 국가가 해낼 수 있는 정치적 규제력의 크기는 미미하고, 그 가능성마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것은 일국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권력의 획득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권력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행되는 다종 다양한 ‘피투자자’를 위한 전유의 장치들은 손쉽게 무력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것들이 사회적으로 제대로 자리잡게 하려면 정치적, 법적인 뒷받침이 필요한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영역은 어쨌든 결국 입법과 행정의 영역이다. 법적 허점을 틈타거나 개인간의 연대로만 저항하는 방식으로는 손쉽게 틀어막힌다. 결국 정치 권력의 획득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것을 ‘배제하지 않는다’와 그것이 ‘전제된다’는 것 사이에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다.


물론 나도 좌파 포퓰리스트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정확히 좌파 포퓰리스트들이 만들어 낼 인민의 형상이 무엇인지, 그 인민의 역량이 얼마나 될지, 안정적으로 인민을 재생산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들을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고민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기표를 생산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래서 그 다음에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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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자본의 대립에서 투자자와 피투자자의 대립으로 ‘사회 문제’의 중심이 전환되었다는 지적에 나는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노동 운동의 지리멸렬함에 우울한 전망을 가져다 대는 대신, 초기 노동조합의 전략을 ‘계승’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고민하자는 태도에서 반가움을 느낀다. 자본의 가치화라는 새로운 투쟁 전선의 윤곽을 더듬으려는 시도 역시 꽤 훌륭하다고 본다. 그리고 전선이 새롭다면, 저항의 기획과 주체 역시 새롭게 그려져야 할 것이고, 그것을 ‘피투자자’라는 형상으로서 빚어내는 과정은 익숙함과 새로움이 함께 담겨 있어서 논의를 따라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이윤 대신에 신용, 즉 얼마나 생산성을 향상시켜서 이윤을 더 많이 뽑아내느냐보다 투자자들의 신용을 얻어 얼마나 많은 자본을 투자받느냐가 기업 활동의 중심이 되어버렸다는 주장은 최근 한국에 불어닥쳤던 스타트업 열풍과 그 허무한 끝을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생산성 하나 없이도, 흑자 없이도 스타트업은 자본이 자본을 부르는 방식으로 경영을 이어나갔다. 그들이 이러한 방식의 투자를 받아낼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금융 자본은 그들에게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금융 자본의 ‘신용’을 얻기에 아주 모범적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신용 할당을 문제삼는 피투자자 액티비즘은, 그들이 사실 아주 무모하며 그리고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평가할 수 있도록 지표나 활동을 반복해서 만들어내면서 대안적 할당 기준을 들이미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높이 평가하는 시도들의 신용을 하락시키는 방식을 통해, 지금처럼 자본을 할당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돈줄’을 건드리자는 것이다.  


산업 자본가들이 ‘이윤 극대화’를 넘어서는 ‘일반 이익’에 관심이 없기에 노동조합 운동가들이 당신들의 이윤 극대화에 이르는 계산 공식을 수정할 수 있도록 변수를 다양한 형태의 사보타주를 통해 기입해내어, 결과적으로 다른 타협 곡선을 채택하도록 강제하였듯이, 금융 자본가들이 기대고 있는 신용도의 신용를 수정할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의 ‘사보타주‘를 기입해, 다른 평가 기준을 채택하도록 강제할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내가 포착하지 못한 것이겠으나, 여기에는 사회 변혁의 전망이나, 억압된 자들의 정당한 몫에 대한 고민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외려 일종의 ‘협상의 기술’이다. 물론 현실주의자이기에 나는 이러한 기술들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태도에 깔려 있는 ‘대안 없음’(그는 이것이 대안이라 말하겠지만, 나는 이것이 결국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이상의 대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의 냉소적 기운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의 대안이 되기에는 많은 부분 부족해 보인다. 게다가 이것이 실행 가능한 국가 / 집단 / 계급이 얼마나 될까? 민서의 질문대로 "우리가 시장의 논리를 따르면서 시장을 앞설 수 있을까요?"


게다가 정부가, 이 부채의 지배 / 부채에 의한 통치를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 집착했다고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그렇다면 왜 정부 그 자체를, 국가 그 자체를 탈취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에 대한 궁금증도 있다. 국가는 상수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1970년대까지 중재자 역할에 충실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그 국가가 인민과 따로 존재하는가? 그것을 선출하고, 통치에 동의한 것이 누구인가?


만약 부채에 의한 통치를 해체하고 싶다면, 그 해체를 가장 크게 가로막은 국가 권력을 어떻게 획득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지 않나? 그리고 국가 권력은 피투자자들을 위한 다양한 장치들을 창안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각종 비용과 시설들을 제공할 수 있을 능력이 있지 않은가? 혹은 국가 권력을 활용해 그러한 능력을 제공하길 요청할 수는 없는가? 왜 국가는 전유의 대상에서 제외되는듯한 느낌을 주는가?


노동조합과 자본가 사이의 대결에서 은폐된 국가는 언제든 다시 귀환되듯이, 채무자와 채권자의 대결 사이에서 은폐된 국가는 다시 귀환할 수 있다. 국가의 역할은 절대 적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무대 그 자체가 될만큼 거대하고 중요한 전장이다. PAH 창립자가 바르셀로나 시장에 당선되고, 다른 구성원들이 포데모스에 합류하는 등 공식적인 정치 영역 내부에서의 활동과도 연계되어야 한다는 주장들도 분명히 강조되고 있고, 그러므로 정당정치'만이'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주장은, '정당정치'만으로도 쉽지 않은데 분산된 행동이 과연 각개격파 되지 않으리란 법이 있는가? 라는 반문에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답할 수 있냐에 따라 성패가 걸려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른바 재전유를 감당할 수 있도록 정당정치를 혁신해내는 것, 정당이 재전유를 감행하는 이들의 우군이 되도록 연계를 맺는 것은 장기적인 운동의 성공과 정착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전략적 사고가 아닐까? 물론 이 책이 그것을 다 감당해야 하느냐? 하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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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1081188.html

어제 아버님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풀빵이야기가 나왔다. 소액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이 높은 이자의 일수를 쓰다가 신용불량자가 되고 더 안 좋은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있도록, 저리로 조건 없이 소액을 대출해주는 금고를 만든다는 것이다. 최초의 기금은 1억, 한 사람당 100만원씩 낼 수 있고 원금 회수도 가능하지만 대신 출자한 돈에 대한 이자는 안 받는 조건으로 납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빠르게 목표 달성이 되었고, 추가로 기금을 모집한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이러한 금고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능 열쇠는 아니겠으나, 적어도 몇몇 사람이라도 최악의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세상은 그만큼 나아질 가능성을 얻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피투자자들의 저항의 무기들과 결이 맞는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고, 장기 지속 여부도 불투명하지만, 지켜볼 이유는 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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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서의 질문들이 좋다고 생각했다. "통치성이 기반하는 조건, 특히 주체성을 전략적으로 전유하는 것과 이 조건을 일정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귀결될 수 있는 의도치 않은 투항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와 같은 질문들. 그리고 급진적인 전복을 상상하는 야심에 비해, 그것의 실천 사례들이 공식적인 정치 영역의 틈새들에만 기대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노동조합의 투쟁이 거둔 성과는, 노동계급과 연관된 정당의 성장과도 무관하지 않다. 민서는 그 연계에 대한 고민이 질문에 녹이고 있는데, 정작 대답에는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이 좀 덜 드러나는 거 같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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