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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Mar 09. 2023

인터뷰 게임

23.03.09. 재닛 맬컴, 기자와 살인자


기자라면 누구나, 너무 멍청하거나 오만해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가 하는 일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음을 안다. 기자는 사람들의 허영이나 무지 또는 외로움을 이용해 신뢰를 얻고 나서 가차 없이 그들을 배신하는 사기꾼이나 다름없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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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콘스타인은 <치명적 환영>의 저자 조 맥기니스의 변호사다. 조 맥기니스는 삼중살인을 저지른 제프리 맥도널드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대니얼 콘스타인은 재닛 맬컴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 역사상 최초로 창작의 전 과정에 걸친 기자의 품행과 견해를 재판해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18-19) 되었음을 호소했다. 책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그 내용을 얻어내기 위해 작가가 취재원에게 접근하는 방식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인터뷰라는 행위 자체가 끝장날 판이라는 게 그의 우려였다.


물론 그는 맥도널드의 변호사인 게리 보스트윅이 조 맥기니스를 기진맥진할 때까지 몰아붙인 게 몰인정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동시에 조 맥기니스가 어째서 제프리 맥도널드에게 지키지 못할 충성을 약속했는지 의문을 품는다.


맥기니스는 한때 성공한 작가였지만, 시작부터 취재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그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지지 정당을 숨기고 다른 정당의 선거 사무실에 잠입하여 취재를 하고, 몰래 음식을 훔쳐먹다가 들킨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책에 남겼다. 해피엔딩이면 다 좋은 거 아니냐, 궁금했다면 물어봤어야 하는 게 아니냐 하는 식의 태도가, 시작부터 그의 글에 들어 있었다.


그런 그가 맥도널드를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6월 캘리포니아 주 헌팅턴 비치였다. 맥도널드는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을 예정이었고, 변호 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저녁 식사 겸 무도회가 그때 열리고 있었다. 그는 1970년 2월, 자신의 임신한 아내 콜레트와 두 딸 킴벌리, 크리스틴의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다. 침입자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본인은 의식을 잃었으며 자상만 가볍게 입었다는 점이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맥도널드는 후원회에 참석한 맥기니스에게, 살인 사건 형사재판에 참석하고 피고의 변호인단 관점에서 이 사건을 다룬 책을 쓸 의향이 있냐고 물었다. (그때 그는 아주 판매 성적이 나쁘진 않은 작가였다)


맥기니스는 이미 최초의 책인 <대통령 팔아먹기>를 쓸 때에도 닉슨의 홍보대행사에 잠입해 그들의 선거 계획과 전략을 전부 목격하고 이를 폭로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터라,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맥도널드 측의 계획과 전략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맥기니스는 맥도널드에게 책 판매 수익 일부를 주는 계약을 진행했다. 맥도널드는 어차피 후원금이 필요했다. 변호사비는 막대했기 때문이다. “맥기니스는 ‘내부인 자격‘을 얻었고(“나는 그저 재판에 참석하고 다른 기자들과 앉아 있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맥기니스는 내게 말했다. “나는 그 재판을 내부인의 시선으로 보고 싶었고 맥도널드와 그의 변호사들에게 전면적으로 접근할 권한을 원했습니다.”) 맥도널드는 돈을 벌게 됐다.”(34)


어쨌든 두 사람은 서로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자가 정말로 취재원의 이야기를 끝까지 캐내고 싶어할까? 처음에는 기자가 불리하지만, 나중엔 취재원이 불리해진다. “작가는 결국 주인공 위주의 이야기에 질려서 그것을 자신이 구성한 이야기로 대체한다.”(36)


맥기니스는 맥도널드와 함께 텔레비전 스포츠 중계도 보고, 맥주도 마시고, 조깅도 하고, 여자 외모에 점수도 매치는 소위 ‘우정‘을 쌓았다. 심지어 맥도널드가 유죄 판결을 받을 때, 맥기니스는 피고 변호인단과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맥도널드는 교도소에서 ‘친구’ 맥기니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미 그 때 맥기니스는 재판 과정에서 맥도널드가 유죄라는 생각을 굳힌 상태였다.


곧 나올 책에 맥도널드가 유죄라고 쓸 것임을 이미 알았을텐데, 그는 편지를 받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뉴스데이>의 밥 키일러 기자는 맥기니스와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두 번째 가설[몇 달 동안 취재원 옆에 붙어서 비밀을 모두 캐내고 막판에 뒤통수를 치는 행동]이 사실로 드러났는데, 이게 앞으로 작가님한테 문제되지 않을까요? 과연 누가 작가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42) 맥기니스는 대답한다. 결백한 사람이라면 날 믿어도 될 것이라고.


맥도널드는 교도소에서 카세트테이프에 자신의 과거를 녹음해서 보냈다. 심지어 교도소 근처에 있는 자기 소유의 콘도형 주택을 맥기니스에게 내주기도 했다. 자료를 넘겨주고, 자료를 운반할 가방도 빌려줬다. 거기엔 맥도널드가 살인 사건 전날 저녁에 에스카트롤이라는 체중감량제를 먹었다는 사실이 쓰여 있었다. 에스카르톨은 다량 복용시 정신병 증세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낸 맥기니스는 이것이 아내와 딸을 야만적으로 죽이게 된 이유라고 의심했다. 유년기부터 억압해 온 여성에 대한 분노가 순간적으로 폭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론을 내린 후에도 맥기니스는 맥도널드와 교류할 때 계속 비위를 맞췄다. 맥도널드가 견본을 보여달라는 요청도 계속 거절했다. 맥기니스는 자신이 범인으로 묘사되어 있고 악당으로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책을 선전하기 위해 나온 <60분>에서 진행자가 그 단락을 읽게 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맥기니스는 그 상황이 될 때까지, 맥도널드가 꿈에도 의심하지 못하게끔 그리고 누구도 그에 대한 책을 쓸 수 없게끔 편지를 보내 끊임없이 구슬렸다. 그 구슬림은 꽤 성공적이었다.


분노한 맥도널드가 맥기니스에게 제기한 소송에서, 배심원들은 맥도널드의 범죄보다 맥기니스가 맥도널드에게 가혹하게 대하고, 냉혹하게 대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지금의 이 소송은 맥도널드의 범죄(사실상 속죄를 했다고 여겨지는)를 심판하는 곳이 아니며, 맥기니스의 속임수에 대한 것이라는 게 배심원들의 생각이었다. 맥도널드의 변호사 보스트윅은 “이것은 가짜 친구에 관한 소송입니다.”라고 모두진술에서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재판의 결과를 결정했다. 맥기니스는 맥도널드에게 편지를 보내며, 마치 취재원이 기자의 녹음기에 대고 말실수를 하듯이, 아주 당연하게 자신에게 불리할 이야기를 써두었다. 보스트윅은 이 ‘배신’의 서사를 구축하고 맥기니스를 완벽하게 몰아세웠다.


맥기니스의 변호사 콘스타인은 이에 대응하여 이러한 작업이 표준적 작업 절차에 속한다는 사실을 증언하게 하려고 여러 작가들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이 중 윌리엄 F. 버클리 주니어와 조지프 왐바우가 법정에서 진술했다.


콘스타인 : 역시 작가들의 관습, 관행, 관례와 증인의 경험에 비춰볼 때, 대화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인터뷰 대상의 가치관에 허위로 동조하는 일은 적절합니까, 적절하지 않습니까?
버클리 : 우선순위를 고려할 때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콘스타인 : 작가는 인터뷰 대상에게 자기 의견을 밝혀야 하는지 밝히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한 관습이나 관행이 있습니까?
왐바우 : 저는 작가가 자기 의견을 절대 밝히지 말하야 한다고 봅니다. 이후의 소통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콘스타인 : 증인은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왐바우 : 네. 인터뷰 대상들은 제가 진실하게 대답한다면 이후의 소통을 차단할 만한 질문을 자주 하곤 합니다.
콘스타인 : 그럴 때 증인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왐바우 : 저는 그래야만 한다면 ‘비진실‘을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진실은 악의를 품거나 잘못인 줄 알면서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거짓말과 달리, 실제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의 일부라고 왐바우는 구분했다. 그리고 이들을 심문한 보스트윅은 이렇게 변론했다. “우리는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84) 사람들은 작가가 '진실'이 아닌 무언가를 활용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왐바우는 끝내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진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재판에선 콘스타인이 원하지 않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물론 맥기니스가 인정한 기자의 이중성은 그를 무너뜨렸지만, 재닛이 보기에 이는 사실 일반 저널리즘 생리에 대한 정확한 묘사라고 본다. “기자가 세상에 나가 사람들과 대화하는 경험과 혼자 방 안에서 글을 쓰는 경험 사이에는 심연이 있다.”(89) 재닛은 맥기니스와 맥도널드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진 뒤, 보스트윅과 맥도널드를 차례로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의 만남을 바탕으로 맥기니스가 재미없고 평범한, 결백을 주장하는 지루한 맥도널드를 인정하고 작업을 취소하고, 다른 이야기 주제로 넘어갔어야 했지만 내부인이 된다는 유혹 때문이거나 재정적 문제로 인해서거나 눈 앞에 있는 것을 보길 거부했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맥도널드는 무미건조한 자신에게 관심을 계속 보이게 하도록 맥기니스에게 최선을 다해 어필했다.


“다시 말해 소설가는 가상의 인물을 대상으로 삼아 작업하지만, 기자는 자신을 이미 ‘완성된 문학적 등장인물‘로 제공하는 사람을 작업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맥도널드 대 맥기니스 소송에서 기자는 자기가 쓰는 책의 주인공이 신저널리즘과 ‘논픽션 소설’이 전적으로 의존하는 조지프 미첼의 조 굴드, 트루먼 커포티의 페리 스미스처럼 자동으로 소설의 인물로 변신하는 놀라운 부류도 아니고 논픽션 주인공으로 적합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듯하다.(또는 의도적으로 늦게 깨달았다)” (105)


하지만 그가 맥도널드에 대한 책을 쓰려고 했던 <뉴스데이>의 밥 키일러를 만나서 맥기니스와 맥도널드와 나눴던 대화를 확인한 후에 그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은 즉흥적으로 질문을 던졌고 밥 키일러는 준비한 목록에 따라 질문을 던졌는데, 두 사람은 모두 동일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심지어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이것은 맥기니스가 맥도널드를 창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맥도널드도 맥기니스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을 인터뷰 대상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맥기니스는 그를 배신했고, 비탄에 빠뜨렸고,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지만, 그를 새로 창조하지는 않았다.”(140)


맥도널드는 정말로 사람을 죽였나? 남아 있는 증거는 정확하게 대답해주지 않는다. 맥기니스는 맥도널드를 속인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나? 재닛은 기자가 고의로 유도해낸 도덕적 무정부주의 상태에서 작업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소설가가 집주인이라면, 논픽션 작가는 전세 세입자다. 그만큼 특권이 적다. 논픽션 작가의 창작의 범위는 소설가에 비해 제한적이다. 전세 세입자가 벽을 철거하거나 집의 기본 구조를 함부로 변경할 수 없듯, 실제 사건과 실제 인물만을 다뤄야만 한다. “논픽션 작가는 독자가 미리 관대함을 지불한 상품을 꼼꼼하게 완성해야 한다.”(210) 취재원은 자기의 이야기를 대신 써줄 작가로서 기자를 찾지만, 정작 기자는 그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줄 의무가 없다.


이 사건은 기자가 어디까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취재원에게 거짓을 말할 수 있는가를 두고 벌어진 소송이다. 비록 그가 좀 유별나긴 했지만, 소송은 그동안 감춰진 문제 하나를 드러냈다. 기자와 취재원 사이에는 이른바 게임이 하나 수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념을 새로 만들 권한이 있다면 나는 이를 '인터뷰 게임'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물론 쓰는 사람의 권력은 언제나 강하지만, 논픽션의 주인공에게는 그 권력을 허물 '사실'이라는 무기가 있다. 그러므로 스토리는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강물과 같다. 이것의 최종적 형상에 기자의 책임이 있긴 하지만, 기자는 작가일 수 없다.


하지만 맥기니스가 조금 서툴고 드러나게 거짓된 행동을 꾸렸다면, “다른 기자들은 맥기니스처럼 눈에 띄게 경거망동하지 않고, 조용하고 은밀하게 취재 대상을 배반한다.”(220) 그렇다면 이건 괜찮은가? 명확한 답은 없다. 오로지 자신이 말끔히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는 사람만이 실패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취재원에 대해 명백히 갑의 위치에 있다. 취재원도 기자를 조종하려 들겠지만, 그렇다고 글쓴이의 표리부동함이 문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기자는 취재원과 표리부동한 상태에서 글을 써야 하나? “고의로 유도해낸 도덕적 무정부주의”는 과연 어디까지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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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을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변호사도 의뢰인에게 불리한 증거는 제출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회피함으로서 서사를 완성한다. (보스트윅은 오로지 사실만에 기초하여 판사를 설득하였는가?) 기자가 이야기를 듣기 위해 - 이야기가 아니라면 존재할 수 없는 어떤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 보여주는 기술이 반드시 지양되어야 하는가 묻는다면 나는 망설일 것이다. 당신을 의심한다고 이야기하는 기자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저널리스트를 고결하게 보이는 도덕의 외피는 정말로 저널리즘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오히려 적당한 거짓말이 진실을 구출하는 데 유용한 방법이라면 어떤가? 그 점에서 취재원의 자아도취와 기자의 회의주의 사이에 균형을 잡으라는 말은 타당하다. 이것은 흥정에 가깝다. 단지 우리가 좀 더 진실의 편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좀 뺄 필요는 있다. 오히려 그런 믿음이 기자를 구렁텅이로 끌고 갈 가능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는 취재를 능숙하게 하는 편이 아니고 꽤 고리타분하게 윤리를 들먹거리는 편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뉴스가 상품이라는 사실과 취재가 상품생산의 영역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도 아니다. 애초에 사람들은 매일 일어나는 사건이 아닌 독특한 사건을 뉴스로 받아들길 바라며, 취재원은 자신이 독특한 사건이길 원하고, 광고주는 마치 돋보기를 통과한 햇빛이 모이는 초점이 될만한 뉴스에 광고를 주길 바란다. 그리고 저널리스트는 이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자기가 세운 도덕의 상궤를 벗어나지 않는 뉴스를 찾기 위해 출근한다. 이것은 냉소가 아니라, 뉴스가 관심 시장의 일부분인 한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문제는 이해가 상충한다는 점이다. 뉴스의 취재원은 자신의 서사를 오롯이 담은 뉴스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 자기의 상황에 시선이 깃들길 바라지만, 뉴스를 생산하는 저널리스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 이해의 불일치는 취재원의 침묵으로 종종 이어지고 저널리스트는 딜레마에 처한다.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뉴스를 생산할 수 없고, 그렇다고 이야기를 전부 수용하기엔 뉴스가 벗어나선 안되는 기준점이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다 듣기 위해서 동의하지 않는 주장에도 동의를 표하고 이야기를 듣는 건 괜찮나? 그리고 그렇게 들은 이야기의 결론을 반박하는 이야기를 쓰는 것도 괜찮나? 저널리스트는 분명 뉴스의 저자이므로 자신의 이야기, 자신이 관찰한 이야기를 쓸 권리가 있다. 그런데 그 권리가 거짓에 기초하는 것은 용납 가능한가? 용납이 가능하다면 그 선은 어디까지일까?


냉소적이긴 하지만, 선은 '자의적'이기에 거짓은 반드시 발생한다. 기자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쓸 수 있고, 그러려면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그 이야기에 동의할 것이란 제스쳐를 표해야 한다. (실제로 이루어지는 수많은 인터뷰들이 이 회색지대를 이용한다.) 맥기니스는 서툴렀지만, 대부분의 기자는 그 지점을 우아하게 건너간다. 그런데 우아하든 서투르든 회색지대를 활용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은가? 이것을 근본주의자처럼 거짓을 이유로 거부해야 하는가, 아니면 공리주의자처럼 필요악이라 생각하고 사용 용량만 조정할 것인가?


이 사건을 바라본 재닛은 맥도널드의 살인 여부에 대해 인정하거나 부정할 증거가 모두 있다고 보았다. 증거가 말한다는 건 거짓이다. 증거보다 중요한 것은 인상이었다. 어떻게 둘의 사이를 보는가에 따라 그리고 각각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가에 따라 서사 선택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진실은 뭐냐? 모른다. 맥기니스도 맥도널드도 자신들이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을 연기한다. 환자가 상담가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모습처럼. 그러니 이것은 거대한 내기다. 보여주고 싶은 것들과 보려는 것들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 거짓은 그 전쟁의 전선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참호전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느 정도 필요악에 가까운 게 아닌가? 물론 그것이 비판을 피할 수 있는 이유가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사회는 한편으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도덕성과 다른 한편으로 위험할 정도로 무질서한 관대함의 두 극단 사이를 암묵적 합의를 통해 중개한다. 그 합의 덕분에 우리는 조용하고 신중한 조건을 지키며 매우 엄격한 도덕 규칙을 위반할 수 있다. 위선은 인간의 실수를 허용하고 겉보기에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질서와 쾌락의 요구를 조화시킴으로써 사회가 계속해서 잘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다. (38)


위선떠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회에서, 남는 것은 극단적 도덕주의자나 명백한 규칙위반자뿐인 것은 아닌가? 그럼에도 이 회색지대에 대해 '침묵'하는 방법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가?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갈수록 나는 확실한 대답을 내리기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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