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학준 Mar 10. 2023

이야기는 우릴 보고 웃지

23.03.10. 조너선 갓설 <이야기를 횡단하는 모 픽투스의 모험>



#

"선생님,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십시오." 

PD가 뭘까, 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이 있다. 이야기 수집가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 중에서 귀를 쫑긋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녹음기를 들고 그에게 다가간다. 대부분의 PD는 그의 이야기의 열렬한 청취자가 된다.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다는 경험은 꽤 높은 쾌감을 주는 것 같다. 자신의 말이 그 청취자를 구슬리는데 성공했다는 데에서 오는 짜릿함일까? 물론 이 이야기를 듣고 잘 다듬어 세상에 내놓은 PD도 비슷한 쾌감에 중독되어 있다. 시청자를 구슬리는 데 성공했다는 만족감.


우리가 평생 끊임없이 주고받는 소통에는 하나같이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이란 타인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 최종적으로는 행동을 내가 바라는 쪽으로 하게 구슬리는 것이다 (16)


우리는 집단 생활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협업을 필요로 한다. 심지어 나 혼자 산다고 뻐팅기고 싶어도, 나 빼고 나머지는 협업을 할 것이기에 버틸 도리가 없다. 공생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무력'의 우위를 통한 억압이 아니라 '구슬림'을 통한 동의를 바탕으로 하는 게 이득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면서 사람을 구슬리고, 내 편을 만들고, 내 이야기를 퍼트리는 데 목을 맨다. PD라는 직업은 그 구슬림을 조율하는 역할에 가까워 보인다.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수법을 다루는 데에서 오는 쾌감에 중독되어 있는 역할. 중독은, 그리고 보통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야기는 서로를 단단히 구슬려 마음을 영영 돌려놓는 수단 중 인류가 찾아낸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야기의 어마어마한 능력이 좋은 쪽으로 발휘되어 공감, 이해, 자선, 평화를 증진한다면 근사한 일이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의 구슬림 마법은 분열, 불신, 증오의 씨를 뿌리는 데에도 더없이 효과적이다. (19)


조너선 갓셜은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에서 이 이야기가 가진 위력에 대해 논한다. 조금 느슨한 개념이긴 하다. 시작과 끝이 있고, 말썽이 발생한 인물이 있으며 그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투하는 특정한 문장의 연쇄들. 이런 문장들이 가지는 힘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방법들을 전작(<스토리텔링 애니멀>)에서 논했다면, 이번 책에선 그 이야기의 힘을 자기 이익이나 올바르지 못한 목표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를 다룬다. 왜 그럴까? 트럼프의 당선이 많은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는 이야기의 힘을 나쁘게 활용하는 데 능숙했고, 음모론과 거짓말로 사람들을 몰아갔다. 이야기의 힘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었다.


인간은 호모 픽투스(이야기 사람)다. 상대방의 마음을 구슬리기 위해, 그들의 돈을 얻기 위해, 그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그들이 내 세계관에 동의하게 만들기 위해, 그들을 웃기기 위해, 그들의 표를 얻기 위해, 그들을 한 팀으로 뭉치게 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는 ‘픽션’(가상)과 서사적 논픽션(기승전결이 있는 현실)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며, 듣는 사람을 목표 쪽으로 움직이게 하는 “자연적 손잡이”(27)다.


그는 이야기는 필수적인 독이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생존에 필수적이지만 치명적이기도 하다. 이득만 취할 수도 없다. 끝내 해로울 것이다. 이것을 '이야기의 역설'이라 부른다.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협동 체제를 만들어냈지만, 오늘날 다양한 매체들이 발달하며 스토리텔링의 '빅뱅'이 일어난 이후엔, 가장 선량한 사람도 가장 악독한 괴물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가 어디서든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묻는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가장 시급한 질문은 케케묵은 “어떻게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가 아니다. “어떻게 이야기로부터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다. (32)


그런데 이야기가 도처에 있는데, 이야기로부터 세상을 구한다는 생각은 가능한가? 이야기가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삶의 적잖은 부분을 이야기 소비에 쓰고 있는데 이로부터 탈출할 방법이 있기는 한가? 이야기는 그렇다면 무엇에 대비되는 개념일까? 그래야 탈출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니까. 그 부분은 사실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이 책이 파산에 가까운 결말을 맞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야기의 폭풍우 속에서 살아간다. 온종일 이야기 속에서 지내고 밤새도록 이야기 속에서 꿈꾼다. 이야기로 소통하고 이야기로부터 배운다. 경험을 체계화할 개인사 이야기가 없으면 우리의 삶은 플롯과 요점이 결여된 삶일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하는 동물이다. 하지만 왜? 진화는 이야기를 위해 마음을 빚었으므로 마음은 이야기에 의해 빚어질 수 있다. 이야기는 본디 종교적, 도덕적 명령에서 사냥이나 결혼의 구체적인 조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간수하고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문화는 거대하고 복잡한 메커니즘이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디마지오가 말한다. “어떻게 이 모든 지혜를 이해 가능하고 전달 가능하고 설득 가능하고 실행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 한마디로 어떻게 착 달라붙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되고 해법이 발견되었다. 스토리텔링이 해법이었다.” (46)


이야기는 정보 전달의 훌륭한 매체다. 이야기라는 매체는 우리의 경험을 적당히 압축하여 전달할 수 있는 효율적인 매체다. 그리고 이 효율성은 공생과 협동에 필수적이다. 그래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달할 줄 아는 사람에게 후한 보상을 주는 체계가 인간 사회에 자리잡았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인간은 허구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서사 이동"(책을 펼치거나 텔레비전을 켜고 일상에서 벗어나 대안적 이야기 세계로 정신적 순간이동을 하는 미묘한 감각)을 통해 마치 진짜 겪는 일처럼 감각할 수 있다. 이 서사 이동은 신중한 판단이나 논증이 없어도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설득 효과를 가지는 정신 상태다.(톰 판라르)


이 책에서 다루는 서사는 빚어낸 서사shaped narrative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빚어낸 서사는 (4장에서 자세히 설명할) 무척 정형화된 구조에 부합하며 이야기가 사실-허구 연속체에서 어디에 위치하는가와 무관하다. 간단히 말해서 빚어낸 서사는 대체로 주인공의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도덕적 갈등을 기반으로 삼으며 결국에 가서는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한다. 빚어낸 서사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연장이며 개개인뿐 아니라 문명 전체를 기막히게 구슬릴 수도 있다. (54-55)


모두가 이야기꾼인 시대에, 중요한 것은 관심을 독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느냐다.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서 자의적으로 서사 이동을 할 수 있는(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좋은 영화다. 현실로부터의 도피뿐만 아니라, 나로부터 도피해야 반대로 서사의 주인공에 자신을 대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에 몰입하면 정말로 뇌의 화학 조성이 변한다는 연구도 언급한다. 환각과 비슷한 의식 변성 상태로 사람을 이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강력한 이야기가 기술과 자본 그리고 정치에 의해서 점차 '부족주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활용되면서 사회 분열이 점차 심해지고 있다는 거다. 


지난 10년간 ‘스토리텔링’은 ‘혁신’과 ‘파괴’조차 뛰어넘는 비즈니스 업계 최고의 유행어였을 것이다. 실용적이고 흡사 영구적인 비즈니스 스토리텔링 문화가 등장했다. <뉴욕타임스>에서는 이야기의 “거부하기 힘든 위력“을 치켜세웠고, MBA 프로그램들은 스토리텔링은 교과에 도입했으며 기업들은 최고 스토리텔링 책임자를 채용했고 마케팅의 대가 세스 고딘은 굵은 글씨로 이렇게 강조했다. “널리 전파될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다.” 비즈니스 스토리텔링 전문가들이 이야기를 찬미하는 이유는 즐거움, 가치, 연결을 선사하는 능력 대문이지만, 트로이 목마처럼 인간 정신의 철옹성에 메시지를 침투시키는 능력 때문이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77)


애초에 스토리텔링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니, 비즈니스가 이를 그대로 내버려둘리가 없긴 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개발하고, 탐구하는 데 돈을 들이고, 그렇게 만들어 낸 이야기로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게 꼭 모두에게 동일한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면 (맞춤형 이야기야말로 스토리텔링 기술의 끝판왕이 아닐까?)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을까? 돈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지 역시 이렇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충분히 수확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리하여 우리의 소비 데이터, 활동 데이터는 우리에게 맞춤형 광고, 맞춤형 VOD를 제공하기 위한 자료가 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선호에 부합하는 이야기만 골라 들을 수 있다. 자율적 개인이라는 허상은 사실상 유지 불가능하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이야기의 일부다.


감시자본주의의 냉랭한 과학적 어휘는 이야기라는 따스한 옛솜씨와 전혀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산학자 재런 러니어Jaron Lanier 말마따나 이 “행동 변경 제국behavior modification empires”이 데이터를 수집하는 목적은 더 솔깃하고 더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궁극적으로 더 큰 설득력을 발휘하는 맞춤형 서사를 우리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무해한 새 기기에서 사회적으로 유독한 생각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사게 만드는 것이다.(103-104)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일은 이제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짜뉴스, 미디어 버블, 탈진실의 소용돌이가 우리를 휘감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본인들에게 절대 불편하지 않다면, 이 상황이 반전될 수 있을까? 심지어 도덕적, 심미적 우월함은 이야기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천박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입에 더 많이 오르내릴 수 있다면 그것이 결국 승리하는 것이 이야기 생태계의 논리다.


심리학자를 비롯하여 음모담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들의 작업은 어마어마하게 중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음모주의conspiracism 심리를 기본으로 분해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음모담이 일반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가장 단순한 이유를 간과한다. 그것은 음모담이 무척 신나는 픽션 스릴러라는 것이다. 확고하게 뿌리내린 음모담은 거의 모두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소재로 손색이 없다. 이에 반해 음모담을 반박하는 이야기는 그럭저럭 괜찮은 PBS(미국의 공영 방송 서비스로, 문화, 교육, 과학 방송물, 아동물, 뉴스, 시사 정보 등 우수한 프로그램을 회원 방송국들에게 제공한다 – 옮긴이) 다큐멘터리가 되는 것이 고작이다. 디벙커(debunker : 사이비 과학이나 음모론을 과학적으로 타파하는 사람 – 옮긴이)가 내놓는 것은 음모담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의 공백이다. (130-131)


그렇다면 나쁜 정보를 담은 좋은 이야기는, 수준 높은 정보로 가득한 지루한 이야기를 언제나 이겨버리는 게 아닐까? 결론이 예정된 슬픈 게임인 게 아닐까? 게다가 음모론이 주는 강렬한 쾌감을 떨쳐낸다 하더라도, 그 음모론에 빠졌던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자신을, 자신의 판단을 부정해야 한다. 이 엄청난 부담감을 단순히 지루한 이야기(정보 전달에 집중하는 투명한 서사)로 지울 수 있을까?


우리의 DNA에는 강력한 서사적 편향이 깊이 새겨져 있다. 우리가 서사에 주목하는 기준은 합리적이거나 윤리적인 계산에 의거하여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가 아니라 (토요일 저녁 영화를 고를 때처럼) 무엇이 가장 좋은 이야기인가다. 내 생각에 이것은 우리가 세상의 고통과 혼란을 현실도피성 당의 속에 숨기고 싶어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마음이 오드의 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장기적이고 추상적인 위협에 대처하도록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43)


DNA에 새겨진 서사적 편향이라면, 인간은 개조되지 않으면 이야기라는 수렁을 벗어날 수 없다는 아주 음울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 뒤에 그는 인간이 부정적 사건에 더 쉽게 눈길을 돌리고, 더 오래 기억하며, 더 강력한 동기를 얻는다고 쓰는데, 바로 자신이 이야기하는 지금 이 이야기만큼 부정적인 것이 있나 생각하면 약간 입맛이 쓰긴 하다)


뉴스 산업의 역사를 보면 뉴스 자체의 시장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라마의 시장만 있을 뿐이다. 처음부터 뉴스 산업은 드라마 산업의 한 갈래에 불과했다. 그러니 현실에서 플롯, 등장인물, 주제, 암묵적인 윤리적 교훈 같은 보편문법의 요소들을 가져다 끼워 맞출 수밖에 없다. ‘뉴스 가치‘의 일차적 기준은 진실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좋은 드라마인가다. 좋은 뉴스는 나쁜 드라마다. (161)


기자들이 전부 동의하진 않을 것이지만, 진실이 뉴스의 기준이었다면 지금쯤 많은 언론사들은 장사를 접었을 거라고 그는 생각하는 듯 하다. 중요한 것은 진실보다 그럴싸함, 그리고 흥미로운 이야기냐 아니냐다. 안 팔리면 누가 보는가? 어떤 신문은 밥먹듯이 거짓을 말해서가 문제가 아니라, 진실이든 아니든 흥미로운 이야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거짓도 필요하다면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흥미로운 이야기는 보통 '세상이 얼마나 엉망진창인가' 하는 한탄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그리고 보통 그런 이야기가 누적되면 냉소적으로 세상을 혐오하게 된다)


뉴스 소비자들이 받는 전반적인 메시지는 세상이 구제 불능 엉망진창이라는 것이다. 뉴스는 우리에게 애들을 집에서 못 나오게 하고 총을 걸머지고 도시를 떠나 교외로 이주하고 교외를 떠나 생존주의자(survivalist: 미래의 긴급 상황에 대비하는 사람들 – 옮긴이) 집단에 합류하라고 부추긴다. 그와 더불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스트롱맨(강성 지도자)을 선출하라고 꼬드긴다. (163)


게다가 이 엉망진창의 세상을 만들어 낸 '악당'이 누구냐가 중요해지는데, 여기서 바로 공감이 강력한 역할을 한다. 서로를 적대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심리학자 폴 블룸Paul Bloom은 공감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 더 매력 있어 보이거나 더 취약해 보이는 사람들, 또는 덜 무서워 보이는 사람들에게 공감하기가 훨씬 쉽다. 머리로는 흑인도 백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백인은 흑인보다 백인의 입장에 공감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이 일반적인 연구 결과다. 이런 점에서 공감은 편견과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왜곡한다.” 말하자면 외집단보다는 내집단에 공감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이런 탓에 이야기가 불러일으키는 공감의 주된 효과는 우리 대 그들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하게 덧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90)


스토리텔링의 빅뱅이 공감의 빅뱅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공감은 모든 인류를 향했다기보다 자기 편에게만 향했다. 그리하여 한 움큼의 공감은 한 움쿰의 냉정함을 동시에 낳는다. 애초에 내집단의 응집력을 높이고, 외부 집단을 단순한 '적'으로 만들기 위해 쓰이는 수단이었고, 우리는 이제 수많은 이야기가 세상을 얼마만큼 갈가리 나누어놓고 있는지 알고 있다. 심지어 다문화/다민족 사회는 이야기의 통합이 아니라, 분열된 이야기의 다양한 자양분이 되었다.


이야기는 제임스 포니워직James Poniewozik 말마따나 거대한 통합자에서 거대한 분열자로 바뀌었다. … 이야기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편견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하는 이야기 세계에서 살아간다. (240)


이야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거나, 상대방에 대한 경멸 대신에 그 역시 이야기의 재생산 장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결론부에 나온다. 인간은 이야기의 공백을 혐오하고, 서사 거푸집을 사용해서 끊임없이 판단하고, 사실을 취사선택한다. 그리고 내것만 참된 거푸집이라는 착각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건 뭐... 나도 동의한다.


사실들로부터 서사를 구축한다기보다는 … 무엇을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서사가 선택하고 규정하는 것이다. (229)
내가 말하는 악은 종종 아무런 타당한 이유 없이 이야기에 빠져들고, 끈질기게 이야기에 매달리고, 이야기로 하여금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패턴을 세상에 투사하도록 허락하는 인간적 성향이다. (225)
지금의 탈진실적 순간에서 살아남아 다 함께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으려면 과학을 비롯한 강력한 경험주의적 태도가 권위를 되찾는 세계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진실을 말하는 제도, 우리가 가진 으뜸가는 제도가 달라져야 한다. (255-256)


하지만 진실을 말하는 제도인 언론과 강단이 '좌파' 편향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덜 믿고 있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할 때에는 좀 황당하긴 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별로 고민하지 않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하지 않는다. 그냥 그게 '사실'이다, 라고 말할 뿐이다. 그럼 숫자를 맞추면 되나? 아니면 몇몇을 몰아내면 되는 것일까? 너그러운 경험칙을 마련하고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합의하자는 나이브한 대답으로 지금까지 분석한 이 파멸에 가까운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야기가 그를 보고 웃고 있을 것이다. 저주를 피할 수 있다고 모험에 나서는 사람은 보통 그 예언된 저주의 실행자인 경우가 많다... 좀 철지난, 이데올로기를 걷어치우고 경험과학으로 대처하자는 주장과 같은 순진함이 엿보이는 결론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터뷰 게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