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문희 Apr 13. 2023

기록을 붙드는 이유

230412

  박주영 판사의 책 <법정의 얼굴들>(2021)은 “사법절차가 생각보다 무력하다”는 문장으로 서두를 연다.


  재판은 오직 해당 사건에만 효력을 미친다. 어떤 범죄도 미리 막을 수 없다. 형사재판이 단죄하는 건 국가나 사회가 아니다. 이미 발생한 오직 한 사건, 한 개인뿐이다. ... 판결문을 들이밀며 산재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함께 고민해보자고 말했지만, 허사였다. 그 판결은 지역 뉴스에 작게 실렸을 뿐 주목받지 못했다. 몇 달이 지나 중앙지에 실렸고, 다시 몇 달이 지나 유명 앵커가 짧게 언급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판결로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 5~6p



  내가 '박주영' 이름을 처음 접한 건 사회부 사건팀에 있을 때다. 산업재해 판결에 대개 낮은 형량이 선고되고, 그마저도 집행유예로 마무리되는 것이 이상해 여러 판결문을 뒤적였다. 대다수 판결문이 대동소이했는데, 박 판사가 쓴 판결문은 유독 튀었다. 2015년 11월 선고공판 내용은 이랬다. "저녁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삶이 있는 저녁'을 걱정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이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은 서글프기 그지 없다." 선고 대상은 현대중공업과 그 하청업체 관계자들. 이들 업체에서 발생한 사고가 2014년 어느 한달 새에만 세 차례, 네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이 판결문을 쓰기 전 그는 현장답사를 갔다고 한다. <법정의 얼굴들>에 그는 "검정 묻은 얼굴과 멍든 무릎으로 써야만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적었다. 그 결과물이 잠시간의 주목, 그리고 긴 회의감이었던 게다.

  사회 온갖 사건이 올라오는 법원의 판사답게 그는 사람들이 일평생 한두번 겪을 법한 일을 다양하게 마주한다. 실체를 파악하고 법리를 적용해야 하니, 당연히 꽤 구체적으로 본다. 언론과 달리 정보 수집의 법적 근거를 가진 수사기관이 실체 파악에 힘을 싣는다. 일반적인 판사도 그러한데, 박 판사는 법원 내에서도 긴 양형 이유를 쓰기로 이름난 사람이다(그의 전작 제목은 <어떤 양형 이유>다). 양형이란 법원이 형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선고할 때 피고인에게 적용될 형벌을 정하는 일이다. 죄목마다 법이 정해둔 최고형과 최저형 가운데, 법관은 각종 제반사항을 가중 또는 감경이 가능한 사유로 따져 형량을 결정한다. 양형 이유가 긴 것은 '제반사항'이란 말로 뭉뚱그리기 쉬운 개인의 내밀한 사정, 사회적 배경 등을 꼼꼼히 들여다 봤다는 의미다.

  책 속 '가출청소년 성매매' 사건이 한 예다. 범인들은 '조건만남' 어플리케이션으로 성매수를 가장한 남성이 10대 청소년들과 성관계를 가진 뒤, 동료들이 사건 현장을 덮치게 해 '미성년자가 조건만남 해도 되느냐' '경찰에 넘기겠다'는 등 말로 협박하는 수법을 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해 청소년들은 법정에 나와 '강압은 없었다'고 증언하면서 재판까지 이른 피고인의 처지를 외려 동정하거나, 성매매를 대수롭지 않은 일이란 식으로 말했다. 자칫 피고인 형량이 줄 수도 있었다. 박 판사는 선배 및 친구 권유에 취약한 청소년기의 특징, 당장 생계비가 급한 가출 청소년의 처지, 온라인 활동에 익숙하다 못해 자신의 나체 사진이나 친구의 음란 영상을 소비하면서도 문제 의식이 덜한 세대적 특성 등을 살폈다.


  고민 끝에 우리 재판부는, 가출청소년 성매매 강요 사건 피고인 전원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면서 평소 양형보다 더 무겁게 처벌했다. 징역형의 합계가 102년이었다. 판결문을 쓰기 위해 관련 논문 7개를 참고하고 인용했다. 이 판결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를 최초로 언급하고, 청소년 성매매의 특성을 이해한 이례적인 판결로 보도됐다. 선고 이후 판결의 내용과 의미를 두고 논쟁도 있었다. - 78p     


  깊은 고민 덕인지 박 판사의 책에는 공감이 가는 생각이나, 전적 동의는 어렵지만 재미있어 고개 끄덕인 논리가 많았다. 바로 아래 인용은 흔히 '자녀 동반자살'이라 부르는, 살해 후 자살에 관한 정리다.


  살해 후 자살 범행에 대한 온정주의의 기저에는, 부모없는 아이들, 극도로 궁핍한 아이들,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굳건하게 지지해줄 사회안전망이 없다는 불신과 자각이 깔려 있다. 이에 대해 정말 그런 거냐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이들에게 최소한의 삶의 버팀목 역할도 하지 못할 만큼 형편없는 나라인가.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를 막지 못했고 계속 재발견된다는 점에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피고인 개인을 비난하면서도 중벌에 처할 수 없는 이유는, 결과에 상응한 적절한 형벌과 실제 선거되는 형벌 사이의 차이 만큼이 바로 국가와 사회의 잘못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선고되지 않은 나머지 형이 우리가 받아야 할 비난의 몫이다. - 59p  


  <로제타>나 인도의 불가촉천민을 다룬 <슬럼독 밀리어네어>, 절대빈곤 아동의 참혹한 현실을 다룬 <가버나움> 같은 영화를 불편해하는 시선들이 있다. 가난을 상업화하는 ‘빈곤 포르노’라는 것이다. ... 나는 이런 지적에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 포르노의 본질은 돈벌이를 위해 한 가지 소재(성)나 주제(성욕 자극)에만 초점을 맞춰 이를 극도로 부각시키고, 실체를 왜곡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동정과 연민을 자극하기 위해 한 가지 소재(가난)만을 극도로 승압한 것 역시 비슷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이 작품들은 포르노가 아니다. 포르노는 일사으이 단편만을 뽑아 과장해 보여주지만, 24시간이 전부 섹스로만 가득 차 있는 사람의 삶을 담는다면 그건 포르노가 아니라 리얼리즘 그 자체다. ... 진짜 포르노와 달리 가난이나 고통 같은 이야기가 포르노인지 아닌지는, 그 이야기를 꺼낸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전적으로 관찰자의 시각에서만 판단이 가능하다. 단지 ‘이런 별난 사람도 있네’라고 즐기고 넘어가는 순간 그건 포르노다, 나체 핍쇼peepshow를 보고 그저 넘어간다면 그건 포르노지만 그 속에서 고통받는 여성을 구한다면 그건 포르노가 아니다. 다큐를 예능으로 보고 재미로만 배설하는 게 포르노다. 포르노 여부를 결정하는 건, 오직 당신의 시선이다. - 101p


  국가와 사회가 막대한 재정 부담을 떠안으면서 범죄 피해자를 보호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만 들라면, 국가가 사적 보복을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묻지마 폭행으로 홀어머니를 잃은 후 “법은 구멍이 나 있다. 내가 그 구멍을 메운다. 널 풀어준 법을 원망해라”라고 말하며 잔혹한 범죄자들을 직접 응징하는 경찰대생 김지용(김규삼 작가의 웹툰 <비질란테>의 주인공)이나, 자기 돈 들여 악인을 처벌하고 고담시를 정화하는 배트맨 같은 자경단vigilante은 현실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국가는 자력구제를 금지하고 형벌권을 독점하는 대신 범죄자를 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진다. 따라서 피해자는 적극적으로 국가에 피해 구제를 요청할 권리를 갖는 것이다. - 107p


  일반 국민들은 직업 법관의 형이 낮다고 많은 비판을 하지만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오히려 배심원들의 형아 눈에 띄게 낮았다. ... 간단한 기사로만 사건을 접하다가 실제 재판에서 주어지는 많은 정보, 특히 기사에는 일절 드러나지 않는 피고인에 대한 다양한 양형자료릉 접하게 되면 형이 같을 수가 없다. ... 자신의 결정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부담감도 생각보다 훨씬 큰 것 같다. - 291p


  아래와 같은 내용은 박 판사의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일부는 기사로 발전시켜도 좋겠다 싶은 내용이다.

 

  틱톡에서 “파스타를 먹었다”, “샴푸와 헤어컨디셔너를 끝냈다”는 문구가 청소년들이 극단적 선택 충동을 암시하는 일종의 암호로 사용되고 있다는 내용 ... 넷플릭스 시청 기한이 일주일 남았고, 최고의 파스타 레시피를 누군가에게 전해주지 못했고, 곧 마블의 새 영화가 나올지 모르고, 운나쁜 날일지 몰라도 재수없는 인생은 아니니, 오늘은 죽지 말라는 한나 데인스의 시(<Don’t kill yourself today>)에 나온 말이라고 했다. - 23p


  “꼭 들어가야겠습니까?”
  “보증금도 다 까먹었고... 지금 안 들어가면 저 죽습니다.”
  시장을 돌며 빈 점포에 들어가 음식을 훔쳐먹거나 잔돈푼을 훔친 혐의로 잡혀온 피의자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 때 나눈 대화 내용이다.
  영장재판은 평일에는 영장판사가 전담하지만 주말에는 당직 개념으로 모든 판사가 돌아가며 처리한다. 형사소송법 제70조는 주거부정(일정한 주거가 없는 때), 증거인멸, 도주 우려를 구속 사유로 정하고 있다. 간혹 영장재판을 할 때마다 나는 구속사유 중 주거부정에 대해 의문이 들곤 했다. 가난하니 가두겠다는 말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느껴졌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고시원이나 여관 같은 임시거처를 전전하는 게 어떻게 구속사유가 될 수 있는지 여전히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 86p


  (영화 <로제타>에서) 술에 취해 진창에 널브러진 엄마를 옮겨눕힌 뒤 로제타는 달걀을 삶고 가스를 튼다. 달걀도 하나만 삶는다. 로제타는 죽으려는 순간마저도 소박하다. 마지막 성찬도 없다. 가스가 떨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궁핍한 삶이 로제타를 살린다. 가난은 죽음마저 조롱한다. 로제타는 새 가스통을 옮기다 쓰러지고 처음으로 운다. ... 청년실업을 다룬 이 영화의 여파로 벨기에 정부는 2000년부터 특정 규모 이상 기업의 경우 고용 인원의 일부를 청년으로 채워야 하는 ‘로제타 플랜’을 시행하고 있다. - 99p


  미국은 1980년대 후반 들어 유죄로 확정돼 수감 중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DNA 검사를 했다. 본격적으로 DNA 검사를 하기 전에는 미국에서도 무고한 사람이 처벌되는 일이 극히 예외적인 일로 치부됐으나, DNA 검사 이후 죄수 수백 명이 무죄로 석방됐다. 유죄 확정부터 면죄에 이르기까지는 평균 11.9년이, 최초 체포에서 면죄까지는 13년이 걸렸다는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그 기간 동안 억울한 사람을 구금한 셈이다.
  이에 반해 우리는 간첩조작 사건 등의 재심을 제외하고는 객관적 오판이 확인된 경우가 매우 드물다.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처럼 복역 중인 재소자들을 상대로 한 DNA 증거 재심사가 체계적으로 이뤄진 적이 없어서다. - 204p


  미국 연수 때 있었던 일이다. ... 에어컨을 낮은 온도로 어찌나 세게 틀어놓던지, 한여름에 카디건까지 입고 있는데도 아내와 아이들은 이빨이 딱딱 부딪칠 정도로 추위에 떨었다. ... 나중에 뉴스를 보다 알았다. 미국 공공장소의 냉방 적정온도는 22도였다. 이 온도는 1960년대 체중 70킬로그램인 40대 남성을 기준으로 설정됐는데, 전세계 많은 사무실이 이 온도를 따른다고 했다. 문제는 여성의 신진대사율이 남성보다 30퍼센트 정도 떨어지기 때문에 남성 기준 온도는 여성에게 너무 춥게 느껴진다는 점이다(여성은 24.5도가 적당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
  1950년대에 처음 도입된 자동차 충돌실험 인형 더미는 수십년 동안 키 177센티미터에 몸무게 76킬로그램인 남성을 기준으로 제작됐다. 미국은 2011년이 돼서야 여성 인형을 도입했다. 남성 기준 설계 때문에 여자가 자동차사고를 당하면 남자보다 중상을 입을 확률이 47퍼센트, 경상을 입을 확률은 71퍼센트, 사망할 확률은 17퍼센트 더 높다. - 305~307p


  시선이 섬세해서인지, 배우고 싶은 비유가 많았다. 서울에 집을 갖지 못한 지방 판사 C의 설움을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군대 시절 81밀리미터 박격포 분대에 있을 때, 박격포의 사각과 편각이 몇 밀리미터만 차이나도 포탄이 떨어지는 위치가 수십 미터 이상 달라지는 것을 본 후로, 세상을 향하는 각도가 조금만 차이나도 삶의 탄착지점 역시 엄청나게 달라질 거라 믿으며 살았다. 정상궤도를 벗어나지 않으려 미세조정하며 조심조심 살았지만, 사교육이나 아파트 얘기만 나오면 심사가 뒤틀렸다. 삶의 탄착지점은 정직함과 성실함의 각도가 아니라, 학군과 부동산을 향한 예민한 후각에 달려있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가 계속 들었다. - 15~16p


  C는 가난이 괴로워 익명의 사람들과 동반 자살을 시도한 청년의 재판을 맡았다. 그는 구금 대신 정신과 치료와 심리상담을 조건으로 사회 복귀를 명하며 이렇게 적는다.


  비록 늦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여러분의 이야기를, 여러분의 가족과 동료 재감인들과 우리가 듣게 됐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게 된 이상 여러분은 이제부터 마음대로 이야기를 끝내서는 안 됩니다. 듣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여러분의 이야기는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의 못다한 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합니다. - 34p           


  사람을 한 권 책에 비유한 이 챕터의 제사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글이다. "나는 한 권의 책이다. 하느님이 교정봐 주실 거다." 그는 이 챕터의 화자 C의 입을 빌려, "비문투성이 책도 미완성보단 훨씬 낫잖아"라고 쓴다. 그리고 이따금, "우리는 완성된 문장으로, 여백 없는 책으로, 우주라는 도서관에 나란히 꽂혀 있을 텐데. '자살방조미수' 챕터는 그들과 내 책에 함께 실려 있을 텐데"라고 중얼거린다.

  뜻하지 않게 책을 다 쓰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는 이렇게 쓴다.


  (뉴욕타임스 2020년 5월27일자, 코로나 사망자 중 1000명을 추려 낸 부고 기사를 언급하며) 슬펐던 부고는, 헤밍웨이의 여섯 단어 소설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아기 신발 팝니다. 신은 적 없어요)”을 연상시키는 한 청년의 부고였다. “New father(Israel Sauz, 22세).” ... 이스라엘의 부고가 특히 슬픈 이유는, 부고 뒤에 어른거리는 남은 가족 때문이다. 우린 두 마디 부고와 나이만으로도 남겨진 아내와 갓난 아이를 떠올린다. 이것이 바로 죽은 이를 기록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유다. 죽은 이를 통해 남은 사람의 존재를 환기시키고 염려하게 만든다. 나아가 그를 죽게 만든 원인을 궁금하게 한다. 그 원인이 의료와 같은 사회 시스템이라면, 그 체계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따져보게 한다. ...
  뉴스가 없으면 문제도 없다. 서현이, 정인이, 김용균, 이스라엘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알리는 것이다. 사회적 공분도, 적절한 처벌도, 법률과 의료 시스템의 개선도 그 후 뒤따라 온다. 4.19 혁명이나 6월 민주항쟁 같은 역사적 사건도 김주열,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을 알리고 호명한 사람들의 부고에서 촉발됐다. 부고는 종이에 쓴 묘비이자, 각자의 가슴에 새긴 비명이다. 학대로 숨진 16개월 입양아, 22세 New father라는 부고는, 절절한 추도사이자 가장 강력한 고발이다. - 127~129p


  언젠가 읽은 그를 다룬 기사는 "박주영이 말하는 '양형 이유를 길게 쓰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 당사자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준다. 둘째, 상급심 판단에 도움을 준다. 셋째, 사회구조적 문제가 개입된 사건은 사건의 실체를 알려야 한다. 넷째, 판사의 주된 소통 수단은 판결이다. 다섯째, 자족성과 완결성을 갖춘 판결은 사회적 기록이자 사료로 남는다"고 썼다. 판결은 한 사건에 미치지만, 잘 쓴 판결문은 상급심의 판단, 나아가 사건에 대한 사회적 담론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그는 책을 쓴다. 이쯤되면 가장 좋은 의미에서 '기자'다. 책을 다 읽고 돌아본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인파로 붐비는 공원이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아내가 그 곁에 있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벤치에서 그들을 바라본다. 내 초점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맞춰져 있다. 나는 그들이 어디에 있든 정확히 찾아낸다. 사랑은 피사체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맹목적 몰입 상태, 즉 아웃포커싱 같은 상황이다.
  그러나 눈을 조금만 돌리면 그들 옆에서 다른 아이들이 뛰어놀고, 노숙자가 벤치에서 잠을 자고, 반려견이 영역 표시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공원을 벗어나면 좀 더 큰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또래의 다른 아이들은 오토바이를 훔친다. 한 가족이 외식을 하는 동안 다른 한 가족은 번개탄을 피운다. 렌즈의 프레임 바깥에도 엄연히 세상은 존재한다. 같은 프레임 안에서조차 아웃포커싱으로 흐려진 곳에 ‘얼굴’들이 있다. ...
  나는 판단자임과 동시에 관찰하고 기록하는 자다. 내가 기록하지 않으면 내가 본 세상의 일부가 사라진다. 고통과 슬픔을 넘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기억뿐이다." - 7~8p     
매거진의 이전글 김지수가 세운 이어령이라는 우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