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문희 Apr 17. 2023

마음에 없는 소리

230417

  새벽에 깨서는 김지연의 소설집 <마음에 없는 소리>를 읽었다. 오래오래. 책을 꽤 빨리 읽는 내게는 드문 일이었다. 구조가 낯설어서? 문장을 곱씹느라? 외우려고? 그보다는 천천히 읽는 기분이 좋아서 그랬다. 글자 하나하나를 들여다 보며 시간을 몸으로 보내는 느낌. 이유 없이 효율의 반대편에 서는, 이런 감각이 갈수록 흔치 않다.



  단편집은 첫 작품부터 꽤 괜찮았다. 단어가 무겁지 않고, 1인칭 인물의 생각과 감정의 움직임을 따르는 문장의 흐름이 덤덤했다. 문어체 사소설이 허다한 세상에 대단한 미덕이다. 놀라운 발견이나 성찰은 없다. 대신 사건 발생의 순간을 잘 배치했다. 유려한듯 돌발하는. 해변을 산책하며 돌과 유리조각을 줍는 소설 속 장면 탓인가, 얕은 바닷속을 걷다 무언가 작은 물체를 밟는 순간이 떠올랐다. 별 것 아니라고 상상하지만, 때로는 걷다가 베이고 만다. 발목 통증자궁근종에 근심하는 '나'가, 혹시 늙어 보일까 연하의 연인 진영에게 자신의 병 얘기를 차마 못꺼낸 채 나체 수영을 하고 싶다고 조르는 것처럼. 이유를 묻는 진영에게 '병이 있었다'고 과거 시제로 말했다가 겪게 되는 이별처럼.


  "근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뭐가?"
  "만약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아무 말 않고 있다가 모든 게 다 지나간 다음에 결과만 딱 알려주길 원하냐고."
  나는 곰곰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래" 하고 대답했는데, 그 뒤로 한참이나 진영이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곰곰 생각할 시간이 나서 생각해본 다음에도 대답은 여전히 그래, 였다.
  ...
  "그럼 우린 끝이야."
  진영은 담배꽁초를 모래사장 위로 던져버렸다.
  "뭐?"
  "그게 우리 결말이야. 아무것도 안 말해줄 거면 같이 있을 필요가 없잖아. 뭐하러 그러냐니. 이렇게 같이 있다는 기분이 안 들게 할 거면, 나를 보호하기만 할 거면, 도대체..."
  진영은 손에 쥐고 있던 것들도 다 던져버렸다. 유릿조각과 소라 껍데기가 모래사장에 쿡쿡 박혔다.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
  진영이 내린 결론에 대해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그제야 닥쳐왔다. 그게 내가 좋다고 말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이들의 이별에 '왜'를 묻는다면 '나'가 진영과 적게 공유해서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나'의 태도를 배려로 이해할지 모른다. 진영이 아니었다면 '나'의 행동 방식은 달랐을 수 있다. 하필 '나'와 진영이란 게 이 모든 비극의 시작점이다. 김지연의 관심은 상수인 이들 사이 마음의 결을 들여다보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왜 진영에게 뭔가를 말하지 못하는지는 어린 진영과의 연애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기쁜지, 또 두려운지로 거슬러 가야 한다. 그리고 끝내 말하지 못한 자신의 병으로 관계가 파탄에 이른 뒤, '나'가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새 사람을 만나 떠올리는 상념을 김지연은 쓴다.

  "그래"는 '나'의 마음 속 물결을 담지 못하는 말이지만, 진영이 들은 말은 그것이 전부다. 진영은 끝내 나의 이런 마음은 알지 못한다.


  나는 지나가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는 게 늘 두려웠다. 말하는 순간 다른 것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고 나로서는 변화를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고 그 변화에 대해 누군가에게 다시 설명해야 하는 것도 자신이 없었다. 나는 내가 다 겪은 것, 감당한 것, 견뎌낸 것에 대해서만 다른 사람과 공유할 용기가 났다. -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말은 무력해서 마음까지 나아가지 못하거나, 진심과 무관한 형태로 나타난다. 「작정기」에서는 '오해'다. 함께 여행하기로 한 친구의 조부가 죽어 나 홀로 여행을 왔는데, 그 사정을 들은 외국인은 '친구가 죽은 것'으로 알아듣는다. 피규어 중고거래에 나선 「결로」 속 주인공은 '선물 주려는 걸 보니 동생과 사이가 좋은가보다' 질문을 받고 '동생은 죽었다'고 불쑥 말한다. 살아있는 동생인데 왜? 「작정기」 속 친구는 작품 말미 진짜로 죽고, 「결로」는 소통 없는 동생과의 현재를 비추며 끝난다. 그렇다면 오해와 거짓말은 어떤 진실을 드러내는 장치인가? 동생이 피규어는 가져갔다는 서술에 이르면 '말'은 소통의 결정적 무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말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이르렀겠나. 소설집 제목 <마음에 없는 소리> 새삼스럽다.

  「굴 드라이브」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이것저것 쓰고 싶은데 졸리다. 30대 여성 '나'의 귀향기인데, 과거와 용서, 인간관계를 새롭게 조명한다. (두둥) 그건 그렇고... 맘에 쏙 든 문단을 둘 옮겨 놓는다. 하나는 단편에 포함된 것, 다른 하나는 책을 총평하는 비평의 일부다. 단편 마지막 문장은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흔한 밀어보다 억조경배 더 터프하고 경쾌하다. 비평은 이 소설집의 가장 높은 성취를 아름답게 요약한다.


  어느 날 아침 영지는 잠에서 깨자마자 내 귓가에 대고 나와 함께라면 어디든 가겠다고 속삭였다. "왜냐하면..." 하고 그 이유들도 함께 읊어주었다. 그 이유들에 취해서 나는 오랫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건 마치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참다못해 눈을 떴을 때 거기에 영원 같은 건 없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내 눈썹을, 콧대를, 인중을 건드리며 오직 내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연히 시간은 내 마음 같은 건 아랑곳 않고 자기 할 일을 했고 우리도 그저 우리 할 일을 할 따름이었다. - 「사랑하는 일」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순간들에 깊이 몰입함으로써 잠재적인 시간을 끌어올 때, 소설은 붙잡을 수 없는 과거의 순간을 붙들어 영원으로 만들고 존재들을 망각으로부터 지켜낸다. 기적은 그런 시간 자체가 아니라, 표면에 맺힌 물기가 증발하듯 그런 시간을 발생시키는 아주 사소한 물질의 이동인 것 같다. 그리고 이 끝에서 우리는 김지연에게 소설이 무엇인지 알기 된다. 그것은 충격적인 물리적 세계의 사건들 앞에서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는 일, 각도를 살짝 기울여 환상에 침투해 들어가는 일이다. 현실과 어딘가 조금 어긋나 있는 엉뚱한 농담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운동성 속에서 우리의 삶은 조금은 부드럽고 유연하게 풀리며 넓어지는 듯하댜. 이것은 김지연이 우리에게 열어 보이는 가장 아름다운 환상인 동시에,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일이 아닐까. 그곳에서 우리의 생보다 더 길게 지속될 사랑을 위해서라면, 작가를 따라 그 세계에 오래 잠겨 있어도 좋을 것 같다. - 「두 번의 농담과 경이로운 미래」, 강지희
매거진의 이전글 기록을 붙드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