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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Apr 18. 2023

빡빡한 영감님

230418 1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 <지식의 단련법>을 읽었다. 인터뷰 중 이범준 선배가 언급한 것을 계기로 읽기 시작했는데, 흥미진진해서 퇴근 후 시간가는 줄 모른 채 읽었다. 식사로 버릴 시간이 아까워 밥 대신 핫도그를 먹을 정도였다(그런 것 치고는 버드와이저 시켜서 신나게 먹었지만). 덕분에 선배가 추천한 정민 교수의 저서 <다산 선생 지식경영법>에도 호기심이 생겼다.



  선배의 언급은 '취재로 얻은 많은 자료를 정리하는 비법이 따로 있느냐'는 질문에서 비롯했는데, 정작 엉뚱한 대목이 재미 있었다. 하나 예를 들자면 '중학생도 알 수 있게 기사를 쓰라'는 선배 기자의 조언을 회고하며 다치바나가 남긴 코멘트.


  같은 얘기를 지금의 젊은 신입기자들에게 했다면 오해를 초래할 것이다. 당시와 지금은 학령 구성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 시점(1964년)에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해 취직한 사람만을 생각해도 중졸자가 틀림없이 30퍼센트 정도는 있었다. 이미 성인이 되어 사회인이 되어있는 사람들 전체의 학력을 생각해보면 당시는 중졸자가 다수파였던 것이다. 지금은 고졸자가, 곧 대졸자가 사회의 다수파가 된다." - 201~202p


  같은 부서에게 일하는 후배를 보며 많은 것을 배우는데, 그 중 하나가 신조어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부산 일식집 '일광'에서 같은 당 소속 정치인들과 만난 뒤, '일렬 배웅'을 받아 논란이 일었다. 야당 일각은 '조폭이냐'며 비판했는데, 여당 최고위원인 태모씨가 "일광욕(日光浴)을 즐기는 유럽인들도 역시 모두 친일파냐"고 따졌다. 후배는 해당 발언을 인용하며 "뇌절"이라는 소감을 남겼다. "ㅋㅋㅋㅋㅋㅋ" 웃기는 했지만 사실 그 단어를 잘 몰랐다. 사전을 찾아보니 "똑같은 말이나 행동을 반복해 상대를 질리게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신조어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나 행동 때문에 뇌의 회로가 끊어지는 것처럼 사고가 정지된다는 뜻으로도 확대되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일이 많았다. 후배가 "기믹"이란 단어를 쓰자마자 네이버에 검색해보는 사태. 그의 글 속 단어 "갓생"은 맥락상 "현생"이란 단어와 대조적 의미로 추정됐지만 정확히 뜻을 알긴 어려웠다. 포털을 뒤져 보니 "신을 의미하는 'God'과 인생을 뜻하는 '생'의 합성어로 부지런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삶을 뜻하는 신조어"란다. 한동안 "오 너 갓생사네"하며 젊은 척 했다. 물론 금방 '뽀록'났다. 무슨 귀신이 붙었는지 취재원이 내 나이를 20대로 잘못 추정한 날이었다. 알고 보니 그 자리 기자 중 내가 가장 연장자였고, 취재원은 충격을 받았는지 밥먹는 내내 "진짜냐" "말도 안된다" 부정을 반복했다. 정작 본인은 흰 티셔츠를 입은 채 흰 스냅백을 걸쳐 쓰고는(애기랑 놀아주다 와서 그렇다고 했다). "아니 무슨, 옷은 제일 빅뱅처럼 입으셨으면서"라고 대응했다. 취재원은 "여기서 나이가 나오네"라고 말했다.

  뭐만 하면 MZ 타령인 연장자들의 상태가 대충 이런 것 아니었을까. 글쓰기건 말하기건, 적절한 예를 드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주의해야만 하는 것은 역사적 사정에 관한 글을 쓸 경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지식을 일반인들 또한 공유하는 지식이라 굳게 믿어버린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자신이 속하고 있는 세대는 보다 연로한 세대의 범주에 들어가고, 날이 갈수록 보다 새로운 세대에 속하는 자는 늘어나기 마련이다 - 200p


  시발 살살 때리세요.




  다치바나는 종이 크기, 스크랩북 사이즈, 스크랩북 한 권에 들어갈 스크랩 종이의 매수까지 본인에게 '최적화'한 방식을 디테일하게 정해뒀다. 얼마나 세세하냐면 신문 스크랩북 만드는 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사용하는 것은 <고쿠요 라-43>이라는 문방구점 등에서 가장 잘 찾을 수 있는 타입인데, 그 안에는 속지가 겨우 28장, 그러니까 56페이지밖에 안들었다. ... '대지 하나에 기사 하나'라는 원칙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기사가 대지보다 크면 접어서 붙인다. 대지에 비해 아무리 작은 기사도 여백은 여백으로 남길뿐, 아까우니까 여백에 다른 기사를 하나 더 붙이는 따위의 쩨쩨한 근성은 발휘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정리할 때 불편하여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32~33p)

  이 모든 세부는 효율적 자료 정리를 위함이다. 그는 "모든 자료의 정리와 보존에 들어가는 품은 적게 들어갈수록 좋다. 시간은 가능한 한 입력과 출력에 할애해야 한다"(36p)고 말한다.

  자세한 만큼 내 방식과는 영 다른 기술도 여럿 보였다. 시대 차이가 드러나는 대목은 특기해둘 만 하다. 예컨대 "녹음 테이프는 사용하기에 번거로운 것이, 재생할 때에도 녹음할 때와 동일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83p)"라는 문장은 클로버노트 탄생 이전까지나 유효한 서술이다. 다치바나가 별세한 시점은 2021년 4월30일. 클로버노트 출시20년 말이고 상용화는 21년 이후이니 다치바나로선 상상하기 어려웠을 변화인지도. 이범준 선배는 "나는 어떤 논문을 봤을 때 여러 주제어와 관련해 써먹을 수 있겠다 싶으면, 주제어 폴더 각각에 같은 논문을 복사해서 넣어둔다"고 했는데, 이 역시 다치바나에겐 꿈 같은 얘기였던 모양이다.


  분류를 함에 있어서 어떤 기사를 몇 가지 키워드와 관계인명 어느 쪽으로든 찾을 수 있도록 해두는 것이 이상적이다. ...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수만큼 카드를 만들고 중복분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품이 든다. 따라서 나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다만 카드 대신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해 검색할 수 있도록 해두면 중복분류에 의한 교차참조는 실로 간단하다. 조만간 그렇게 할 예정이다). - 62~63p


  물론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다치바나는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1974)를 쓰면서 일본의 잡지 도서관 '오야 문고'에 있는 다나카 관련 자료를 모두 복사해 왔다고 한다. 일본 자치성에 있던 정치자금 보고서 관련 자료는 열람은 허가됐지만 복사는 불허됐기에 아르바이트생을 동원해 여러 날에 걸쳐 필사하도록 지시했단다. 그때나 지금이나 복사는 기술적으로 어렵지 않다. 문제는 행정관청 등의 비공개 선호다.

  전현진 선배와 <대법원 서랍 속 국가폭력의 기록 224건> 기획기사를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도 법원도서관의 판결문 비공개 관행이었다. 판결문은 보통 인명 관련 사항을 익명화한 뒤 공개되는데, 법원도서관 특별열람실에 가면 무엇도 가리지 않은 판결문 원본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복사는 물론, 사진촬영, 메모도 해선 안 됐다. 판결문 하나하나를 본 뒤 사건번호, 당사자명 등을 외워서는 열람실 바깥에 나와 기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됐나 모른다. 고생은 선배가 했지만,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어 황당했던 기억이 난다.


다치바나가 감탄한 '<뉴욕타임스 인덱스>의 특성. 우리도 신문 색인을 발전시킬 때 참고할 사항이 많다.




  읽기와 입력, 기억에 관해 다치바나는 독특한 입장을 갖고 있다. 그는 "책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는 것이라는 식의 고정관념을 버리라"(20p)고 말한다. 입력선행형과 출력선행형, 지적생활형과 지적생산형은 다르다는 전제 하에 하는 얘기다.


  한 권의 책을 즐거움을 위해 읽는 경우라면 기껏해야 하루 두 권 정도다. 그러나 특정한 정보를 찾아 문헌을 섭렵하는 경우에는 하루 열 권 스무 권을 해치우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 그러면 어디가 필요하고 어디가 불필요한가를 어떻게 분간할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인식해두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만 확실히 인식하고 있으면 목자, 작은 표제, 색인만을 활용해도 대체적인 감을 얻을 수 있다. - 20~21p


  이는 다치바나가 '무의식' 신봉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기하게도 필요한 정보가 있는 대목에는 자연스레 눈길이 멈추게 된다. 인간의 눈이나 대뇌는 무의식의 수준에서도 확실히 작동하는 것인지라, 무의식의 층에서 뭔가 커다란 발견을 하면 의식의 지평에까지 그 정보를 자동적으로 올려주게 되어 있다. 그러니 자신의 무의식의 능력을 신뢰하면서, 일일이 글자를 읽지 않고 책장을 넘겨가는, 즉 '눈이 책을 스윽 훑어보게 하는' 방식을 몸에 익혀두는 것이 좋다(21p)"고 쓴다. 책 중간에 '출력과 무의식의 효용'이란 제목의 챕터도 있다. 그가 무의식을 빠는 구절을 몇 인용해 본다.

 

  책을 읽을 때 노트를 한다든가 카드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 ... 어느 책 어디 근처에 대략 어떤 내용이 쓰여 있었다는 식의 흐릿한 기억으로도 충분하다. 그 나머지는 필요가 생겼을 때 그 흐릿한 기억을 바탕으로 해당 부분을 찾아보면 된다. - 103p


  (신문을 읽고, 표시하고, 오려서 대지에 붙이고, 분류하고, 파일에 철하는 스크랩의 과정) 각 단계별로 필요성의 판단(판단에 시간을 들여서는 안된다.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을 내리다 보면 그때마다 비록 순간적이기는 해도 내용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그것이 내용을 기억하는 데에 대단히 도움이 된다. 순간적 상기의 반복이 모든 기억술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 41p


  기억력 신장만이 아니다. 그는 글쓰기 같은 출력도 무의식의 도움이 결정적이라고 주장한다. 존 맥피(미국의 전설적인 논픽션 작가)라면 까무러칠 소리다. 존은 <네 번째 원고>에서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키워드를 여러 장 카드에 적어놓고 그것을 바닥이나 벽에 늘어놓은 뒤 이리저리 배치해보며 글의 흐름을 구상하라고 말한 바 있다. 다치바나의 용어로는 '콘티'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예컨대 "머릿속에서 두서없이 생각한다"는 프로세스를, 다양한 개념을 기록한 종잇조각을 이쪽으로 움직인다든지, 저쪽으로 움직인다든지 하는 물리적 운동으로 바꿔놓는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개개인의 머릿속이라는 무형의 작업 공간밖에 없었던 것이 하나의 물리적 작업 공간을 얻게 되고, 그리하여 집단적 조작이 가능해진다. 작업 수순을 정형화하여 만인을 위한 체계적 방법론이 확립된다.
  이상과 같은 것이 KJ법(글쓰기 방법론 중 하나)의 이점이라고 하는 것인데 나는 그건 이점이 아니라고 본다. ... 대체로 의식 속에서 행해지는 무형의 작업을 물리적 조작으로 치환하면 능률이 뚝 떨어진다. - 148p


  다소나마 정리된 글을 쓰려고 한다면 우선 확실한 콘티를 짜는 것이 최초의 작업 수순이라고 일반적으로는 배우고 있다. ... 집필 전에 콘티를 만드는 수법은 말하자면 최적이라고 느껴지는 흐름을 처음에 사변에 의해 책정하고 그 흐름에 따라 인공적으로 운하를 굴착하여 거기에 재료를 흘리면, 신기하게도(랄까 아니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흘려넣은 것들이 뚫린 운하를 따라 흘러간다고 하는 이야기다.
  그에 반해 무콘티파의 발상은 물이 흘러가는 대로 맡겨놓듯이 재료가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대로 맡겨놓으면 재료 자체가 최적의 흐름을 발견할 것이라는 생각 위에 서 있다.
  ... 요컨대 콘티에 의지하는가 안하는가의 문제는 의식 상층부의 구성력과 의식 밑에 있는 무의식층의 구성력 중 어느 쪽을 더 중시하는가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 160~164p


  대신 그는 자료 수집과 숙지를 마친 뒤 '반짝 메모'를 한다. 재료를 놓고 어떤 요리를 할지 고민하는 와중에 퍼뜩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적어놓는 메모다. 또 그는 원고지 한 장에 '재료 메모'를 한다. 어떤 재료를 글에 사용할지 간단히 정리해두는 용도로, 글쓰기 전 메모와 중간 메모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다카시는 또한 자료정리의 방법으로 연표와 차트를 강조한다. 균일한 시간축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조망해 보면 공백이 생기는데, 공백에도 의미가 있다. 혹 공백일 리 없다 싶은 부분이 발견돼 새로 조사에 나서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차트는 취재 대상의 복잡한 입체를 한눈에 정리하고, 검증할 명제를 도출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정도면 존을 포함한 '콘티파'와 뭐가 다른가 싶은데, 글쓰기에 드는 품의 질과 양에서는 특히 그렇다. 다만 다치바나는 본격 작성에 들어서기 전 자료 숙지와 정리를 좀 더 강조하고, 글을 쓰는 순간에는 꽉 막힌 구성에 따르기보다 느슨한 방향성만 설정해둔 채 그때그때 물길을 여는 타입에 가까운 것 같다. "지적 작업은 즉물적인 재료가 있은 다음에 거기에 손을 대면 목적한 것이 생기는 단순한 일과는 뭔가 다르다. 지적 작업에는 언제나 그 사람의 존재 전부가 걸리기 마련이다(165p)"라는 것이 다치바나의 철학이다.




  그렇다면 입력이 핵심이다. 빠르게 봐도 무의식 덕에 입력이 된다고는 하지만, 모든 정보가 본다고 해서 무의식에 다가서는 것은 아니다. 글자를 본다고 다 기억나나? 다치바나의 주장은 보기보다 상식적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입력 능력은 눈이나 귀의 생리적 정보수용 능력 이상으로 정보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에 좌우된다. 후자는 정신의 집중력과 함수 관계에 있다. ... 처음부터 속독을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속독은 결과다. 오히려 정신집중 훈련에 도움이 되는 것은 난해하기로 정평이 난 글을 골라 그 의미를 아무리 많은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까 철저히 생각을 거듭하면서 읽는 것이다. - 15~16p


  여기서 다치바나가 예로 드는 책은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다. 나는 그 책을 읽다가 집중력은 물론 지식에 대한 열망, 사랑을 모두 잃은 사람을 여럿 알고 있다.

  글이 너무 길어졌으므로, 2편을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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