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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Apr 27. 2021

불온한 사랑

'독자적 영화시점'을 시작하며.

  검은색 바지에 회색 자켓을 걸친 남자가 물었다. "조문희, 요즘 어때?" 담배를 피우려다 뒷머리에 삐쭉 닭살이 돋았다. '이 사람이다.' 2009년 이른 봄, 서산 제20전투비행단 병사 생활관 앞에서 국군기무사령부 소속으로 추정되는 중년 남성을 만났다. "누구세요?"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남자는 담배를 꺼내 물으며 씨익 웃기만 했다.


  그와의 만남 며칠 전, 누군가 개인 옷가지와 물품을 보관하는 관물함을 뒤집어놨다. '누가 감히 병장 관물함을!' 분노하며 범인을 찾았지만 당연히 나타나지 않았다. 엉망이 된 관물함에서 사라진 것은 책 한 권뿐. 오스트리아의 정치경제학자 칼 폴라니의 저서 <거대한 전환>('전환')이었다.


  '전환'은 선임이었던 오학준씨가 전역을 앞두고 추천한 책이었다. 맑스, 푸코, 발리바르 같은 발음도 어려운 철학자, 사회학자들의 저작을 탐독하던 시절 오씨는 훌륭한 대화 상대였다. 두 살 터울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똑똑한 사람이었다. 군생활 중 수십권 책을 읽는 것만도 대단했는데, 이따 A4용지 몇장 분량의 서평을 휘리릭 써내기까지 했다. '전환' 서평은 그 중에서도 발군이어서, 오씨는 그 글로 서울대 인문사회서점 '그날이 오면'에서 큰 상을 받았다.


  그 상이 문제였다. 오씨는 수상 소식을 전해들은 얼마 후 자신을 기무사 소속이라 밝힌 한 남성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오씨의 사무실과 관물함 등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슬며시 "나도 책을 좀 읽어야 할텐데"라며 운을 떼었다. "'전환'이라던가, 그 책은 어때?" 그 즈음, 오씨와 내가 활동하던 인트라넷 독서 커뮤니티도 폭파됐다. 근 십년 육해공 장병들이 구전으로 접속 방법을 대물림한 공간이었는데, 누가, 어떻게 찾았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오씨는 전역모자를 썼고, 제대까지 네 달쯤 더 남은 나를 무채색 남자가 찾아왔다. 담배를 꼬나문 그가 잠시잠깐 근황토크를 마치고 "사대강은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다. "그게 뭡니까?" 윤여정도 아닌 주제에 발연기를 시전하면서 뉴스에서만 보던 '불온서적'이란 단어가 보유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온몸으로 느꼈다. 열 살만 더 먹었더라면 '읽지 말자 불온서적, 무찌르자 공산당' 외치며 몸을 좀 사렸으려나. 그는 질풍노도의 병장, 그를 죽이지 않는 것은 그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었으니.


  그리고 5년 후, 전역 직후 잠깐 연락을 주고받다 자연스레 멀어진 오씨를 우연히 서울 목동 SBS에서 만났다. 그해 나는 '그것이 알고싶다'를 꿈꾸는 시사교양 PD 지원자였다. "형이 여긴 어쩐 일이야!" 반가운 마음과 호기심이 반씩 섞인 내 외침에 그의 대답은 "나 여기 PD야"였다. X발, 또 선배인가. 그 불안은 현실이 되지 않았고, 나는 기자로, 그는 PD로 각자의 자리에 서 있다. 한달에도 몇번씩 만나 함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다.


  나쁜 버릇은 먼저 배운다고, 그나 나나 남의 집에 가면 책장을 먼저 살피는 사람이 됐다. 꼭 그때의 기무사 아저씨마냥, 친구가 책을 보고 있으면 제목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원래 책 좋아하는 사람은 남이 읽는 책도 궁금해하는 법이라는데 유독 우리가 더 심한 것 같다. 게다가 누군가 지젝이나 알튀세르를 읽는다면, 씩- 웃으며 "이런 빨갱이를 보았나" 한다. 장하준, 피케티 등 경제학자는 물론, 조은을 비롯한 국내 사회학자의 저서를 봐도 "이 친구 불온하구만" 한다. '형, 그 사람들은 아니야' 해도 소용없다. 빼앗긴 '전환'도 불온서적 리스트에 올라간 적은 없었다.


  영화도 그렇게 봤다. <화씨 451>을 보면 주인공 몬태그가 손에 쥔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눈길이 갔다. <자산어보>를 본 다음에는 '사람들이 왜 <대학> 얘기는 안할까' 궁금했다. 영화는 구성, 촬영, 편집 모든 과정에 오랜 시간과 자본이 들어가는 매체다. 감독이 어떤 책을 등장시킬 때는, 굳이 빼지 않았을 때는 어떤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그게 뭘까를 때로는 영화관에서, 때로는 방구석 1열에서 상상했다. 이따금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브레히트의 시집을 볼 땐 기무사처럼 물었다. '이거 참, 불온하구만.'


  불온서적에서 시작된 사랑이 싹을 틔운다. 오씨와 나눈 영화 속 책 이야기를 브런치에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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