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학준 Apr 14. 2021

사랑은 일방통행

구로사와 기요시 , 스파이의 아내(2021)

* 영화 <스파이의 아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음악은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1940년, 후쿠하라 물산의 망년회는 특별했다. 업무를 위해 만주로 떠났던 사장 유사쿠가 오랜만에 돌아온 데다, 그가 만든 영화의 시사회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은 간이 영화관이 되었고 직원들은 일하던 의자를 끌어와 저마다 영사기 앞에 자리 잡았다. 축음기에선 고바야시 치요코小林千代子의 <덧없는 사랑かりそめの恋>이 흘러나오며 영화는 시작된다.


덧없는 사랑이어도 내게는 기쁨이어라

암담한 세계에 꿈의 배를 띄우나

덧없는 꿈은 깊이 가라앉고 폭포처럼 눈물만 흐르네


덧없는 사랑이여 덧없는 둘이여

차분한 척 해봐도 가슴속 불길은 타올라

현세에서 나누는 환상 같은 입맞춤

밀려오는 슬픔에 휩싸이는 몸


아 고통스런 사랑은 일방통행


https://www.nicovideo.jp/watch/sm12320354

영화를 보며 직원들은 박수와 탄성을 내뱉지만, 스크린 바깥에서 지켜보는 우리는 감탄하지 못한다. 노래 가사처럼 암담한 세계가 두 사람을 비극적인 상황으로 몰고가는 모습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영화의 비극적 결말을 그들처럼 즐기지 못하고 이 노래의 자기 실현을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반복되기 전까지는.


사토코의 소꿉친구이자 현병대장인 야스하루는 밀항을 시도하던 사토코를 붙잡고 필름을 빼앗는다. 그녀의 절망적인 호소를 뒤로하고, 국외로 반출하려던 국가 기밀이 담겨 있다는 이 필름의 상영회를 준비한다. 저마다 의자를 끌고 와 영사기 앞에 앉은 헌병들 사이에서 사토코는 체념과 불안이 뒤섞인 얼굴로 화면을 바라본다. 


그러나 다시 시작된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었다. 자신이 출연하고 남편이 촬영한 아마추어 영화. 헌병들의 영문 모를 웅성거림 속에서 영화는 끝이 나지만, 음악은 계속된다. 마치 사토코에게 따로 말을 걸고 있는 듯이.


현세에서 나눈 환상 같은 입맞춤

밀려오는 슬픔에 휩싸이는 몸


아 고통스런 사랑은 일방통행


사토코는 이 거대하고 지독한 농담 앞에서 웃음과 울음이 뒤섞인 채로 “대단해!(お見事!)”라고 외치며 혼절한다. 사토코가 ‘꿈의 배’에서 사로잡혀 내리게 만든 건 유사쿠의 일방통행 사랑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조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토코의 일방통행 사랑에 대한 얄미운 복수였을까. 멀리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향해 떠나는 작은 배 위에서 모자를 흔들며 작별을 고하는 유사쿠의 모습은, 현실인지 아니면 사토코의 상상인지 단숨에 파악하기 어렵다. 단지 우리는 서로 엇갈리는 방향으로 달려 나가는 두 사람의 사랑의 방식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유복하고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코스모폴리탄으로서 복무해야 할 보편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진실을 폭로하려는 유사쿠와, 단지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목표로 삼아 스파이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하는 명랑한 사토코를 가로지르는 사랑의 교차로 같은 것은 없다. 두 번 반복되는 노래는 마치 서로의 입장을 한 번씩 반복하는 듯이 보인다. 심상은 그렇게 엇갈리고, 화면에 담긴 감각의 좌표는 흔들린다. 다양한 감각의 레이어가 해석을 모호하게 만들고, 진실과 거짓 사이의 불안감을 견뎌내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의 메시지가 노래와 함께 증폭된다. 


진실과의 숨바꼭질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신작 <스파이의 아내>에서 서스펜스로 가득한 두 개의 신에는 같은 노래가 함께하고 있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기 어려운 모호한 시대,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전쟁이라는 비극이 풍기는 탄내에 섞인 불안감이 삶을 어떻게 침식하는지 그려내는 영화는 그 불안감을 원본과 복제의 모티프의 반복을 통해 그려낸다. 이는 영화 속 영화뿐만 아니라 노래에도 해당된다.


유사쿠가 만주에서 벌어진 참상을 폭로하기 위해 자신이 취미로 촬영하던 영화 필름 위에 덧씌운 영상들은 사토코가 적극적으로 스파이의 아내로 살아가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된다. 하지만 그 영상은 또 다른 영상을 찍은 복제물의 복제물일 뿐이다. 사토코는 유사쿠에게 스파이의 아내가 되겠다고 말하며 그와 진심을 나누었다고 믿고 행복해하지만, 끝내 돌아오는 것은 농담의 일부분이 되는 결말뿐이었다.


사토코는 원본과 복제 사이의 차이를 도외시한다. 참상을 기록한 수기의 원본을 헌병대에 넘기고 조카 후미오를 죽게 만들지만, 동시에 조카가 번역한 문서는 남겨둔다. ‘이것만 있으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항변하지만, 유사쿠는 증언자도 죽고 원본도 사라졌으므로 다른 증거들이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결국 유사쿠는 그 원본을 사토코에게 보여주지 않았고, 사토코가 가지고 있다 믿었던 영상마저 바꿔치기했다. 그녀는 언제나 복제물만을 보고, (배우로서) 복제물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스파이가 아니라 스파이의 ‘아내’라는 자리는 이념이나 신념을 가진 스파이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괴로워하는 사람의 자리다. 맹목적인 믿음과 뒤늦은 깨달음에 통곡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다. 무엇이 진실인지 혹은 거짓인지 구분할 수 없고, 구분하지 않아야 고통을 피할 수 있다. 그 대가는 정신병원의 얇은 벽 너머에 펼쳐진 지옥도였고, 이를 목도한 이의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은 울음이 되어 스크린을 채울 뿐이다. (오픈카에서 짓는 사토코의 행복한 표정은 그러므로 유일하게 부부로서 두 사람이 진실한 순간이었음을 드러내는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벽과 뚜껑이 있는 곳에서 진실은 없었으므로.)


노래는 영화의 축음기다


고바야시 치요코의 ‘덧없는 사랑’은 1936년 미국의 뮤지컬 <쇼 보트>에 삽입된 ‘Make Believe’의 번안곡이다. 1926년 에드나 퍼버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뮤지컬의 두 주인공인 앨런 존스와 아이린 던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는 두 사람의 사랑과 그들을 둘러싼 세계의 험난함,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질 파국을 넌지시 암시한다.


https://youtu.be/-FP_bXUW0MI?t=517


상상은 내가 아는 가장 달콤한 것

우리의 꿈은 세계보다 더 낭만적이지

그 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건 그저 기술적으로 중요하지 않을 뿐


우리의 꿈은 우리가 아는 세계보다 더 낭만적이지

우리가 꿈꿨던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해도

그건 그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작은 일일 뿐


우리는 사실 만난 적도 없지만

꼭 신경 쓸 필욘 없지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다면

우리가 택한 모든 것들을 떠올리며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지


원곡과 동일한 곡조, 그러나 조금은 다른 가사를 쓰기에 완전히 동일한 이미지를 전달하지 않는 것이 번안곡이다. 황금 가면을 쓰고 노래를 부르는 복면 가수였던 고바야시 치요코가 이 노래를 번안해 불렀다는 사실은, 이 노래를 감독의 지독한 농담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구의 복제로서 다이쇼 데모크라시, 유사쿠 역시 복제로서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코스모폴리탄’은 짝사랑인 것은 아니었을까? 감독의 진심은 Make Believe와 덧없는 사랑이 자아내는 낭만과 파국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무엇이 더 감독의 마음에 가까운지 판단하는 건 관객의 몫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시대극이나 스릴러보다 부부의 멜로드라마로서 바라볼지도 모른다. 말할 수 없는 진실과 그 앞에서 견뎌내는 서로의 이야기로 말이다. 사랑은 그러므로 언제나 일방통행이다. 서로를 향해 맹목적이며, 동시에 멈춰있지 않고 계속해서 사건을 만들며 나아가는 것이다. 험난한 시대가 만들어내는 파도 앞에서 두 사람이 탄 작은 배는 언제나 흔들린다. 시대가 수상할 때 행복을 바라는 것만큼 판타지도 없지 않은가? 


*마지막 자막은 감독이 참극 앞에서 울부짖는 사토코에게 보내는 변명처럼 보였다. 고통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 그럼에도 미쳐버린 시대, 멀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던 시대에 대한 책임은 모호하게 사라진다. 누가 이 울음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애서가에게 던지는 질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