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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Nov 05. 2021

가짜 윤영자의 진짜 이야기

<가난의 문법>, 소준철

  오랜 취재수첩을 꺼내어 본다. "종로구에서 폐지를 줍는 박씨(80대)." "종래 폐지 1kg당 100원을 받았으나 최근 값이 40원으로 내려갔다고." 수습 생활 2일차, 선배에게 보고한 취재 내용이다. 당시 참 답답했다. 관할 구역 내 경찰서를 돌아다니며 형사 사건을 발굴하라고 지시는 받았는데 도통 잘 되지 않았다. "특이사항 없었다"고 보고하면 선배가 뭐라할까. 종로경찰서 마당에서 담배만 뻑뻑 피웠다. 정문 너머 지나가는 폐지 수레가 그때 보였다.

  노인과 오랜 시간 얘기는 못한 걸로 기억한다. 그는 경찰서 앞에서 옆 골목 편의점으로, 건너편 카페와 프랜차이즈 햄버거집으로 수레를 끌었다. 빈 박스 종이, 플라스틱 생수병, 콜라캔을 주웠다. 키보다 높이 쌓인 고물, 앙상한 다리로 어찌 끄는지 의문이었다. "이렇게 두세시간 걸어 수레를 채우고 나면 3000원쯤 버는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기막히고 슬펐다. 그러면서도 살짝 희열에 몸을 떨었다. 세상의 부조리함을 벌써 깨우친 듯 했다. 선배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오전 11시 청와대 앞 기자회견에 가라는 지시뿐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게 기사거리 아닌가.


한 할머니가 밤늦은 시각 폐지를 줍기 위해 수레를 끌고 있다. 경남신문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200660)


■'1945년생 윤영자씨'의 하루


  지난해 11월 출간된 <가난의 문법>을 읽으며 새삼 그가 떠올랐다. 저자인 소준철씨는 폐지 줍는 노인 한 명의 이야기로 303페이지짜리 책 한권을 썼다. 45년생 윤영자씨가 책의 주인공이다. 책은 어느 날 오후 1시부터 다음 날 오후 12시30분까지 '영자씨'(저자는 윤씨라 줄여 부르지 않고 굳이 영자씨라고 이름을 적는다)의 하루를 그린다. 위험한 거리, 고되고 더러운 노동, 다른 노인과의 서글픈 경쟁으로 그녀는 시간을 채운다. 고물 수레를 멈추고 영자씨는 좋았던 옛날을 회상한다. 큰아들놈의 사업자금을 대주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녀에게도 한때 자가 주택이 있었다. 외환위기 때 그 집을 팔아 아들과 사위, 막내딸의 사업자금과 학원 운영비를 충당했다. 그 사이 거주지였던 북아현동이 재개발됐다. 내 집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는 너무 비쌌다.

  실화는 아니다. "1945년생인 윤영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소씨는 쓴다. 그녀의 이름부터 가짜다. 1945년 출생등록한 이들의 이름 가운데 가장 많았던 이름을 골라 지었다. 2020년 기준 만 75세라는 영자씨의 나이도 인구 통계와 행정 조치를 활용한 구성물이다. 면허 갱신 시기가 5년에서 3년 주기로 바뀌는 나이다. 인구통계에선 후기고령자로 분류된다. 윤씨와 그 가족의 일생은 1945년생의 ‘일반적인 생애주기’를 반영했다. 윤씨는 저자가 만난 노인들의 생애를 조각조각 들여다보고 기워낸 ‘평균의 노인’이다.

  특별한 서사가 있다 보기도 어렵다. 하루를 들여다볼 뿐,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표상되는 이야기 곡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분류하자면 영자씨의 하루 풍경은 '스케치', 과거 회상은 '연대기' '생애사' 기술에 가깝다. 책의 구성도 '내러티브'라는 수식을 꺼리게 한다. 소씨는 시간대별로 영자씨의 하루를 분할해 적는다. 오후 1시, 2시30분, 4시30분 등 한 구간 서술이 끝나고 나면 빈곤 노인의 현실을 드러내는 저간의 연구 내용과 통계를 집어 넣는다. '내러티브 논픽션'보다는 기획기사, 박스기사에 가깝다. 시의성이나 새로운 사실이 없다면 언론도 굳이 쓰지 않는 소재다. '폐지 줍는 노인' 기사는 빈곤의 전형처럼 너무 많이 다뤄졌다.


<가난의 문법>(2020) 표지. 알라딘 갈무리


■'내러티브 논픽션'의 확장하는 경계


  그럼에도 <가난의 문법>을 다룬 이유가 있다. 윤영자씨는 가공된 인물이나, 그녀를 이룬 이야기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언론은 기사 속 사례로 익명의 인간을 종종 내세운다. 독자 입장에서 A씨와 윤영자씨가 딱히 다를 것이 없다. 실화를 쓰고 실명을 언급할수록 사실성의 농도가 짙어진다는 고전적인 명제까지 부정하진 않겠다. 다만 그렇게 다루는 인간의 삶이 사회문화적으로 어디에 위치하는지는 고민해봐야 한다. 전형적이어서 특색이 없거나, 극단적이라 보편적 의미로 확장할 수 없는 사례를 논픽션이란 이름으로 자주 봤다. 극단도 진실일 수 있고 때로 포착하지 못한 사각이 보편의 지형을 뒤흔든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평균적인 진실도 그 못지않게 중요할 것이다. 소씨는 2015년부터 2019년까지 60여명의 빈곤 노인을 만났다. 때로 몇달씩 북아현동 숙소에 머물며 노인들의 삶을 관찰했다. 취재 내용이 충실하다면 이 책을 논픽션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 무엇인가.

   소씨가 연구를 시작한 계기는 이렇다. “2015년 3월의 어느 날, 가양역 근처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작은 골목을 지나가는데, 1㎞가 채 안 되는 거리에서 재활용품을 줍는 노인 여럿을 보게 됐다. 그녀들은 함께 다니는 게 아니었다. 어떤 갈림길에 다다르자 뿔뿔이 흩어졌다. 알고 보면 경쟁 중이었던 상황이며, 고물은 먼저 발견한 사람의 차지가 되기에 굳이 남의 뒤를 따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소씨는 빈곤 노인의 삶을 들여다 봤다.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지켜보고, 어쩌다 이런 삶으로 미끄러졌는지 원인을 분석했다. 이들 삶을 비참에 빠뜨릴 뿐 구제해주지 않는 정부 정책의 한계를 생각했다. 윤영자씨는 소씨 작업을 생동감있게 드러내는 표현형일 뿐,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가난'이다. 책의 첫 페이지를 여는 문장부터 “한국사회에서 가난의 모습은 늘 변해왔다”이다.

  <가난의 문법>은 2020년 우수출판콘텐츠로 선정됐다. 출간 두달만에 4쇄를 찍었다.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드문 판매고다. 학계도 소씨의 연구를 무겁게 받아들였다. 인터넷 서점에는 "복지에 대한 생각의 폭이 넓어진 것 같다"는 평이 달렸다. 나 역시 언젠가 노인이 될 것이다. 성공하지 못한 삶이라도 비참하진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빈곤 노인에 대한 정책 논의가 활발해지길 기대했다. 반면 책을 읽은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돈 모아서 빨리 집 사야돼. 한번 기회 놓치면 전세, 월세 전전하다가 영영 미끄러진다니까. 아니면 연금받는 직업을 구하든가."

  이래서야 뭐가 변하겠는가. 절망하다, 친구가 다짐 앞에 던졌던 소감을 적는다. "이거 진짜 무서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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