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만큼 쓰기 쉬운 글이 있을까.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지한 질문이다. 당장 포털사이트에서 기사 몇 편만 검색해 봐도 알 수 있다. "소설 쓴다." "소설 쓰지 마라."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본 것이 기억난다. "기자 사이에서 '소설'은 비난과 금기의 명사다. ... 오직 사실만 쓰고 주관, 의견, 상상 등은 기사에 담지 말라는 경고다. 데스크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면 사표 쓸 생각까지 해야 한다. "왜 소설을 썼어? 기사를 쓰라고 기사를!""(<뉴스가 지겨운 기자>(2013)) 이럴수가. 올해 신춘문예 마감일이 언제였더라.
X축에 사실성을, Y축에 문학성을 놓고 사분면을 그려보자. 기사는 기자의 취재 내용을 독자에게 전하는 글이다. 사실성의 농도가 높은 대신 문장이나 구성의 문학적 깊이는 얕다. 제품의 사용설명서, 경제 분석 보고서, 수사자료, 논술문도 특정한 사실을 전달하는 글쓰기이다. 반면 소설은 허구(fiction)의 이야기를 다루는 산문이다. 사실의 함량은 낮지만 글의 구성과 문장에서 높은 문학성을 보인다. 글의 종류는 기사 비슷한 글들이 소설보다 훨씬 다양하다. 소설의 하위 장르가 SF소설, 연애소설, 판타지소설 등 '-소설'로 묶이는 것과 차이가 난다. 이들을 묶어 소설이 아닌 것(non-fiction)이라 부른다.
픽션, 논픽션과 달리 문학성도 사실성도 수준 미달인 글이 있다. 따로 부르는 이름이 없기에 나는 개소리라고 쓴다. 개를 폄하해서가 아니라 '멍멍, 왈왈, 으르르'로 구성된 기사를 상상할 수 없어서다. 마찬가지로 취재 안된 기사를 소설이라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품격있는 개소리와 정돈된 의사표현 사이 어딘가에 속할 뿐. 경향신문 선배 중 내 취재 내용을 보고 '소설쓰냐'고 물어본 사람이 없었던 걸 보면 내 글도 확실히 문학적이진 않았던 모양이다. "와, 기사다!"도 들어본 적 없기는 한데 아무튼.
소설, 논픽션, 내러티브 논픽션의 위치를 그린 사분면. 학술적 근거가 딱히 있지는 않다. 야매다.
대체로 개소리이고 드물게 논픽션과 소설인 것이 세상 글 대부분의 운명이라 믿는 내게 트루먼 카포티라는 이름은 난감했다. 그의 책 <인 콜드 블러드>(In Cold Blood·1966)를 두고 한겨레 안수찬 기자는 이런 평가를 내린 적이 있다. "사실주의 문학의 전형이자 뉴저널리즘의 표상이며 내러티브 저널리즘의 원천의 되는 글"(위의 책). '사실주의 문학'은 문학이지 논픽션이 아니다. 그런데 뉴저널리즘, 내러티브 저널리즘은 뭐지? 잘은 모르지만, 카포티가 자평한 내용을 보자니 대충 무슨 느낌인지는 알았다. "나는 오직 사실로만 이뤄진 소설을 썼다."
■서사의 빈곤과 풍요
<인 콜드 블러드>는 1959년 겨울 캔자스 서부의 마을 홀컴에서 벌어진 일가족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범인은 페리 에드워드 스미스와 리처드 유진 히콕(일명 딕). 클러터씨와 클러터 부인, 그리고 아들 케니언과 낸시 등 4명이 피해자이다. 카포티가 이 사건을 취재하게 된 계기는 뉴욕타임스에 실린 단신기사로 전해진다. 어떻게 해야 400 단어 남짓 짧은 기사가 한글판 536페이지에 달하는 책으로 바뀌나.
맞으면 딱 아프게 생겼다.
취재 내용이 일단 풍성했다. 책을 보면 카포티는 동네 주민, 피해자의 친구는 물론 범인의 가족, 옛 감방 동료까지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살인범의 누나, 부모를 만나 옛 이야기를 듣고 감옥에 갇힌 살인자에게 수형기간 쓴 일기장도 입수했다. 담당 수사관이던 앨빈 듀이보다 카포티가 많은 것을 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나는 그의 야심에 조금 더 관심이 갔다. 페리와 대화하던 중 그는 '클러터 가족에게 돈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찾아갔다'는 진술을 들었지만 바로 글을 쓰지 않았다. 페리가 클러터 일가에서 발견한 돈이 우리 돈 5만원(40~50달러)에 불과했대도 펜을 쥐지 않았다. 나라면 당장 '[단독]클러터 살인, 50달러 때문이었다' 따위 기사를 썼을 것이나, 그의 흥미는 조금 다른 곳에 있었다. 아마도 그는 '가족에게 돈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왜 그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는가'를 물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런 의문을 풀어가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함께.
살해당한 클러터 일가의 모습을 담은 영화 <카포티>(2005)의 한 장면.
그가 굳이 '소설'을 쓴 이유를 나는 '문학적 진실'이란 개념에서 찾는다. 카포티는 페리에게 악한이라 손가락질하고 끝낼 요량이 아니었던 것 같다. 작품에서 페리는 부모의 무관심과 방치에 시달리고 소년원에서 학대당한 인물로 그려진다. 강렬한 지적인 욕구를 가졌지만 가난 때문에 배움을 얻지 못해 인생을 회의하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불우한 가정환경이 범죄자를 낳는다는 이야기인가? 딕은 부유하진 않지만 다정한 부모 아래서 자란 것으로 그려진다. 교정 시설이 교화에 실패해서인가? 정작 감옥에서 딕에게 '클러터씨는 부자'라고 알려준 감방 동료는 개과천선해 살고 있다. 범죄자를 붙잡은 수사팀은 한때 피해자 낸시의 남자친구 보비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오류를 저질렀다.
카포티는 무엇에도 확실한 답을 내려놓지 않는다. 대신 서사가 나아가는 길목마다 질문거리를 던져두었다. 그러면서도 페리와 딕이 범죄자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수십 페이지에 걸쳐 페리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다가도 한 순간 수사관의 아내를 등장시켜 이렇게 쓴다. “이 애는 내가 이제껏 만난 애들 중에서도 그렇게 악질은 아니라고, 그날 밤 나는 남편에게 그런 얘기를 했어요. 하지만 남편은 코웃음 치더군요. ... 남편은 시체를 발견했을 때 집에서 나오고 싶었대요. 눈으로 직접 보고 스미스씨가(페리) 얼마나 상냥한 사람인지 말하라고." 잠시나마 내가 페리를 연민했던 건, 그녀처럼 사건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나.
■사실과 진실
하지만 나는 카포티를 의심한다. 그가 취재한 내용의 진위를 검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취재원을 만나는 동안 수첩에 기록하거나 녹음하지 않았다. 현장을 벗어난 뒤 작성한 노트가 수천쪽에 달한다지만 어디까지나 사후적인 기억이다. 심지어 작품 속 어떤 서술은 어디 기록에 나올 것 같지도, 인물들이 기억해 말해줄 수도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는 햄버거 두 개를 먹었고 페리는 샌드위치 하나를 먹었다. 코로나 맥주가 시원했다." 일부 평론은 카포티가 페리에게 호감을 품었다는 이유로 서술의 공정성을 의심한다. 페리와 딕이 살아서 고소라도 했다면 카포티는 무엇으로 자신을 방어했을까. 두 범죄자의 사형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그의 일화가 예사롭지 않게 읽히는 대목이다.
클러터 일가 살인사건의 범인 페리 에드워드 스미스와 <인 콜드 블러드>의 작가 트루먼 카포티(왼쪽). 오른쪽 사진은 영화 <카포티>(2006) 속 배우들의 모습이다.
과한 의심이 아니다. 워싱턴포스트의 기자 재닛 쿡은 1981년 <지미의 세계>라는 기사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워싱턴 흑인 밀집지역에 거주하는 여덟살 흑인 소년 지미가 아주 어릴 때부터 헤로인을 상습 복용해왔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기사를 읽은 독자들은 미국 수도에서 이뤄지는 마약 유통, 조부모와 부모에게서 어린 자녀가 마약밖에 배울 것이 없는 빈곤, 그러한 빈곤에서 벗어날 길 없게 만드는 인종 차별의 현실에 경악했다고 한다. 워싱턴 D.C 최초의 흑인 시장이었던 매리언 배리까지 나서 "공무원들은 즉시 지미를 찾아라"고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미국 공무원과 경찰은 지미를 찾지 못했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소년이었고 쿡의 기사는 가짜였기 때문이다. 얼마나 유명했던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백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비꼰 말도 전해진다. “쿡이 퓰리처상을 받은 것도 부당하지만, 쿡이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한 것도 부당하다.” 문학성은 있었나 보다. 부럽다.
현대 언론학의 바이블로 불리는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에서 빌 코바치는 저널리즘을 비롯한 논픽션 장르의 핵심이 '사실확인의 절차'와 '투명성'에 있다고 지적한다. 빌은 단순한 사실 나열이 훌륭한 기사는 아니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카포티와 일면 공명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실의 원천이 다양할 수 있고, 사실을 배치하는 방식에 따라 다른 메시지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본다. 때로는 편향된 인물의 시선(주관)을 앞세워 이야기를 서술하는 게 사안의 진실을 드러내는 길일 수도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실 취재가 전제일 때 얘기다. 느슨하게 '내가 들었어'라는 정도로는 정말 취재가 이뤄졌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는 최소한 회사마다 개별 기자의 취재 내용을 확인하고 사실성을 따져볼 수 있는 절차를 둬야한다고 말한다. 필요할 때는 취재 내용이 동료 기자, 나아가 독자에게 공개될 수도 있다고 본다.
1980년 9월28일자 워싱턴포스트 1면에 실린 '지미의 세계'. 지금도 워싱턴포스트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카포티가 소설적인 글을 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유죄와 무죄를 따지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사법적 판단 이전에 고민해볼 법한 인간의 문제도 세상에는 있다. 페리를 용서하는 독자는 거의 없으나 질문하는 독자는 여럿 보인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소설 <롤리타>를 끝까지 제대로 읽는다면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썼다. 내가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말에 고개 끄덕이다가도, 끝내 '그래도 필요하다'는 쪽으로 마음 돌리는 이유다. 하지만 동시에 카포티의 작품은 실화에 충실한 것이어야 한다. 논픽션이 아니었다면 미국 사회에 그만한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을 거라고 평자들은 분석한다. 아무리 기막힌 글도 픽션이라면 현실과 무관한 것으로 치부되는 게 세상 이치다. 그저 흘려보내기에는 카포티가 던진 질문이 너무 귀하다.
카포티의 취재가 사실이길 바란다. 확신할 수 없기에, 잠정적으로 이렇게 정리하기로 한다. <인 콜드 블러드>는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인간의 이상과 밑바닥을 함께 드러내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