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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Jan 15. 2022

한국에도 있는 가난, 한국에는 없는 이야기

<블라인드 사이드>, 마이클 루이스

  “기자들은 왜 빈곤 문제를 다루지 않아?” 언젠가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친구와 술을 마시다 뜨악한 기억이 있다. “너 내가 쓴 기사는 보면서 말하는 거야?” 막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끝난 참이었다.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가사에 함께 낄낄댔지만 어쩐지 대충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친구는 “너야 쓰지. 하지만…” 하며 말을 삼켰다. 대체 뭔소리야. 사회부 기자들이 제일 많이 쓰는 기사 소재가 가난, 빈곤, 차별인데. 기억나는 동료 기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포털사이트에 두들긴 끝에 증거를 얻어냈지만 친구는 끝내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작게 쓰면 뭐해. 기억도 안 나는구먼.”

  친구의 말에 반박할 말은 줄줄이 찾을 수 있었다. 단신일지라도 기사가 없었다면 그가 누군가의 비극을 알 길이 있었을까. 일부 언론은 단신에서 시작해 죽음의 구조적 원인을 헤집는 시리즈 기사로 나아갔다. 죽음이 없었다 해도 가난이 낳는 문제, 예컨대 빈곤의 대물림 같은 현상을 다루는 기획 기사는 늘 나왔다. 다만 그게 세상에 유일한 기사가 아닐 뿐이다. 기자는 많고 지면은 넓다. 경제부, 문화부, 정치부도 때로 자극적일지언정 대체로는 독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한다. 그런 와중에도 빈곤을 다룬 탐사 기획 보도가 나오는 것이다. 못봤다고? 굳이 찾아보지 않은 것이겠지.

  그래도 ‘기억이 안난다’는 친구의 말이 오래 남았다. ‘아현동 철거민’의 죽음은 명칭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송파 세 모녀’와 ‘성북 네 모녀’가 어떻게 다르더라. ‘방배동 모자 사건’은 뭐였지.


사회 운동가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정태춘, 박은옥의 93년 앨범 <92년 장마, 종로에서>. 동명 노래에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는 가사가 실려있다.


  미국 논픽션 작가 마이클 루이스도 책 <블라인드 사이드>(2006)에서 빈곤 문제를 다룬다. 주인공은 흑인 소년 마이클 오어.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나이에 키가 195센티미터, 체중 136킬로그램에 달하는 거구이다. 그런데도 농구 코트에서 “마치 무슨 가드나 할 법한 짓을 하는” 신체 능력을 가졌다. 각지의 미식축구 관계자들은 마이클을 보고 침을 흘린다. 하지만 그를 스카우트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국 체육계의 특성상 선수 지명은 대학에서 시작되는데, 대학을 가려면 고등학교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얻어야 한다. 마이클은? 너무 가난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가 대학에 진학하는 건 백인 상류층 부부 숀·리 앤 투이 부부가 입양을 결정한 이후의 일이다.


마이클 오어와 투이 가족의 모습. 출처:볼티모어선


  "저는 허트 빌리지에서 살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변한 게 있다면 바로 환경 뿐이죠." 마이클은 자신의 성공이 스스로의 재능 덕분이었다고 믿지만 저자인 마이클 루이스의 결론은 단호하다. “하지만 그 환경이야말로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으며, 그가 새로운 환경에서 제대로 기능하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빅 토니, 브라이어크레스트의 여러 교사들, 그를 먹여주고 재워준 가족들까지도." 그러면서 저자는 마이클의 사례를 확장해 이렇게 적는다. "스포츠 분야야말로 미국에서 순수한 능력주의가 통하는 유일한 분야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그의 재능조차도 그만 허비되고 말았을 것이다."

  어쩌면 식상한 메시지이지만,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독특하다. 저자·역자 후기를 제외하고 408페이지에 달하는 한국판 역서에서 마이클 루이스가 일종의 교훈을 제시하는 건 마지막이자 열두번째 챕터인 ‘모세조차도 말을 더듬었으니까’에서다. 그 이전의 챕터 내용은 대부분 마이클의 성장기이다. 어머니도 없이 가난한 동네에서 친구 집을 전전하던 그가 어쩌다 부유한 집에 입양되는지. 경제적 지원이 얼마나 그의 지적 능력을 향상시켰는지, 훈련을 통해 운동 능력은 얼마나 자라났는지. 그러니까 <블라인드 사이드>는 가난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사례를 하나하나 들어간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책이 아니다. 그저 저자의 화술에 빠져 몇 시간 마이클의 성장담을 듣다 보니, ‘이게 이런 이야기였어’라고 정리가 되는 것이다.


마이클 오어의 실화를 다룬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 포스터. 미국에선 2009년, 한국에선 2010년 개봉했다.


  산드라 블록과 퀸튼 아론이 주연을 맡은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2010년 개봉)도 마이클의 성장담을 다룬다. 책의 특별한 점은 미식축구의 역사도 함께 서술한다는 것이다. 챕터 1 ‘배경’이나 챕터 5 ‘어느 라인맨의 죽음’, 챕터 9 ‘스타 탄생’의 경우 마이클이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이들 챕터에서 저자의 관심은 ‘왜 미식축구에서 레프트 태클이라는 포지션이 중요해졌는가’이다. 이는 마이클의 포지션이기도 하다. 만약 레프트 태클이 가치있는 포지션으로 인식되지 않았다면 마이클이 후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미국 풋볼리그(NFL) 볼티모어 레이븐스에서 1라운드 지명을 받을 당시 마이클의 연봉은 5년 간 1340만 달러(당시 한화 기준 157억원)였다).

  심지어 한때 레프트 태클은 덩치 큰 선수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 포지션에 사람들이 주목한 건 패싱 중심의 체계적인 팀플레이가 미식축구 전략의 우세종이 되면서다. 달리는 속도가 중요했던 기존 문법과 달리 제구력 좋은 쿼터백의 역할이 점점 커졌고, 패싱 플레이를 저지하고자 발빠른 수비수가 쿼터백을 태클하는 새로운 대응 전략이 나타났다. 책 제목인 블라인드 사이드는 경기 중 쿼터백의 눈이 잘 향하지 않는 사각지대를 뜻하는 용어이며, 레프트 태클의 역할이 커진 건 쿼터백 중 오른손잡이가 많기 때문이다. 마이클의 성공은 양육이라는 환경 변화 덕분인 동시에, 미식축구 전략의 변화라는 흐름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미식축구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즐거움도 함께 얻는다. 어쩌면 동떨어진 개인과 환경, 시장의 동학을 한 편 이야기 속에 엮어낸 것은 전적으로 저자인 마이클 루이스의 솜씨다.


책 <블라인드 사이드>의 한국어 번역판 표지. 상단에 저자 마이클 루이스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한국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볼 수 있을까. 마이클 루이스는 초판 저자 후기에서 마이클을 입양한 숀 투이, 리 앤 투이에 대해 “이들의 개방성과 너그러움에 대해 감사한다”고 적었다. “투이 가족의 어느 누구도 내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멤피스 인근을 돌아다니는지, 또는 그들의 집 거실에 머물러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저자의 친구였던 숀은 마음만 먹었다면 그에게 무슨 내용의 책인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묻고 참견할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나 시사 프로그램을 향한 많은 관심을 생각하면 이런 책이 못나올 이유도 없을 것 같지만, 평전이나 자서전 대필을 제외한다면 유독 논픽션 저술이나 실명 보도의 대상이 되는 것을 꺼리는 것이 한국 사회의 분위기이다.

  혈연을 중시하고 입양을 꺼리는 문화도 마음에 걸린다. 마이클처럼 입양으로 이뤄진 사회적 이동이 한국에서 목격 가능한 사례일까. 예체능은 과외활동으로 치부될 뿐, 공교육 체계 안에서 제대로 훈련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전담팀이 있는 학교에 진학하거나 학교 밖에서 따로 배우는 것은 가능하지만 모두 부모의 별도 지원을 필요로 한다. 숀과 리 앤이 처음으로 농구장이나 미식축구장에 나타난 가난한 소년 마이클과 마주한 책 속 장면을 한국 맥락에서는 좀체 상상하기 어렵다.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에서 마이클의 지인인 흑인 소년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 장면 위로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는 마이클의 독백이 깔린다.


  책의 말미에서 마이클 루이스가 주목한 것은 아서 샐리스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한때 주 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한 재능있는 학생 선수였으며, 마이클처럼 켄터키 대학과 올 미스 대학에서 장학금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풋볼 경력은 고등학교 이후로 이어지지 못했다. 성적이 나빠 대학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카펫 청소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가난한 동네의 자기 집에서 강도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 그의 사망 소식을 우연히 신문에서 접한 리 앤은 남편 숀에게 말한다. "저 아이의 이름 대신에 마이클의 이름을 집어 넣어도 결국 똑같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거 알아?"

  미식축구 대신 어떤 종목, 어떤 종류의 재능을 집어넣어도 똑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는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가난 이야기를 쓰고 싶다.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의 한 장면. 출처: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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