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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 Jan 12. 2022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가면 속의 소년, SAM>, 톰 홀먼 주니어

'탐사'란 무엇일까. 수년 전 탐사보도팀으로 발령이 났을 때 내 머릿속은 온통 이 질문으로 가득 찼다. 언론사들이 경쟁적으로 탐사팀을 만들 때였다. 한 신문사에 새로 생긴 탐사팀이 보도물을 내놓는 족족 기자상을 휩쓸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그 거대한 바람에 실려 신설된 탐사팀에 합류한 뒤, 꽤 오래 이 질문을 붙들고 있었던 것 같다.


딱 이렇다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탐사보도는 미국에서 말하는 탐사보도와 성격이 조금 달랐다. 미국에선 내용이 중요하다. 권력의 암투, 방산 비리, 자본가의 성폭력 스캔들 같은 것들을 수사관처럼 캐내는 취재물을 탐사보도(invetigative report)라 부른다. 우리로 따지면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 취재부문에 해당할 것이다.


반면, 한국에선 '탐사'가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내용보다는 형식이다. 평소 잘 다뤄지지 않던 '구조적인 문제'를 '수개월 동안' 파고들어 '압도적'으로 펼쳐 보이는 것. 보자마자 취재에 들인 '품'이 확 느껴져야 한다. 여기에 '색다른 접근법'이나 '솔루션'까지 있으면 조건은 얼추 갖췄다. 보통 딱 떨어지는 사례 두어 개를 보여준 뒤 데이터 분석과 설문조사를 더하고 전문가 좌담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통적으로 '이달의 기자상' 기획부문 출품작들에 '탐사'라는 표현이 곧잘 붙는다.


샘 라이트너

이 책 <가면 뒤의 소년, SAM>(2003)은 원작 격 기사가 있다. <가면 뒤의 소년>(원제: The boy behind the mask). 책과 기사를 나란히 놓고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간지 기자가 수개월, 수년을 취재한 이 기사, 한국이었다면 어떻게 분류됐을까? 기자가 취재에 들인 '품'으로만 따지면 탐사보도에 가까워 보인다. 애초에 탐사팀이 아니고선 그만한 시간을 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형식이 걸린다. 이 기사는 기사라기엔 지나치게 '소설' 같다. '야마'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끝까지 읽지 않고선 아니, 끝까지 읽어도 그 의중이 선명하지 않다.


만약 이 기사를 쓴다면 부장한테는 뭐라고 보고해야 할까. 인터뷰 기사? 피플면 기사? 토요판 기사? 분명 말이 길어질 것이다. "저, 부장..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중학생이 하나 있는데요. 몇 달쯤 이 친구를 밀착취재하려는데, 괜찮을까요? 네? 다른 건 안 할 거냐구요? 그래야..겠죠? 그래서 뭐가 달라지냐고요? 음.. 제 생각엔 뭔가 독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아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킬" 될 것이다. "너 제정신이냐"며 한소리 듣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기자들 반응은 어떨까.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기자상은커녕(이 기사는 200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뭐 이런 걸 이렇게 길게 썼어" "이게 기사야?" 같은 핀잔만 잔뜩 들었을지 모른다. 한국 기자들에게 이 기사는 낯다. 언론사가 몇 달이나 공들인 보도라면 응당 있어야 할, 사회 구조적 문제점이나 데이터 분석, 전문가 해법 같은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분명 미국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기사를 쓴 톰 홀먼 주니어의 시선은 일말의 흔들림 없이 기사의 주인공, '샘 라이트너'만 쫓아간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는 샘은 여느 또래와 다를 게 없는 14살 소년이다. 종종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하며 옷 차림새와 멋 내기에 관심이 많다. 다른 친구들처럼 샘 역시 고등학생이 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학교 복도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온통 여자친구와 스포츠, 댄스.. 고등학교 생활에 관한 것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 샘이 아닌, 샘의 '마스크'였다. 샘은 혈관기형 탓에 왼쪽 얼굴이 보통의 네댓 배쯤 컸다. 종종 몸이 기우뚱거렸다. 돌아오는 반응은 두 가지였다. 동정하거나 혐오하거나. 출산 예정일보다 6주나 일찍, 그것도 두개골이 열린 채 세상에 나온 샘에겐 숨 쉬는 일 자체가 위기였다. 남들과 조금 다르게 태어난 샘의 삶은 그 뒤로도 순탄치 못했다. 동네 아이들에게 "괴물"로 불리는 샘의 방에는 거울이 있었던 적이 없다.


그랬던 샘에게 인생이 뒤바뀌는 일이 찾아온다. 갓 태어난 샘을 집도한 닥터 캠벨이 14년 만에 우연히 샘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이 만남을 예삿일로 넘기지 않았다. 샘을 고쳐주기로 마음먹은 그는 수소문 끝에 보스턴에 '길'이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었다. 어렵사리 수술이 성사됐지만, 드라마틱한 결과는 찾아오지 않았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깨어난 샘에게 돌아온 건 "이제 성형수술은 할 수 없다"는 가족들의 말이었다. 샘은 실의에 빠졌지만 이내 기운을 차린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기사는 샘이 당당히 고등학교에 등교하는 장면을 끝으로 마무리된다.(책에는 그러고 얼마 뒤 혼수상태에 빠지는 샘의 이야기가 추가된다)


2000년 10월 1일부터 나흘간 무려 1만 7000여 단어로 연재된 샘의 이야기는 흡인력 있게 독자를 빨아들인다. 마치 한 편의 단편 소설 같다. 기사를 끝까지 본 이들의 반응은 비슷하다. 두꺼운 소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처럼 잠시 눈을 감고 여운을 음미한다. 나는 기나긴 여정을 무사히 마친 자만 누릴 수 있는 이 잠시간의 상념, 여운이 이 기사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것은 철저히 계산된 결과물일 것이다. 기자는 분명 누군가로부터 처음 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미 여운에 허우적거리는, 나 같은 독자를 머릿속에 그렸을 것이다.


<오레고니언>의 수석기자 톰 홀먼, 편집장 잭 하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들이다. 둘은 소설처럼 독자를 끌어당기'내러티브 논픽션'을 오랫동안 써온 '콤비'였다. 과거 작은 언론사에서 짧게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1980년대 <오레고니언>에서 편집기자와 일요판 기자로 다시 만나 '새로운 기사'를 쓰기로 의기투합한다. 사실 관계만 건조하게 늘어놓는 것이 아닌, 치밀한 짜임새로 극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실화 스토리텔링'(true-life story-telling)을 시도한 것이다.


<가면 뒤의 소년>은 그 대표작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런 기사를 쓰려고 한 것일까? 잭 하트는 훗날 이 기사를 이렇게 떠올린다. 


"그 기사가 퓰리처상을 받았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독자들을 감동시켰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뜨겁고 열광적인 반응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포틀랜드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첫 화를 읽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샘의 이야기는 절망에 빠진 많은 이에게 희망을 줄 거예요." "기사를 복사해놨어요. 여덟 살 난 아이가 고등학교에 가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또래 압력(Peer pressure)을 겪는 날이 오면 이 글을 꺼내 볼 거예요." 이런 편지들이 편집국으로 매일 한아름씩 쏟아졌다고 한다.


잭 하트

잭 하트는 이 기사의 가치를 "무미건조한 사실만 읽었다면 얻지 못했을 통찰, 정신적 격려, 정서적 충만, 인생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데에서 찾는다. 그렇다고 꼭 완벽할 필요는 없다. 그는 "완벽한 주인공이 없어도, 명확한 클라이 맥스가 없어도, 정확한 통찰 지점이 없어도 얼마든지 논픽션(기사)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즉, 최소한의 조건만 충족하면 누구라도 주인공이, 기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과 저변이 넓어진 데에는 퓰리처상도 한몫했다. 1979년 들어진 리처상 'Feature Writing' 부문의 평가 기준은 '작성' '독창성'이다.


우리 눈에는 상당히 낯선 풍경이다. 이 기사를 어느 쪽에 분류해야 할지조차 헷갈리는 건 그만큼 이런 기사가 우리 언론에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탐사팀에 있을 때 수십, 수백개의 기자상 수상작들을 연구했지만, 이런 '스토리'는 보지 못했다. 물론 비슷한 시도들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거시적인 사회 문제를 끄집어 내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난 기사는, 단언컨대 없었다.


미국의 기자들이 수개월, 수년에 걸쳐 한 개인의 삶을 말 그대로 '탐사(探査)'하고, 이를 독려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20여년 전, 신문에 나흘 동안 실린 14살 소년의 삶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 위로를 가져다 주었다. 기자가 발굴한 '이야기'가 독자들 내면에 닿아 어떤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한국에서는 낯선, 이 일련의 과정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만약 그것을 '저널리즘'이라 부를 수 있다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생각보다 더 많을 지 모른다.

톰 홀먼 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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