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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현진 Jan 05. 2022

기록하는 것의 의미

<일본 최고재판소 이야기>, 야마모토 유지

일본 최고재판소 전경. 


<일본 최고재판소 이야기>는 일본 최상급 법원의 역사를 잘 알려진 사건과 알려지지 않은 비사를 소개한 책이다. 사법권을 행사하는 최고법원이 일본이라는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를 알기에는 이보다 좋은 책은 없어 보인다. 꽤나 두꺼운 책(667쪽)이지만 흥미로운 사건의 내밀한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서술했다. 


일본 법조계의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오래전 일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 전하는 듯한 내밀한 속사정을 읽으면 한편의 정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도 든다. 작가의 공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책을 쓴 마이니치신문의 야마모토 유지 기자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베테랑 법조 기자였다고 한다. 이 책으로 일본 기자클럽상을 수상했고, 일본의 특수부 검찰들을 다룬 <도쿄지검 특수부>도 썼다. 검찰과 법원의 간극이 큰 한국의 취재 환경에서 쉽게 쌓기 힘든 경력이다. 


책에는 일본 사회에 논란이 됐던 다양한 사건을 한국의 대법원격인 최고재판소가 어떻게 다뤄왔는지 소개하면서 사법체계가 발전(혹은 퇴보)한 역사를 보여준다. 


흥미로웠던 사건은 1968년 10월5일 오후 일본의 한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한 여성이 끈으로 아버지의 목을 졸라 죽였다고 이웃에게 고백한 뒤 체포됐다. 존속살해죄가 적용됐다. 조사 과정에서 살해 동기가 드러난다. 14세부터 친부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여성. 


성폭행으로 5명의 아이까지 출산했던 그는 25세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사회로 나가 일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평범한 여성들의 삶'을 목겨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만났다. 이를 알게된 친부는 딸을 감금했고,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버지의 목을 조르는 것 뿐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딸은 몇 년의 징역을 살아야 할까. 


일본의 옛 형법 제200조는 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살해한 경우를 '존속살'(尊属殺)의 죄로 규정하고 있었다. 여러 정상을 참작해 감형해도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집행유예를 할 수 없다. 살인죄보다 가중되 처벌이다. 한국의 형법 제250조2항도 '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사형, 무기에 처하는 건 살인죄와 같지만 하한이 살인죄의 징역 5년보다 높다.


이 여인에게 적용된 존속살해죄는 부모에 대한 '효'를 어긴 패륜범죄를 더 강하게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부모를 죽였다고 해서 가중처벌하는 것은 '모든 국민은 법 아래에서 평등하다'는 일본 헌법14조에 규정한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피해자의 신분에 차별을 둬 가해자를 가중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일본 최고재판소에 도달했고 위헌 판결로 이어졌다. 한국의 대법원격인 최고재판소는 재판의 최종심 역할만을 맡는 대법원과 달리 위헌법률심사도 맡는다. 한국은 헌법재판소(이전에 헌법위원회)만이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는지 심사해 그 효력을 부정할 수 있다. 


최고재판소는 격론 끝에 이 여인에게 징역 2년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징역 3년6월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한 것이다. 파기 사유는 존속살인죄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 가치에 위반된다는 것이었다. (일본 형법 200조 존손살은 위헌 선고 후에도 없어지지 않고 실무에서 적용되지 않다가 1995년 폐기됐다.)

일본 최고재판소 법정. 

야마모토 유지 기자는 당시 어떤 논의가 법관들 사이에서 오갔는지 등을 전하면서도 위헌 선고에 대해 비판하는 정치인들의 반응도 소개했다. 위헌 선고는 법률 즉 입법부에서 잘못된 법을 만든 것이라고 선언하는 일이다. 위헌 선고가 쏟아지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선 위헌 선고는 드물다고 한다. 사법부와 입법부의 관계 속에서 자리잡은 질서 같다는 생각을 책을 읽으면서 했다. 


야마모토 유지는 이 외에도 정치인과 최고재 판사들 사이의 갈등을 여러차례 소개했다. 그는 이 책을 시작하면서 최고재판소 출범 전 사법독립에 대해 갖고 있는 초기 법률가들을 소개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사법독립은 지극히 당연한 헌법적 가치로 여겨진다. 하지만 막상 그것이 문제가 될 때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실제 그것이 무엇인지 조차 명확하지 않다. 몇년 사이 진행되는 사법농단 의혹에 대한 재판도 그래서 공전을 거듭하거나 법률로 처벌하기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최고재판소는 1947년 출범했다. 일본은 2차세계 대전을 기준으로 전전(戰前), 전후(戰後)라며 역사를 양분한다. 최고재판소는 전후에 세워진 최고법원이다. 전전에는 1875년 메이지헌법에 따라 세워진 대심원이 1890년부터 최상급재판소의 역할을 했다. 대심원은 그러나 검찰보다도 위상이 낮았고 법무부장관에 해당되는 사법대신의 지휘를 받기도 했다. 입법, 사법, 행정으로 국가권력을 나누는 삼권분립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군국주의와 천황제 아래에서 제대로 된 사법독립을 이루기 어려웠다. 


패전 후 일본은 미군의 지휘에 따라 헌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민주화된 사법체계를 도입하려고 했는데 그 핵심이 최고재판소였다. 야마모토 유지는 이런 이야기들을 소개하면서 최고재판소의 역사를 '정치로부터 어떻게 독립하고 정치와 다시 인연을 맺었는지, 어떻게 거리를 두어 왔는지'라는 렌즈로 들여다본다. 친부 살해 사건도 이런 정치적 갈등과 사법 독립의 관점에서 위헌심사 과정을 소개한 것이다.  


이 책은 그래서 단순히 일본 최고법원의 역사와 그곳에서 다뤄진 사건을 소개하는 차원에서 의미를 다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이 살아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지난 1년 동안을 법원 담당기자로 일한 덕에 한국의 사정과 비교해가며 책을 읽었다. 대법원의 재판은 늘 논쟁거리가 되고 누구도 100% 만족하지 못하는 결론이 난다. 그러나 모두 나름의 논리 속에 결론이 세워지고 사회와, 정치와도 관계를 맺는다. 지난 1년 역사로 남을 법한 사건들도 있었고 그것을 가까이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야마모토 유지처럼 바라보았는지 하고 생각한다.


법원 돌아가는 사정을 어깨너머로 봐온 이들이나 국가의 체계를 세우는 법의 뿌리를 고민하는 일, 정치와 법의 관계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재밌게 읽어볼 만한 책이다. 대중성이 떨어질 수 있지만 사실을 기록해 후대에 전한다는 관점에선 논픽션이 지닌 가치에 충실하다고 보인다. 일본에는 특히 이런 다양한 논픽션들이 나오는 게 부럽다. 르포 라이터들이 여러 주제를 놓고 논픽션을 쓰기도 하면서 다양한 독자들이 이를 즐긴다. 기록하는 것의 가치를 두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겠다. 우리에게도 그런 작업을 펼친 이들이 없지 않지만 더 많은 기자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걸 고민했으면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야마모토 유지 기자는 1936년 일제 중국 심양(만주국 봉천)에서 태어났다. 1961년부터 마이니치신문 기자로 일을 시작해 사장까지 지냈다. 2017년 7월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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